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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로 성장하는 마법사-115화 (115/250)

115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던 상황은 상대가 먼저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끝이 났다.

그는 달아나지 않았다.

저벅저벅.

느린 걸음으로 어스가 서 있는 테라스로 접근했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상대의 행동이 어스에게 먹혔는지 어스는 묵묵히 상대를 예의 주시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거리가 좁혀질수록 상대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졌다.

‘저 사람이 왜?’

유령처럼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상대의 정체는 놀랍게도 위그드라실 서커스단 단장이었다.

암살자 조직에서 보낸 인물이 아닌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로엘 단장의 출현이 반갑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전원이 익스퍼트로 구성된 암살자들을 상대하던 단원들의 수장이 바로 로엘이다.

그런 막강한 무력조직을 갖춘 이가 할 일 없이 이 야심한 시간에 방문할리 만무하다.

그리고 이를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분명 미행을 붙였으리라.

대체…… 왜?

당시 현장진술에선 서커스단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점도 점이었지만, 암살자 조직에 이어 서커스단의 미움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이후 평생 무료 관람권은 태워 버렸다.

이상한 일에 엮일까 봐.

그래서 다신 얼굴을 안 볼 줄 알았는데.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스 경.”

그걸 아는 사람이 죄송한 짓은 왜 하는 건지.

일단 상대에게선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철옹성은 내려놓지 않았다.

당장은 로엘 단장 한 명뿐이지만 주변에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익스퍼트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아치 무리도 아니고, 어째 요즘은 칼만 차고 다니면 다 익스퍼트다.

무섭게.

흠흠.

“의외네요.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고개가 아픈데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거절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순간 그와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일단 초대했다.

거절했는데도 안 가고 버티면 민망하니까.

“마침 의자가 하나 더 있네요.”

“감사합니다.”

사람을 깨워 현관문을 열어 줘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발 구름 한 번에 3층 테라스까지 단숨에 도약했기 때문이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어스는 이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상대의 두 손과 옆구리를 살폈다.

무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순 없다.

무기를 쥐고 있을 때보단 덜하겠지만 마나를 다루는 익스퍼트의 주먹도 무시할 수 없는 흉기니까.

‘그 주먹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근래 체력 스탯에 신경을 쓴 덕분에 현재 어스의 생명력은 295였다.

마나를 머금은 주먹질에 버틸 수 있을까? 일단 한 방이라도 버틴다면 후엔 이길 자신이 있는데.

치열했던 그의 생각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를 마냥 황당한 질문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세상에 알릴 수 없는 커다란 비밀을 그가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비밀을 흘렸고, 그것을 저 자가 알아차린 것이라면?

‘협박인가?’

단순 추측인지, 물증이 있어 하는 협박인지 알아내야 한다.

방금까지 어스는 상대의 물리적인 공격만 우려했으나 지금은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위협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암살은 자신만 죽지만 자신이 비밀이 폭로될 경우 주변인까지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스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차가워졌다.

“역으로 질문하죠. 당신의 그 질문이 야심한 이 시간에 사유지에 침범할 정도로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만약 중요하다면 대답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날 찾아왔어요.”

로엘은 대답하지 않고 어스를 빤히 응시했다.

사실 로엘 입장에서 이번 방문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헥터 왕국 국경 도시 헥시움의 사건 이후 로엘이 소속된 조직에선 기존의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위그드라실 서커스단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다.

로엘 역시 서커스 단장이라는 위치를 벗게 되었다.

만약 서커스단을 기존대로 운영하였다면 로엘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버리기로 한 신분이기에 그는 큰마음 먹고 어스를 직접 찾은 것이다.

이를 상기한 로엘은 결심을 굳혔다.

근거 없는 상대에 대한 호감, 그 호감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그러시다면.”

로엘은 자신에게 걸려 있는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드러난 로엘의 진면목에 어스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우당탕.

‘에, 엘프!’

이종족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혼혈은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차별도 이종족이 받는 차별에 비하면 심하다고 볼 수 없다.

왜? 현재 뤼빅스에서 살아가는 이종족은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가축처럼 다뤄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러한 자가 위그드라실과 같은 거대 서커스단의 단장이라니, 누가 있어 이 말을 믿겠는가.

의자를 바로 세우로 다시 앉은 어스는 변신을 푼 로엘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혼혈입니까?”

“제 몸엔 인간의 피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처럼 혼혈을 차별하진 않습니다.”

차별은 나쁘다고 배웠지만, 실상 그 말이 무색하게 인간들은 이종족을 비롯한 혼혈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했다.

이러한 경향은 대종족 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온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종족이나 혼혈에 대해 너그러운 이들이 오히려 비난받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물론 모든 인간이 이종족 차별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아니지만, 차별반대주의자들의 힘은 세상을 바꾸기엔 차별주의자들에 비해 열세였다.

모든 면에서 한참 열세다.

어스는 노예제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편에 속했다.

그에게 거창한 사상이 있거나, 혹은 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아니다.

그 자신이 차별을 몸소 겪은 때문이었다.

다른 것뿐인데, 세상이 한 목소리로 틀리다고 말하며 더해 위협하는데 어찌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나마 다행이네요.”

“…….”

“혼혈들 말이에요.”

“음, 혼혈에 대한 반감이 없으신가 보군요.”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미리 정하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을 죄인 취급하는 건 잘 못이라고 생각해요.”

“흔치 않은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군요.”

“흠, 그렇다고 떠들고 다니진 마세요. 명색이 성기산데 이런 이야기가 퍼지면 제 입장이 곤란해지니까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로 절 찾아온 거죠? 만약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면 전 대답할 생각도 이유도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할 테니까. 하지만 또 한 번 이상한 소릴 한다면 조용히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조각의 기운을 몸에 담을 수 있습니까?”

로엘의 말에 어스는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어스의 반응에 오히려 질문을 한 로엘이 더욱 놀라고 말았다.

‘왜? 어째서 인간인 그가!’

* * *

로엘은 어스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그는 갔지만 그가 어스에게 남긴 질문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어스를 괴롭혔다.

덕분에 루리아가 깨우러 왔을 땐 자다 일어난 척 연기하며 함께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는 중에도 로엘의 말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어 평소 먹던 음식의 3분의 1도 먹지 못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어?”

체구와 달리 잘 먹고, 많이 먹는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모습은 루리아의 걱정을 사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아, 아뇨. 그냥 오늘은 속을 비워두고 싶어서요.”

“몸이 안 좋은 거야?”

“그건 아니고요. 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요.”

“다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차라리 악몽이면 걱정이나 덜 하지.

어스는 한숨을 꾹 참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아뇨, 그냥 잠을 설쳤어요. 그보다 요즘 수련에 엄청 집중하던데 조짐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조금.”

“축하해요.”

“축하 받을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 몸이 안 좋으면 들어가서 쉬어. 필요하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준비해 볼게.”

“한숨 자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들어가 봐.”

“그건 아니죠. 식사 끝나면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드세요.”

여럿이 함께 식사하면 빠질 수 있겠지만 단 둘이 먹는 식탁에서 하나가 빠지면 혼자다.

외로울 수 있다.

그래서 어스는 자리를 지켰다.

그 마음을 아는지 루리아는 더 이상 그를 채근하지 않고 식사 속도를 올렸다.

깔끔하게 식기를 비운 루리아는 그를 방까지 에스코트(?)했다.

“이런 건 보통 남자들이 하지 않나요?”

“그건 차별이야.”

루리아는 그냥 한 말이었지만 차별이란 말이 잠시 잊고 있던 로엘의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로엘 그자는 대체 어떻게 칭호를 활성화하려는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걸까? 혹시, 이종족중엔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힘을 각성하는 자들이 있는 게 아닐까? 만약,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것이라면 그땐,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어쩐지 아침마다, 샤워 후에 거울을 보면 빠져들 듯 잘생겨 보이더니 핏줄에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곁에 있어 줄까?”

“아, 아뇨. 중요한 시기에 그러면 안 되죠. 얼른 가요.”

다른 날 같으면 기뻤을 테지만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간절히, 아주 간절하게 혼자이기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스는 루리엘의 등까지 떠밀었다.

탁.

문을 닫은 어스는 그길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맞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어스는 더더욱 절망했다.

* * *

한편 그 시간 어스처럼 고뇌에 빠진 인물이 있었으니.

“로엘 님?”

“…….”

“로엘 님?”

“응?”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푸리엘.”

“예.”

“수호자의 전설에 대해 알고 있나?”

“위그드라실님이 간악한 인간 데릭 가이어스의 손에 불태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예언이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로엘님의 선조 중 한 분이 한 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예언이 이뤄진 것 같네. 아직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푸리엘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엘이 언급한 내용은 엘프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만 문제였기 때문이다.

수호자의 의미는 지키고 보호하여 주는 존재를 말함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엘프족에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의미는 바로…….

꿀꺽.

“왕께서 탄생하신 겁니까?”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인간이란 점이네.”

앞서보다 더 큰 충격이 푸리엘을 강타했다.

종족의 왕이 인간이라니. 이보다 더 모순된 사건은 없기 때문이었다.

푸리엘은 곧 알아차렸다.

로엘이 말한 인간이 누구인지를.

‘어스, 그자…… 인가?’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자네가 그를 지켜봐 줬으면 하네. 중요한 보고는 마법 통신구로 부탁하겠네.”

“처리입니까? 보호입니까?”

임무의 성격을 묻는 푸리엘의 말에 로엘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종족을 짓밟은 종족, 위대한 어머니를 불태운 불결한 존재를 낳은 종족의 아이를 수호자로 모셔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의 아이러니는 로엘로 하여금 밤새 깊은 고민에 빠뜨렸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곤 하지만 예언이 닿은 존재라면 마냥 인간으로만 생각해선 안 될 문제였다.

“보호.”

“명을 받잡습니다.”

낮게 복명한 푸리엘은 한줄기 연기가 되어 장내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엘프 중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만이 계약할 수 있는 안개의 정령 뮬, 푸리엘의 신비한 이동능력은 그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푸리엘은 엘프족이 터부시하는 일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다.

암살과 관련된 일이었다.

하나 지금 그녀가 맡은 임무는 지금까지와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런 일에도 유능한 인물이었다.

푸리엘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로엘 역시 곧 장내를 떠났다.

무거운 한숨을 장내에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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