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목표를 달성한 원정대는 던전을 나가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던전 원정을 수차례 경험한 이들도 원정대에 적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6띠 던전은 처음인데다, 모래언덕으로만 구성된 광활한 사막 역시 곤란한 적이라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어스가 그들에게 찾아오면서 원정대가 느꼈던 막막함의 무게는 전에 비해 한 없이 줄어 있었다.
추기경을 확보한 원정대는 밤을 맞이하여 축하파티를 열었다.
원정대 개개인의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하면 파티에서 사용한 음식은 형편없었으나,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선 결코 맛볼 수 없는 풍경이 이를 상쇄했다.
던전에서 가장 끔찍하게 생각했던 환경이 말이다.
밤이 되자 기온은 크게 떨어졌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경험하고 보니 사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토의 땅에 있는 것 같았다.
모닥불의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은 앞서 모두 소모한 원정대는 맨 몸으로 추위를 견뎌야만 했다.
깨어 있을 땐 몸속의 마나를 돌리는 방법으로 추위를 몰아낼 수 있었지만, 잠이 들면 그들도 보통의 사람과 다름 없다보니 불침번을 제외한 이들의 경우에는 마법사들이 교대로 체온 유지 마법을 걸어주었다.
체온 유지 마법의 경우에는 최장 4시간이다.
어스처럼 체온에 영향을 주는 마법 물품을 가진 자들의 경우에는 그냥 잠들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온몸을 감싼 것이 아니다 보니 꿀잠은 저세상 이야기였다.
‘체온 유지 마법이라니.’
배워두면 쓸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스는 이를 배울 수 없었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세상의 마법은 서클을 구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아쉽게도 그것이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대마법사 앞에선 자신의 비밀이 걸릴까 봐 말과 행동을 자제했다.
같이 있는 자리는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이에 플린트는 섭섭함을 드러냈지만 사회적인 지위와 개인적으론 체면 때문에 막무가내로 들이대진 않았다.
반면 다른 마법사들은 성가시게 굴었다.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그 모든 난관을 물리친 어스는 그제야 카멜, 하커, 호커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고생했다.”
“엄청 고생했네요.”
“맞는 말이라 핀잔도 못 주겠네. 참, 포션은 부족하지 않아?”
“충분해요. 그런데 그건 왜?”
“혹시 몰라서 포션을 챙겨왔거든.”
이리 말하며 공간 주머니를 슥 내미는 카멜이었다.
‘헐, 이게 몇 개야.’
공간 주머니는 총 5개였다.
용량은 5개 모두 20킬로그램으로 던전이 출현하기 이전, 그러니까 가격이 오르기 이전의 정가는 100만 테스다.
그게 5개다.
누가 왕자 아니랄까 봐 손 큰 거 봐라.
이러니 다들 가진 자의 뒤에 줄을 서려는 게 아닐까 싶다.
“각인은 풀어뒀으니까 알아서 하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오늘도 그렇지만 내일도 고생문이잖아.”
“어쩔 수 있나요? 내 업보다 생각해야죠.”
어스의 말에 하커, 호커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모험가 파티로 활동하던 때였다면 참지 않고 박장대소했으리라 저들의 표정을 보니.
‘내 말이 그리 웃긴가?’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이 떠올라서 해본 소린데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이었다니.
이후 네 사람은 추억을 안주 삼아 좀더 시간을 가진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을 위해.
* * *
다음 날, 과연 카멜의 말처럼 고생문이 열렸다.
사막은 끝이 없었다.
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음에도 그 끝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기존의 던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이게 말이 돼?’
어이가 탈탈 털렸지만 내친걸음이라 멈추지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렇게 오기를 원동력 삼아서 블링크를 사용하며 쭉쭉 나아갔더니 웬걸.
“어스 경? 찾았나?”
그 끝에 도착한 곳은 바로 출발했던 숙였지였다.
‘미친, 이게 말이 돼?’
출입구가 동일한 미로에 갇힌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한 끼도 안 먹었지만 부른 배.
떨어지는 땀방울에선 딸기향이 나는 것 같다.
이러다 새로운 이명이 생겨날 것 같다.
딸기향 마법사로.
기대감을 드러내며 묻는 슈리에 후작을 향해 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뒤이어 등장한 플린트 대마법사, 카멜 왕자, 에스터 추기경과 그녀의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리더만 단장 모두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어스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말했다.
“던전의 형태가 구첸가 보군.”
플린트가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말일세.”
플린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말뿐만이 아니라 그림까지 그려서 그의 이해를 도왔다.
설명만 들었을 땐 모호했던 것이 그림을 보자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가나 결국 숙영지란 소리네요?”
“그렇지.”
어스와 달리 다른 이들은 설명만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미 생각에 빠진 상태였다.
카멜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수개월을 여기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구조라면.”
“그렇지요.”
플린트의 말에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침음이 절로 나오는 카멜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하지만 어스의 심정에 비할 바 아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카멜 왕자 말처럼 되어 버렸잖아.’
카멜 왕자를 탓할 수도 없고 참 뭐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식이면 곤란하겠군요. 그럼, 몬스터의 뒤를 쫓는 건 어떻겠습니까?”
카멜의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허공에 삽질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비하면.
“오늘 몬스터 왔습니까?”
그러면 몬스터를 봐야 하는데, 어스는 하루 종일 놈들을 보지 못했다.
그건 숙영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늘 하루뿐이니 다들 걱정하지 않았다.
던전에 몬스터가 없을 리 만무하니까.
* * *
몬스터를 기다린 지 나흘, 드디어 녀석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를 앞세우고.
‘대박!’
‘룬이시여! 당신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이젠 집에 갈 수 있겠구나!’
기다림의 시간이 흡사 수년은 된 것 같았기에 수적으로 분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낙담하는 대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나선 인물은 7서클 대마법사 플린트였다.
보스의 외양은 일반적인 파빌사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놈이 보스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파빌사그의 특징인 꼬리를 무려 아홉 개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부하들을 남겨두고 홀로 숙영지를 향해 걸어왔다.
놈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질수록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대단히 강맹했다.
기세에 예민한 기사들은 벌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두려움이 아닌 투지였다.
반면 마법사들은 몸을 떠는 추태를 보였다.
“내가 놈을 상대하겠소.”
먼저 슈리에 율리아스 후작이 나섰다.
보스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일대일 대결을 원하고 있었다.
이는 머리수에서, 그리고 지형지물의 곤란한 점으로 인해 제대로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원정대 입장에선 마다할 수 없는 호재였다.
슈리에 후작도 이를 알기에 나선 것이다.
개인의 승부욕 차원이 아닌 냉정한 결단이었다.
‘전력을 다하는 소드 마스터를 보게 되다니.’
이 순간만큼은 기여도나 막타에 대한 생각이 어스의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에스터 추기경이 그에게 축복을 내렸다.
땀까지 뻘뻘 흘리는 것으로 보아 신성력을 바닥까지 긁어내는 게 아닌가 싶었다.
플린트 역시 전투에 도움이 되는 마법을 부여했다.
“두 분께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후작은 결연한 표정으로 놈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소드 마스터와 던전 보스의 일대일 대결이 펼쳐졌다.
후작은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하기로 작정한 듯 소드 마스터의 상징인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든 슈리에 후작의 움직임은 흡사 번개를 방불케 했다.
사람들에게 있어 최악의 조건인 모래언덕도 지금의 슈리에 후작에겐 조금의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눈이 절로 커지고, 숨은 절로 쉴 수 없었다.
둘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건 잔상뿐이었다.
격돌음이 간간이 들렸지만 그땐 잔상이 서로 떨어진 뒤였다.
소리보다 빠른 움직임이라니.
‘지, 진짜 번개처럼 움직이네.’
소드 마스터가 왜 무서운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모든 걸 압도해 버리는 속도, 바로 저 속도 하나만 해도 그들을 1인 군단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슈리에 후작도 무섭고, 보스도 무서워졌다.
어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생각이 많아졌다.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뱅글뱅글.
끝나지 않는 생각의 고리는 외부의 소음으로 인해 부서져 나갔다.
“자, 잡았다! 후작님이 잡았어!”
“와아아아.”
승부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남짓에 불과했다.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긴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나, 역사가 바뀌는 건 찰나라고 한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페어몬트였나?
아무튼 눈앞에 펼쳐진 후작의 승리는 어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니, 충격을 안겼다.
* * *
에스터 추기경을 삼키며 등장한 던전으로 인해 침울했던 솔론 왕국 왕도의 분위기는 원정대가 무사히 돌아오면서 단숨에 축제의 장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빈민가에 옷과 음식이 전해져 그들의 배를 채우고,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생활형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왕명으로 모두 방면됐다.
음유시인들이 원정대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으며, 술집과 음식점은 술과 음식을 반값에 팔았다.
교단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사제들이 제 발로 거리로 나와 아픈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무상으로 그들을 치료했다.
돈이 없어 죽어가는 자들이 새 생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흘리는 감사의 눈물은 기름이 되어 축제를 더욱더 살찌웠다.
그리고 원정대 개개인에겐 큰 포상이 내려졌다.
부유한 솔론 왕국에서, 그보다 더 부유한 교단에서 아낌없는 포상을 내려 원정에 참가한 대원들의 입을 하나같이 뜨악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번 원정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어스는 그보다 더 뜨악한 보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어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매일같이 꾸는 꿈 때문이었다.
그의 꿈에서 어스는 슈리에 후작과 생사투를 펼쳤다.
매번 슈리에 후작에게 패배했다.
가진 패 모두를 다 사용했음에도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생생한 꿈이라 현실의 생각이 반영된 듯 한날은 생사투를 피해 달아났다.
꿈에서도 블링크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가족, 연인, 지인들이 그의 빈자리를 채웠고 슈리에 후작의 검은 그들을 잔인하게 유린했다.
그가 꾼 악몽 중 이 악몽이 가장 끔찍했고, 이 꿈을 꾼 다음 날 솔론의 국왕이 개최하는 만찬장에서 만난 슈리에 후작을 공격할 뻔했다.
꿈에서의 일인데도.
이후 어스는 의도적으로 슈리에 후작이 참석하는 자리는 피했다.
다행히 슈리에 후작에겐 영지가 있어 그는 곧 내려갔다.
자신의 영지로 놀러오라는 끔찍한(?) 말을 남기고서.
이후 슈리에가 나오는 꿈은 꾸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라곤 하지만 매번 몸이 조각조각 잘려 죽는 건 끔찍했으니까.
그런데 슈리에가 자신의 영지로 떠나자 이번엔 플린트 대마법사가 슈리에 후작을 대신했다.
어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꿈이 릴레이 경주도 아니고…….’
플린트에게도 발렸다.
이겼다면 악몽이 아니라 좋은 꿈이었을 텐데.
슈리에 후작과 달리 플린트는 무슨 이유인지 왕도에 남았다.
안 보고 지내면 좋겠지만 그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어스가 묵고 있는 사택으로 번질나게 찾아왔다.
어스로선 죽을 맛이었다.
자신과 가족, 연인, 지인들 머리위로 마법을 난사하던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한데 웃는 낯으로 대하려니 어스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잠도 못 자, 음식은 뭘 먹어도 맛이 없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어스는 에스터 추기경을 찾아가서 작별을 고했다.
에스터 추기경 휘하 성기사단의 일원이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기에 문제의 소지는 없었다.
몇 차례 면담 끝에 추기경의 허락을 받은 어스는 루리아와 함께 솔론 왕도를 떠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어떤 분들이셔?”
“좋은 분이에요.”
두 사람의 목적지는 어스의 집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편해지는 안식처였다.
그렇게 쫓기듯 솔론 왕도를 떠나 헥터 왕국으로 이동하는 어스, 그런 그를 멀리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어째서? 대체…… 그의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