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자신의 땅에서 불에 닿은 치즈처럼 늘어져서 주는 밥이나 먹으며 며칠 푹 퍼져 있을 생각이었던 어스는 예상하지 못한 퀘스트(?)를 받고 농장을 나섰다.
루리아는 농장에 남겨 두었다.
수련에 빠진 그녀의 모습은 말조차 붙일 수 없을 만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에라에게 말만 전하고 2명의 디콘만 대동하고 프린트 시로 향했다.
마차로 반나절이나 달려야 하는 곳이라 아침만 먹고 바로 출발했다.
구질구질한 일일수록 미뤄두면 뒤가 가려웠기에.
‘고위 성직자라는 새끼가 남의 땅에 군침이나 흘리다니, 이러니 교단이 욕을 처먹지.’
헤럴드 주교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어스는 그 시간도 짜증이 치민 듯 이내 털어버리고 창문을 열었다.
저택에서 제법 오래 달린 것 같은데도 아직 자신의 농장이었다.
땅도 넓고 토질도 비옥한 어스의 농장엔 품질 좋은 말을 비롯해 온갖 가축을 키우고도 땅이 남아서 그 땅엔 밀, 보리, 옥수수, 감자 농사도 지었다.
처음 고용인의 숫자가 160명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이에 조금 놀랐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족하지 않나 싶었다.
‘부족하면 시에라가 알아서 하겠지.’
저녁에 봐도, 아침에 봐도 관리인 시에라의 외모는 아름다워서 고귀함마저 느껴졌다.
이 세상의 모든 엘프가 다 시에라 같다면 과거 엘프 종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을 고대 인류가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양떼를 몰고 가는 양치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꼬리를 가진 견인족 혼혈이었다.
혼혈이라곤 하지만 견인족이 양치기 개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농장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 이미 고용인들 사이에 파다했는지 어스의 마차를 알아본 양치기가 모자를 벗곤 고개 숙였다.
이에 어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 하하. 기분 이상하네.’
머쓱한 기분에 얼른 손을 내린 어스는 등받이에 급히 등을 묻곤 곁눈질로 양치기를 보았다.
아직도 허리를,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 이러한 일을 더 경험하자 그제야 조금 익숙해진 어스는 더는 숨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들어왔다.
그건 경계말뚝이었다.
‘저 안쪽이 다 내 거란 말이지.’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았다.
평생 시골에서 살던 분들이라 그런지 대도시에서의 생활이 불편해 보였다.
여동생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그땐 부모님을 이 농장으로 모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만, 땅이 이렇게나 넓은데 영지로 선포할 수 없을까?’
영지 귀족은 세습 귀족으로 단승 귀족과는 그 결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제아무리 왕이라도 세습 귀족을 임명하기 위해서는 대귀족들의 동의가 필수였다.
더구나 자신은 솔론 인이 아닌 헥터인이라 넘어야 할 난관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 넓은 땅을 보니 영지로 만들면 좋겠다는 욕심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혼혈의 영지라.’
남들은 터부시할 수 있지만 어스는 오히려 그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시에라를 제외한 다른 혼혈들과는 몇 마디 섞지 않았지만 이야기로 전해 들은 이종족은 인간보단 모든 면에서 월등한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이종족 연합이 인간들에게 패했을까?
페어몬트는 이종족 연합의 패배 원인을 두 가지라고 했다.
첫째, 내부분열.
둘째, 데릭 가이어스란 걸출한 인재와 인류의 구심점 역할을 한 교단을 꼽았다.
종족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인류의 영웅 데릭 가이어스는 전쟁이 끝난 이후 사막의 신기루처럼 작은 단서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때문에 그에 대한 수많은 설들이 양산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영웅 데릭 가이어스가 룬이 보낸 전사로, 사명을 다한 그가 육신을 갖고 그대로 신의 곁으로 갔다는 설도 있었다.
성기사이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어스는 그 설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겼다.
-언제 와?
거너에게서 통신이 왔다.
거너가 먼저 연락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어스는 두 눈을 반짝이며 즉시 문자를 보냈다.
‘조각 이야긴가?’
그랬으면 좋겠다.
10분이 1시간처럼 길었다.
궁금증에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어떤 느낌의 시간이건 시간은 칼 같이 움직인다. 10분이 되자 거너가 연락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 조각.’
* * *
프린트 시는 국왕 직할지로 영주가 아닌 시장이 국왕을 대신하여 도시를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귀족이 다스리는 영지보단 국법이 준수되는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주가 폭정을 일삼는 곳의 사람들은 직할지로 이주하곤 했다.
가족 단위의 이주가 쉬운 편이 아니다 보니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국법에 없는 내용이었지만 이 문제로 영주가 처벌된 전례는 없었다.
국법으로 그들을 처벌하려 들었다간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민들 입장에선 부당한 일이었지만 힘없는 입장에선 내키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어스 일가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피어스 남작 영지를 떠날 수 있었던 건 영주가 법을 잘 지키는 인물이라기보단 어스와 척을 지기 싫은 것 때문이 컸다.
아무튼 이러한 관습법으로 인해 고향을 떠난 이들은 거의 빈털터리인 경우가 많았다.
가족 단위로 이주한 경우 특히.
때문에 대부분의 국왕 직할지의 경우 빈민이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빈민들을 싸게 고용할 수 있어, 기존 도시민들의 경우에는 적은 값에 사람을 고용하여 쓰게 됨으로서 더욱더 부유해질 수 있었다.
때문에 고향을 떠난 걸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 이미 떠난 곳이라 다시 돌아갔다간 전보다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다들 죽지 못해 버티며 살았다.
“나리, 한 푼만 주세요. 동생이 굶고 있어요.”
주요 거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거리엔 동냥을 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했으며.
“잡아! 소매치기다!”
크고 작은 범죄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국왕 직할지를 방문한 여행객인 경우 물건 관리에 소홀했다간 하루아침에 피해자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범죄는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쿠, 헤나! 내 딸이 마차에 치였어요!”
“으아아아앙.”
어린아이를 이용한 자해공갈범도 존재한다.
특히, 호위가 붙지 않은 마차의 경우 그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리고 그 조건에 맞는 어스의 마차가 놈들의 표적이 되었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호위인 디콘 두 명을 신전에 보낸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무슨 일이죠?”
“아,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만.”
마차가 급하게 정지하면서 자연히 안에 타고 있던 어스의 몸이 앞으로 쏠리고 말았다.
고급 마차였기에 여기서 끝났지 일반적인 마차였다면 큰 낭패를 봐야 했을 것이다.
‘어째 빨리 달린다 싶더니.’
지금까지 이런 실수가 없던 마부임을 감안하면 화장실이 급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법 로브가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어 그의 복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작고 가냘픈 체구의 소년이 마차에서 내리자 사고 현장에 모인 행인들의 시선이 자연 그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어스는 세상물정 모르는 선량한 도련님으로 보였다.
다친 아이를 끌어안고 우는 여인의 눈에도.
‘제대로 낚았구나!’
반짝반짝.
여자의 눈엔 어스가 걸어 다니는 돈주머니로 보였다.
여자는 연기에 박차를 가했다.
“오! 내 딸의 다리가 부러졌어요! 이를 어째, 이를. 흑흑.”
행인들이 그녀의 연기에 동조했다.
실상은 행인들 틈에 섞인 여자의 동료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중심리란 브레이크 없는 마차다 일단 달리면 멈추지 않는다.
마부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어떤 이는 욕설까지 했다.
이에 주눅이 든 마부는 쩔쩔매며 어스의 표정만 살폈다.
보통의 마부라면 결코 저처럼 어리숙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어스의 마차를 모는 마부는 신전 소속으로 이와 같은 경험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의 마크가 새겨진 마차를 건드릴 배짱을 가진 범죄자는 없었으니까.
참고로 마차의 소유주가 바뀌며 신전 마크는 제거된 상태였다.
이런 경우는 어스도 처음이었기에 마부만큼은 아니었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다친 사람이 어린아이였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죄, 죄송합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제가 아이의 치료비를 내겠습니다.”
“됐어요.”
아이 어미의 말처럼 아이의 다리는 부러진 상태였다.
나뭇가지처럼 얇아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부서질 것 같은 다리가 마차와 부딪쳤으니 부러진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으스러진 것보단.
‘밥도 안 먹였나?’
아이와 어미의 옷차림을 보니 형편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스는 가장 가까이 있는 행인을 불렀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치료소가 어딘가요?”
뼈가 부러진 이상 접골이 먼저다.
치료 포션은 그다음이다.
경험 많은 용병들의 경우 접골을 할 수 있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어스는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기에 치료소부터 가야 했다.
하필 어스가 지목한 행인은 자해공갈단의 일원이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요. 예예.”
때마침 아이가 아프다며 더 크게 울었다.
그 어미도 통곡하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어 일단 아이와 어미를 마차에 태웠다.
아니, 태우려는 순간.
“어스?”
행인들을 헤치고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몸 곳곳에 흉터로 뒤덮인 거구의 사내였다.
“프랭크 씨?”
“이야, 기억하네. 긴가민가했는데 때깔이 달라져서 순간 긴가민가했는데. 하하. 반갑다. 헥터도 아니고 솔론에서 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너랑 다른 녀석들은 다들 잘 지내지?”
프랭크는 어스의 고향 피어스 남작영지 외곽 오크 부락을 공격할 때 잠깐 손잡은 용병대의 대장이었다.
“아, 네.”
“그런데 저 마찬 뭐야? 엄청 비싸 보이네.”
지금의 상황을 보고도 이에 전혀 개의치 않는 프랭크의 태도에 어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프랭크는 그런 어스를 일별한 뒤 돌아서선 가난한 피해자들 곁으로 갔다.
이에 어스는 깜짝 놀랐다.
모녀를 쫓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차를 몬 당사자는 아니지만 마차의 소유주는 자신이다.
도의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냉혈한이네, 냉혈한이었어.’
단단히 화가 난 어스는 프랭크를 향해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단 프랭크가 더 빨랐다.
“거너 이 자식은 물러 터져서 문제라니까. 이러니 동료들까지 이딴 저열한 수법에 당하지. 어스, 이 자식들 자행공갈단이야. 꼬맹이 골절은 마차에 부딪쳐 된 게 아냐.”
“무, 무슨 소리예요?”
“꼬맹이 골절상을 봐봐. 저건 힘으로 부러뜨린 거야. 이런 식을 잡아서 이렇게.”
프랭크의 등장에 내심 불안했던 여자는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자신의 목숨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것처럼 아이를 감싸던 어미의 모습은 더 이상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제야 프랭크의 모든 행동을 이해한 어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속아서 화났고, 이용한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여자도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매직 애로우.’
단숨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매직 애로우는 여자의 다리를 관통하고도 힘이 남아 지면에 푹 박혔다.
일반적인 매직 애로우론 불가능한 위력이다.
“악-!”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 순간 행인들 틈에 숨어서 군중심리를 자극하던 패거리가 눈치를 보며 뒤로 빠졌다.
하지만 프랭크가 몸을 날려 놈들을 모두 잡아채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패대기쳐진 놈들의 사지중 하나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부러진 상태였다.
“으악!”
“악. 내, 내 다리. 크흑.”
“컥!”
프랭크는 사나운 얼굴을 무기로 협박했다.
“주둥아리 다물어라, 뒤지고 싶지 않으면.”
고통을 호소하던 놈들의 비명은 사라졌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얕은 신음만 흘러나왔다.
그에 프랭크는 씩 웃으며 어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들 모두 한 패거리야.”
“그, 그걸 어떻게 알았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남의 일에 나서는 놈들이 흔한 줄 알아? 한 놈은 그럴 수 있다 쳐. 세상은 넓고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설치는 돌아이가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놈들이 한 자리에, 그곳도 세씩이나 동일한 행동을 한다? 그건 누가 봐도 나 저 여자와 한패라는 말이잖아. 어스 넌 거너에게 더 배워야겠다.”
이는 밑바닥을 제대로 굴러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안목이었다.
그렇다고 밑바닥을 구르며 배우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완전무결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