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사방이 탁 트인 농장 길을 따라 쭉 달렸다.
20분가량 달리자 일꾼이 말하던 저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달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저택의 위용은 영주관을 보는 듯했다.
‘저택만 해도 800만 테스 가치는 하겠어.’
농장에 딸린 집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멋진 저택과 큰 농장을 선뜻 내준 프라이스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아니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프라이스에게 제일 먼저 문자를 넣기로 했다.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자 저택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그중 한 여인이 앞으로 나와서 상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여인은 왕도에서도 찾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고결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든 걸 다 갖춘 그런 미녀였다.
뾰족하게 위로 솟은 큰 귀를 빼면.
여자의 외모에 처음엔 크게 당황했던 디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했다.
“이 농장의 주인께서 오셨다. 농장 관리인은 어디 있느냐?”
마차가 멈추는 순간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딛은 어스는 디콘의 행동에 눈살을 모았다.
일꾼에게도 그러더니 또.
어스의 표정을 살핀 디콘 중 하나가 냉큼 앞으로 달려가선 예의 그 디콘을 제지했다.
“왜?”
“이곳은 어스 경의 땅이고, 저들은 어스 경의 고용인들이다. 그들을 모독하는 건 어스 경을 모독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어.”
“무슨 소리야? 저들은 더러운 혼혈이라고 일반적인 고용…….”
“이봐.”
더는 들어줄 수 없었기에 어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고개를 돌린 예의 그 디콘이 냉큼 하마했다.
“부르셨습니까? 어스 경.”
“내 집에서 왜 큰소리지? 누가 보면 당신이 여기 주인인 줄 알 것 아냐? 혹시, 내 재산을 탐내는 건 아니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룬께 맹세코 어스 경의 재산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아무튼 앞으로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 듣는 주인 기분 나쁘니깐 말이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디콘을 스친 어스는 긴장한 신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신비로운 백금발의 미녀에게로 걸어갔다.
멀리서 볼 때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서 보니 순간 숨 쉬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아름다움이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이날 어스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루리아의 기척에 그제야 어스는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농장과 저택의 새로운 주인이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새로운 주인이라니요?”
“프라이스 형이 말해주지 않았나?”
“프, 프라이스 주인님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여자는 어스의 입에서 프라이스의 이름이 거론되자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여자는 어스의 머리 뒤에 서 있는 디콘들을 보며 눈동자처럼 몸을 떨었다.
교단과 연관된 사람이 농장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은 여자에게나, 이 농장에 기대어 살아가는 혼혈인들에겐 악몽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미리미리 말해 줘야 고용인들이 놀라지 않는 건데. 그 형도 참. 여기 농장 문서야. 참, 글은 읽을 수 있어?”
“이, 읽을 수 있습니다.”
“잘됐네. 직접 확인해 봐. 괜한 의심 받긴 싫으니까.”
여자는 어스가 건넨 문서를 확인한 뒤 우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확인하였습니다. 농장 관리인 시에라입니다. 새, 새로운 주인님을 뵙습니다.”
시에라가 인정하자 뒤에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들이 우울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자유분방한 성격에다 혼혈에 대한 차별도 없는 전주인 덕분에 일은 고되어도 마음만은 편했다.
그런데 갑자기 디콘의 경호를 받고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으니 고용인들 입장에선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평범한 인간이면 고용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일을 그만두고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혼혈의 경우엔 거주지 이전에 제한이 있어 쉽지 않았다.
물론 원천적으로 금지된 건 아니다.
해당 거주지가 속한 관청과 신전의 승인을 받을 경우엔 거주지를 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승인도 어렵고, 설사 승인을 받아서 합법적으로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쉬이 정착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혼혈들은 지주에게 수탈당해도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며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농장 관리인이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이에게 관리인을 맡기셔도 됩니다. 다만…… 어떤 일이든 좋으니 부디 이 농장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 지역 혼혈들에게 있어 프라이스의 농장, 아니 어스의 농장은 가장 좋은 직장이었다.
물론 다른 일도 알아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있지만 그건 보통의 인간들과 부딪치는 일이라 몹시 힘들었다.
몸과 마음 모두.
반면 농장일은 보통의 인간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상인이 전부였으니까.
상인도 물론 보통의 인간이지만 농장의 소유주가 귀족이다 보니 고용인들에게 함부로 굴지 않았다.
고용인들에게 함부로 하는 건 그들을 고용한 귀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시에라는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주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관리직이 별로야?”
“예?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면 계속 해줬으면 해.”
자신이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먹고살 것도 아니고, 이 농장에 눌러앉을 것도 아니다 보니 적자만 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운영해도 상관없었다.
한땐 농장을 팔아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돈이 궁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곳은 별장으로 남겨 두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저택도 멋지고, 경치도 좋잖아.’
더해, 신기한 사람들도 많고.
“저, 정말이십니까?”
“응, 먼 길을 왔더니 피곤한데 음식과 잠자리를 부탁해. 농장에 관한 일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고.”
시에라가 관리인으로 계속 남게 되자 고용인들은 흡사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어스는 그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그런데 성함이?”
“어스, 어스 테리우스 백작이야. 앞으론 주인님 말고 백작님이라고 불러줬음 좋겠어.”
* * *
어스 농장에 아침이 밝았다.
저택에서 가장 높은 층을 사용한 어스는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압도당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평선까지 쭉 펼쳐진 평야와 사이사이 흐르는 크고 작은 개울은 농사에 문외한인 어스가 보기에도 완벽해 보였다.
곧장 몸을 돌린 어스는 반대편 창가로 향했다.
방이 어찌나 넓은지 몇 분은 걸은 것 같았다.
반대편에 도착한 어스는 울창한 숲과 그 숲 끝에 우뚝 서 있는 높다란 산을 볼 수 있었다.
저 숲도 자신의 소유일까?
‘프라이스 형이 큰소리 칠 만했네, 했어.’
이제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낸 어스는 프라이스에게 감사의 문자를 넣은 뒤 복도로 나왔다.
그의 방이 된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루리아가 묵고 있었다.
똑똑.
“루리아 누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문을 밀자 스르르 열렸다.
“어디 간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복도로 나온 어스는 마침 하녀를 볼 수 있었다.
정수리 양옆으로 털 달린 귀를 가진 수인족 혼혈이었다.
나이는 꽤 들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백작님.”
“어? 응. 그래, 잘 잤어.”
타인에게 백작이라 불린 건 20번도 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아직은 익숙지 않은 칭호였다.
“이 방에 묵은 손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 어. 흠흠.”
어제는 디콘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시에라에게 말을 놓았지만 막상 지켜보는 눈들이 없자 말을 놓는 게 어색했다.
“뒤뜰에 계십니다.”
“뒤뜰?”
“예, 안내해드릴까요? 백작님.”
“괜찮아. 그런데 이렇게 일찍 일하는 거야?”
“여덟 신데요? 죄, 죄송합니다. 보통 6시부터 일합니다. 부족하면 더 일찍 일어나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닌데. 흠. 하던 대로 하면 돼.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돼?”
처음부터 하대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하대로 시작하였기에 그냥 쭉 이렇게 가기로 했다.
지금 와서 말투를 바꾸기도 그렇고, 명색이 백작인데 이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티나입니다. 백작님.”
“티나? 이름 좋네.”
“가, 감사합니다.”
“관리인은?”
“부를까요?”
루리아가 뒤뜰에 간 건 보나마나 수련 때문일 테니 가봐야 방해, 그러니 관리인과 농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줘. 그리고 아침은 언제 먹어?”
“주방에 일러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예?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고맙다고. 왜?”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식사가 준비되면 보고하겠습니다.”
‘뭐가 고맙단 거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도 아니었기에 다시 방으로 향했다.
얼마 후, 농장 관리인 시에라가 왔다.
‘또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시에라의 미모는 적응할 수 없었다.
혼혈도 저런데 순수 엘프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도 어려웠다.
“좋은 아침.”
“편히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그쪽에 앉아…….”
“감사합니다.”
“다른 건 아니고. 음, 농장 운영은 어떻게 해왔는지 궁금해서…… 해서.”
척 봐도 한참 연장자인 티나에겐 잘 나오던 하대가 어째서 그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시에라에겐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며 내심 한숨 쉬는 어스였다.
“이전 주인께선…….”
프라이스가 농장을 운영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농장 수익의 2할을 제외한 나머지 8할은 시에라에게 모두 맡겨버렸단다.
‘소작방식인가?’
솔직히 소작료로 2할이면 대륙 어디를 뒤져봐도 터무니없을 만큼 낮은 가격이다.
하지만 이를 책정한 사람이 프라이스임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농장이나 저택 상태를 보면 관리는 잘 한 것 같아.’
농장에서 얻는 수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에 어스는 프라이스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처럼 깔끔하게만 관리해 준다면야.
“그렇군. 기존대로 해.”
“예?”
“기존대로 하라고. 참,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몇이야?”
“저를 포함해서 백오십칠 명입니다.”
“그들 모두 혼혈?”
“예.”
“생각보다 고용인 숫자가 많네.”
어스의 말을 지적이라 생각한 시에라는 움찔했다.
새 주인의 입에서 정리해고란 말이 나올까 봐.
“…….”
“아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그건 관리인이 알아서 해. 그러라고 있는 게 관리인이잖아? 그렇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관리에 어려움은 없어? 누가 못살게 한다거나, 몬스터나 이런 것들로 골치가 아프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있으면 말해. 떠나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해 줄게.”
시에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불었다.
전 주인과 새 주인 모두 흔히 볼 수 없는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혼혈에 대한 차별도 없고.
‘위대한 어머니시여, 감사합니다.’
시에라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교단이 알면 당장 잡혀갈 일이지만.
“그럼 농장 주인이 백작님인 걸 알려도 될까요?”
“알려?”
“실은 이 농장을 욕심내는 사람이 있어서요. 농장의 주인이 고위 귀족인 걸 알면 두 번 다신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요.”
“내 농장을 욕심낸다는 그자, 농장에 와서 행패라도 부린 거야?”
시에라는 입을 다물었다.
혼혈이 인간을 험담하는 건 그게 어떤 이유에서건 정당화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무슨 의민지 알겠네. 그래, 그놈 누구야?”
사회적인 영향력, 신분, 인맥, 무력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그에게 있어 지방 귀족쯤은 디콘 하나만 보내 경고만 날려줘도 알아서 엎드릴 것이다.
굳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그런데.
“프린트 시에 계시는 헤럴드 주교세요.”
“주교라……. 아무래도 직접 방문해야 할 것 같네. 알았어.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 점은 내게 맡겨두고 관리에나 힘써 줘. 그 외 다른 건 없어?”
상대가 주교라는 고위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난감해하지 않는 어스의 태도에 시에라는 적잖이 놀랐다.
교단을 등에 업고 있는 고위 성직자를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주교라는 신분이었기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농장을 주교에게 넘기면 어쩌나 싶어서.
“정말 괜, 괜찮으세요? 상대는 주교인데?”
“말했잖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시에라에게 있어 이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아니, 자신을 비롯한 혼혈들의 미래가 달린 것이라 이는 생사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다.
솔론의 웬만한 귀족들도 하기 힘든 일인데.
‘백작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지?’
작고 가냘픈 체구에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선한 인상의 인간 소년에 대한 시에라의 호기심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