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서커스 공연 중에 발생한 대규모 습격사건으로 인해 국경도시 헥시움이 발칵 뒤집어졌다.
레오다니스 왕국과 접한 국경에 비할 수 없지만 상당한 숫자의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번 사건으로 인해 움직였다.
도시 치안대는 당연했고.
아무튼 그날의 사건으로 인해 어스 일행은 국경도시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아니,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시를 빠져나간 암살자들이 앙심을 품고 공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 죽였어야 했는데.’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익스퍼트를 부리는 조직을 제대로 건드린 이상 앞으론 두 발 뻗고 자긴 글렀지 싶었다.
놈들의 경고를 듣고 얌전히 있을 걸 그랬나?
상황이 종료되고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자 꺼림칙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똑똑.
“예.”
여관에 머물렀던 일행은 안전을 위해 거처를 신전으로 옮겼다.
정확하게는 신전 소유의 저택이다.
저택 내부와 주변은 이곳 신전 소속의 디콘과 경호를 위해 함께 움직였던 디콘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부족한 전력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참고로 이 저택은 에스터 추기경 덕분에 전택 전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나야.”
“들어오세요.”
어스는 루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고마워.”
“무슨. 치안대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익스퍼트인 암살자를 일반 병사가 잡는 건 무리긴 하죠.”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닌 국경 수비대가 움직였으니까.
하지만 며칠이 흐른 지금은 그 기대를 내려놓았다.
루리아는 입을 가볍게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터 추기경님께서 경호대를 보내주신다고 하니 그들과 함께하면 솔론 왕도까진 무사히 갈 수 있을 거야.”
도망치던 암살자들이 자신을 향해 던진 분노의 눈빛이 아직도 어스의 뇌리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인생 최대의 적을 만들어 버린 느낌이랄까?
찝찝함과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기에.
“거기까지겠죠?”
“겁나?”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정면대결이면 모를까 놈들은 암살자잖아요. 거기다 익스퍼트고.”
루리아 앞이라 큰소리 치고 싶었지만 이미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아는지라 허세조차 부릴 수 없었다.
“에스터 추기경님께서도 이번 사태를 교단 차원에서 조사하겠노라 하셨잖아? 그러니 놈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교단이 작정하고 움직이기로 한 이상 제 아무리 은밀하고 강한 조직일지라도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역시, 그렇겠죠?”
“응.”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
“놈들의 손에 죽은 남자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요.”
암살자를 가리켜 더러운 룬의 사냥개라고 했다.
그 말은 진술할 때도 할 수 없었다.
입에 담아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듯 이 말은 결코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이기에.
이는 비단 어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이 말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 말을 암살자들이 했다면 모르겠지만 관객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넌 그 말을 믿어?”
교단이 이단으로 지목하면 상대가 누구건 나락이다.
거기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포함된다.
이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곳이 교단이다.
한마디로 암살 조직을 운영하는 불명예스러운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뇨, 그래서 더 이상하단 거예요.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잖아요.”
“그 말은 잊는 게 좋아.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가면 문제가 될 수 있어. 제 아무리 성기사라도 말이야.”
“알죠, 충분히. 참 그 꼬맹이는 어떻게 됐어요?”
“친척이 데려갔다고 들었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참, 서커스단은 어떻게 됐어요?”
“알아볼까?”
“아뇨, 아니에요.”
당시엔 긴가민가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하자 아군의 정체가 서커스단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일개 서커스단이 어찌 익스퍼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만한 전력이라면 서커스단이 아니라 용병단을 차리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다.
돈이 목적이라면.
“에스터 추기경님께서 보낸 사람들이 올 동안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아. 그건 너도 알지?”
알지, 아니까 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연장을 피바다로 만든 놈들인데 하물며 길거리 따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누나도 절대 혼자 나가지 말아요.”
“난 상관없을 것 같은데.”
놈들은 딱 자신만 노려보고 갔다.
실제 놈들에게 피해를 입힌 건 자신 하나다.
루리아가 아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알았어. 난 수련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뇨, 전 쉴래요.”
지금부터 밤낮없이 창술을 수련하더라도 놈들 중 하나도 이길 수 없다.
당장 눈앞에 있는 루리아조차.
그러니 놈들을 확실히 압살해 버릴 수 있는 자신만의 수단을 더욱더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당장은.
‘던전이 답인데, 상황이 이러니. 하아.’
짧으면 하루, 길면 십 수 일이 걸리는 일정이다 보니 답답해도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이 벌써 며칠, 체감은 몇 달을 갇혀 지낸 기분이다.
‘오늘 밤엔 집에 다녀와야겠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조각이 진품인지 아닌지 확인도 해야 한다.
‘절반, 딱 절반만이라도 진품이면 좋겠는데.’
이틀 전 거너와 연락하니 7개가 더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총 9개로 늘어난 상황이다.
현상금 1만 테스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5/100).
‘이 녀석만 활성화하면 그놈들도 후려 팰 수 있을 텐데.’
* * *
위그드라실 서커스단은 오래전부터 성전단의 감시 대상이었다.
감시의 이유가 된 배경은 그들이 이종족 노예를 조직적으로 탈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교단의 뜻에 반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매매를 통해 노예를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양지에선 징벌할 명분이 없었다.
제 아무리 교단이라곤 하지만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힘을 사용하는 건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었기에 그 일을 성전단이 맡게 되었다.
임무를 받은 성전단 7대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나 얼마 안 있어 위그드라실 서커스단의 배후를 알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대륙 곳곳에 신분을 감춘 이종족 해방론자들이 위그드라실 서커스단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종족 해방론자들의 정체를 모두 파악할 수 없었기에 성전단은 일망타진의 목표를 세우고 기회를 엿보았다.
수년 동안.
그렇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이종족 해방론자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회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VVIP관객으로 모인다는 걸.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해방론자들을 일망타진할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성전단은 문제의 소지가 될 것을 감수하고 과격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작전이 실패한 것도 부족해, 다수의 사상자까지 발생시키고 말았다.
성전단이 창설된 이례 손에 꼽을 정도의 피해임과 동시에 치욕적인 날이었다.
“놈들은?”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는 터라 종적을 놓쳤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일망타진했어야 했는데. 하아. 그놈만 아니었어도.”
거스티의 눈앞에 뺀질뺀질하게 생긴 어린 성기사가 웃고 있었다.
그 어린 성기사는 어스였다.
이종족 해방론자를 돕는 성기사라니.
물론 알고 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건 성기사의 본분을 망각한 반역행위니까.
이를 감안하였기에 어스에 대한 보복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수하를 잃은 입장이라 그에 대한 감정은 좋을 수 없지만, 그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기사로서의 본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였으니까.
상관의 표정을 살핀 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스 성기사를 생각하십니까?”
“분하냐?”
“어스 성기사로 인해 형제들이 순교하였으니 분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미우냐?”
“밉지만 한편으론 대견하기도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단의 위상이 한층 올라갔으니까요.”
국경 도시 헥시움에선 어린 성기사의 활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암살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그 덕에 교단까지 시민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있었다.
“그래, 그리 생각하자. 어차피 나와 너, 그리고 순교한 형제들 역시 교단의 거름이 되기로 맹세했잖아.”
“예.”
“참, 헤롯 추기경님께 청하여 인력 지원을 받을 테니 인력 부족도 곧 해소될 거야. 그러니 고생이 되더라도 그때까지 참아다오.”
수하를 내보낸 거스티는 오랜만에 동기이자 동지인 루비오에게 연락을 취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가진 마법 통신구는 다른 통신구와 달리 제한이 없이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가벼운 안부에서 시작해 어스에 대해 진지한 질문까지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 * *
어두운 밤,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하여 왕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루리아에게도 외출을 알리지 않았기에 조금의 여유도 부리지 않았다.
그렇게 왕도에 도착한 어스는 거너를 만났다.
“거의 구색이 갖춰졌네요.”
가게를 오픈한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빈 진열대가 보였지만 얼마 안 있어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말이 안 나오네. 진짜 헥시움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천재가 달리 천잰가요. 이 정도는 해야죠.”
“잘난 척하긴.”
“다른 사람들은 없어요?”
“벌써 퇴근했지. 시간이 몇 신데.”
“10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이라니.”
“악덕고용주가 따로 없네, 없어.”
“집에 가봐야 먹고 뒹굴기밖에 더해요.”
어스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거너는 할 말을 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참, 물건은 어디 있어요?”
“잠시만.”
거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창가로 이동한 어스는 지나가는 잘 차려입은 행인들과 바삐 움직이는 마차를 구경했다.
시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다.
“거기서 뭐 해?”
거너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순간 가슴의 문신이 찌릿했다.
‘조각이다!’
그런데 호두알만 한 조각 9개를 담기엔 너무 큰 상자 아닌가?
“그 상자는 뭐예요?”
“공방에서 생산한 첫 포션이다.”
“에? 벌써 만들었어요?”
“조쉬 씨의 열의가 대단하더라고, 손도 빠르고.”
안 그래도 마나 회복 포션을 더 구입할 생각이었던 어스는 반가운 마음으로 이를 인벤토리에 쓸어 담은 뒤 작은 상자를 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스가 가져온 조각 모두 진품이었다.
9만 테스라는 거금이 나갔지만, 뭐 예전이야 거금이지 사실 지금은 푼돈처럼 여겨졌다.
‘흡수.’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14/100). 승리의 노래(4/12).
위그드라실 조각은 한 자리 숫자에서 단숨에 두 자리 숫자로 바뀌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지금처럼 조각을 모을 수 있다면 어쩜 올해 안으로 창호를 활성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리된다면 마법이 아니라 창 하나로 몬스터든 암살자든 다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해 볼품없는 키와 그 키에 걸맞은 가냘픈 몸매도 갑옷처럼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이지 않을까?
백 년을 단련해도 칭호 하나 활성화하는 것보다 못하리라.
“어스.”
“예.”
“그런데 대체 그게 뭔데 현상금을 무식하게 건 거야? 천 테스, 아니 오백 테스만 걸어도 될 것 같은데.”
“귀한 거니까요.”
“영약이라도 돼?”
“영약?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기분은 좋아 보이네. 오랜만에 봤는데 한잔 어때?”
“가 봐야 해요. 내가 나온 걸 아무도 모르거든요.”
“부모님도 안 보고 그냥 갈 생각이야? 많이 섭섭하실 텐데.”
“제가 온 건 비밀이죠. 참, 여기.”
어스가 거액을 내놓자 거너는 깜짝 놀랐다.
“이건 뭐야?”
“대금 지불한다고 돈 떨어졌을 거잖아요.”
“아냐, 아직 많이 남았어.”
“그냥 받아요. 매번 이런 식으로 올 수 없을지 모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조만간 솔론으로 넘어갈 것 같아요.”
거너에게 돈을 건넨 어스는 그길로 국경 도시를 향해 부지런하게 이동했다.
꿀꺽.
‘오!’
포션을 마신 어스의 두 눈이 놀란 토끼마냥 동그랗게 변하였다.
그가 저리 놀란 건 기존의 포션과 달리 조쉬가 제조한 포션에는 그가 좋아하는 맛이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딸기맛이 더해지자 앉은 자리에서 백 병, 아니 천 병이라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