117화
바로 눈앞에서 어스를 놓쳐버린 푸리엘은 이에 당황했다.
잠시 고민하던 푸리엘은 사라진 그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밝음이 지배하는 시간이라 완벽한 은신은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것은 그녀의 실수였다.
어스를 찾기 위해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선 지 10분 만에 푸리엘은 호인족 혼혈 일꾼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누구요?”
상대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푸리엘은 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서 호인족 혼혈을 응시했다.
그것은 자존심의 발로였다.
“도둑이면 얌전히 돌아가시오. 당신 같은 자들이 설칠 땅이 아니니까.”
‘정말인가? 정말 나를 알아차린 건가?’
푸리엘의 자존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순혈도 아닌 고작 혼혈에게 자신의 은신 능력이 간파당한 것이 그녀에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호인족 혼혈은 이를 거절로 생각한 듯 들고 있던 곡괭이를 내려놓더니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이종족의 지위를 잃고 몬스터로 전락한 늑대 인간의 손톱만큼이나 날카롭고 강인해 손톱이었다.
늑대 인간은 강력한 몬스터다.
상극의 무기가 아니고선 상처를 낼 수 없는 강력한 몸뚱이와 괴력, 철판을 종잇장처럼 베어내는 손발톱과 이빨, 신속한 움직임과 도약력에 더해 후각은 늑대 인간을 상대하기 까다롭게 만드는 요소였다.
푸리엘은 그러한 늑대 인간을 여럿 사냥해 본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이 지금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만만찮은 적이라고.
스팟.
‘빠르다!’
푸리엘은 상대가 내는 속도에 깜짝 놀랐다.
늑대 인간에 버금, 아니 그보다 한수 위의 속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 손톱은?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푸리엘은 검을 빼들었다.
평범한 철검은 그녀의 손에서 마나 소드란 이름으로 탄생했다.
단단한 바위도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위력의 마나 소드와 손톱이 격돌했다.
그 결과는 몹시 놀라웠다.
마나 소드가 손톱에 막혔다.
작은 흠도 내지 못하고서.
‘어째서 이런 자가 고작 농장의 일꾼으로 지내고 있는 거지?’
물론 혼혈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과 인간들이 걸어 둔 사회적 제약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농장의 일꾼은 호인족 순혈 못지않은 속도와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육체의 힘만 믿고 덤비는 것 같지만 막상 상대해본 푸리엘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격투술!
놀랍게도 이를 전문적으로 배운 태가 역력했다.
내지르고 거두는 주먹, 발의 움직임에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들어오는 무릎과 발차기가 바로 그 증거였다.
손톱의 길이엔 비할 수 없으나 상대의 발톱도 날카로웠기에 푸리엘은 마나 소드를 사용하는 기사 네 명과 다투는 느낌을 받았다.
충격은 비단 푸리엘만 받은 건 아니다.
그녀를 상대하는 호인족 일꾼, 아니 조나단 역시 꽤 놀라고 있었다.
상대가 마나 소드 사용자여서가 아니다.
자신의 공격에도 상대의 은신이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아!’
더해 악독한 공격 역시 없었다.
이에 조나단은 대차게 공격한 이후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푸리엘은 그 뒤를 당장 쫓아가려다 참았다.
쫓아가면 반드시 상대를 상하게 할 텐데,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러서라. 이후 덤빈다면 그땐 네 목을 베겠다.”
푸리엘은 조나단을 향해 낮게 경고했다.
조나단은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을 단순한 협박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나단이 멈칫한 사이 푸리엘은 안개의 정령 뮬을 소환하여 조나단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녀는 그 순간을 이용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조나단은 제자리에서 뒤로 훌쩍 물러선 채 뒤따라갈 마음을 먹지 못했다.
‘시에라에게 알려야겠어.’
* * *
2띠 던전에 입장한 어스는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버스터를 주로 사용했다.
간혹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했지만 앞서 두 스킬보다 사용횟수는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블링크를 통한 정찰로 보스 몬스터가 어디쯤 있는지 그 위치는 파악한 상태다.
그럼에도 어스는 놈을 처리하지 않고 외곽으로 돌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코인 수급 때문이었다.
알아서 찾아와 주는 놈, 블링크를 팔아서 찾아가는 서비스까지 바쁘게 움직이자 더는 일반 몬스터를 볼 수 없었다.
‘3띠급이면 보너스 포인트를 받을 텐데.’
달랑 하나지만 레벨업 이외에 포인트를 수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당연히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일반 몬스터 정리를 마친 어스는 미리 봐두었던 보스를 향해 이동했다.
자신의 수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보스의 경계심은 매우 높은 상태였다.
그래 봐야 2띠 던전의 보스다.
어스는 놈을 향해 콜 라이트닝을 곧장 날렸다.
당장 죽진 않았지만 감전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이후 세 번 더 콜 라이트닝을 먹여주자 놈은 맥없이 쓰러졌다.
2천 코인이 한 번에 입금됐다.
트롤 7마리를 잡아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
하지만 액수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스가 단독으로 7마리의 트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스가 느끼기엔 그랬다.
평범한 창을 아이템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냉큼 죽은 보스 사체 앞으로 내려선 어스는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아쉽게도 아이템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고작 2띤데 아이템을 바라면 도둑놈이지.’
곧 보스가 사망한 던전은 사라지고, 어스 또한 밖으로 나갔다.
던전이 발견된 예의 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어스는 곧장 농장으로 이동했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2시간은 더 남았다.
* * *
농장에 도착한 어스는 곧장 시에라를 찾았다.
시에라는 저택에 없었다.
자신이 농장에 온 이후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던 그녀였기에 이에 의문을 느꼈다.
“티나, 시에라는 어디에 갔어?”
묘인족 혼혈인 티나는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혼혈이지만 묘인족 피가 옅은 그녀는 머리 위의 고양이 귀만 없다면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반면 다른 묘인족 하녀들은 모두 꼬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에라는 티나를 어스 전용 하녀로 배정했다.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백작님.”
“알았어. 그녀가 돌아오면 바로 올려 보내.”
티나를 돌려보낸 어스는 소파에 앉았다.
방이 넓다보니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가구가 있어 그 점은 좋았다.
코인 : 69,880.
기존 코인에 오늘 수입까지 합친 액수다.
6만 코인이면 6서클 스킬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위그드라실의 계승자를 활성화하지 못한 지금은 딱히 쓸 곳이 없었다.
칭호만 활성화되면 굳이 6서클 스킬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7, 8, 9서클을 구입해도 된다.
문제는 스킬 시전에 필요한 마나가 부족하여 당장 칭호를 활성화하더라도 6서클 이상의 스킬은 구입해 봐야 그림의 빵이었다.
6서클 스킬의 시전에 필요한 마나는 400인 것에 비해 7서클은 1,000의 마나가 필요하다.
고작 한 단계 차인데도 2.5배 차이다.
그럼 7서클과 8서클도 2.5배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자그마치 5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9서클은…… 한숨만 나올 뿐이다.
현재 어스의 마나 총량은 410으로 레벨을 올려서 업적 포인트를 받던 시절이었다면 설사 8, 9서클 스킬을 구입할 수 있더라도 마나 때문에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보너스 포인트를 보상으로 지급하는 던전의 출현은 어스 입장에선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더해 칭호의 존재도.
‘당장 칭호를 활성화할 방법도 없으니까.’
4강부턴 스킬 구매가의 5배가 필요하다.
5서클의 경우 한 번 강화하는데 필요한 코인은 자그마치 5만, 그래서 5서클은 제외했다.
4서클은 그보다 적은 1만 5천 코인이지만 보유한 코인으론 이 역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딴엔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화를 하려고 보니 푼돈이다.
하아.
그러니 1~3서클 스킬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몬스터를 상정하면 파이어 볼이 낫겠지만, 로엘이란 존재를 알게 된 지금은 대인전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파이어 볼은…… 제외하자.’
남은 선택지는 1서클 매직 애로우와 2서클 파이어 애로우다.
파이어 애로우는 매직 애로우보다 강력하지만, 사거리와 속도는 매직 애로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파이어 애로우를 강화해야하겠지만 강화 비용이 매직 애로우의 2배이다 보니 푼돈으로 보이기 시작한 코인이 발목을 잡았다.
‘파이어 애로우보다 파괴력이 부족하지만 사람이 상대면 매직 애로우도 부족하진 않지.’
어디 그뿐이랴.
포션 없이 한 번에 생성할 수 있는 숫자에서도 파이어 애로우의 2배인 점을 감안하면 매직 애로우에 투자하는 것이 낫지 싶었다.
‘확률도 거지같은데 한 번이라도 더 시도할 수 있는 매직 애로우로 하자.’
그리고 이런 이유를 들어서 어스는 매직 애로우를 선택했다.
도전 기회는 139회.
심호흡을 통해, 마른세수를 통해 몸과 정신을 일깨운 어스는 작업에 들어갔다.
139번의 기회가 있어 그런지 안 된다는 생각은 없었다.
스킬 구매가의 5배 구간인 4에서 6강!
‘6강 가즈아-!’
* * *
호인족 혼혈 조나단의 긴급 연락을 받은 시에라는 자경대의 업무를 전면 중단하고 침입자의 수색에 나섰다.
후각이 예민한 견인족은 조나단과 푸리엘이 격돌한 장소에서 희미하게 남은 냄새를 제 코에 각인시켰다.
이후 견인족 혼혈은 냄새를 쫓아 움직였다.
침입자는 자신의 냄새를 지우기 위함인지 냄새가 심한 곳을 거쳐서 움직였다.
‘오히려 다행이지.’
침입자의 희미한 냄새는 오히려 추적에 장애였다, 그런데 자신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침입자가 축사에 들린 것이 오히려 쫓는 입장에선 실보다 득으로 작용했다.
그렇다 보니 추적에 속도가 붙었다.
수량이 깊은 개울 앞까지.
개울을 앞에 두고 견인족 혼혈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침입자의 냄새는 여기서 끊어졌어.”
견인족 혼혈의 말에 시에라를 비롯한 자경대의 표정에 실망이 차올랐다.
물길은 농장 바깥으로 이어져 강과 만난다.
침입자가 물길을 이용하여 농장을 빠져나간 것이라면 냄새로 추적하는 건 포기해야 한다.
“농장을 빠져나간 건 아닐까, 시에라?”
“물길은 농장 밖으로도 이어졌지만 위로도 이어져 있어.”
“음. 그럼 어떻게 하지? 구너가 실패한 이상 다른 녀석들을 데려와도 어려울 텐데.”
“정령을 통해 수색하는 수밖에.”
“괜찮겠어? 농장엔 디콘이 있어. 성기사이자 마법사인 백작님도 계시고.”
“백작님은 외출 중이셔. 디콘이 정령을 알아차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긴 고작 디콘이니까. 그런데 가능하겠어?”
“시도는 해봐야지.”
조나단의 걱정을 뒤로한 시에라는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소환했다.
시에라는 실프에게 일러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실프는 해맑은 웃음을 띠며 곧장 날아올랐다.
정령은 계약자로부터 멀어지면 질수록 급격히 힘이 떨어진다.
그나마 바람의 정령은 나은 편이지만 대신 계약자의 마나를 크게 소모하기에 오래 지속할 순 없었다.
마나 소모가 한계에 가까워진 시에라는 실프를 귀환시켰다.
더 이상 마나를 소모했다간 기절할 수 있었기에.
“역시, 안 되네.”
“노력했잖아. 그보다 침입자의 목적은 뭐였을까? 저택에서 없어진 물건도 없다며? 혹시, 백작님을 노린 암살자는 아닐까? 주교가 백작님께 앙심을 품고 암살자를 고용한 것일 수도 있는데. 차라리 백작님께 보고하는 건 어때?”
“돌아오시면 해야지. 프라이스 님 못지않게 좋은 분을 다치게 할 수 없으니까.”
시에라의 말에 자경대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사람이 이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시에라! 시에라! 큰일 났어! 백작님이 널 찾고 있어. 빨리빨리 서둘러. 백작님 화내시면 큰일이잖아.”
호들갑스런 그 목소리에 시에라는 조나단에게 수색과 경계를 부탁한 뒤 급히 저택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자답게 그녀의 달음박질은 무척이나 빨랐다.
막 저택에 도착한 시에라는 울분이 가득한 괴성에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배, 백작님!?’
이도 잠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더욱더 급히 놀렸다.
농장주인 백작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하면 농장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