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아깝네. 벤슨 할리 녀석을 탈탈 털어먹을 수 있었을 텐데.’
제 발로 찾아온 돈주머니를 겁주어 보냈다.
고강한 마법사에게조차 기회가 있으면 물어뜯으려는 놈이다.
하나 성기사에겐 감히 비벼볼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뒷골목에서 자주 애용하는,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를 건드리는 거야! 따위의 대사를 교단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의 위세가 무섭긴 무섭지.’
대륙의 모든 왕국과 모든 마탑이 가진 부와 힘보다 교단이 더 강하다.
거기다 귀족에서부터 평민에 이르는 무수히 많은 신도들까지 감안하면 교단이야 말로 대륙의 유일무이한 주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들이 이를 선포하지 않았을 뿐.
“어서 오십시오. 손님.”
왕도에서 중개인 한스는 발이 무척 넓었으며, 일처리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노동의 대가만 확실히 쥐여 주면.
“그림은?”
“여기 있습니다.”
“실력이 대단한 화가네요.”
“마음에 드십니까?”
“이건 잔금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많이 그려서 상인, 용병, 정보 길드에 뿌려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만 1만 테스는 과하지 않을까요?”
“한스 씨.”
“예? 아! 죄송합니다. 현상금이 워낙 많다 보니 그만.”
더 이상 어스는 돈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손쉽게 돈을 벌 방법이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성기사다.
예전처럼 세력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건 한스 씨 수수룝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이 오면 지체하지 말고 연락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어스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겨울 밤거리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대로가 이럴진대 골목길은 말해 무엇하랴.
골목길 좌우를 살핀 어스는 고개를 들었다.
‘블링크.’
* * *
글리시아 영지로 돌아온 어스는 던전 원정에 힘을 기울였다.
주도와 그 주변에선 더 이상 던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외곽으로 이동해야 했다.
던전을 정리하는 시간보다 이동 시간이 차츰 더 걸리게 되었다.
빠른 속도로 3띠 던전을 정리하였다.
이제 5띠 던전 하나만 남았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52).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5/100). 승리의 노래(4/12).
생명력 : 245/245.
마나 : 400/400.
인벤토리 : 1(+4).
스탯 : 힘(2.4). 체력(30). 민첩(2.3). 지력(30). 정신(61).
직업 스킬(9/9) : 매직 애로우(+3/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3/12).
콜 라이트닝(+3/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3/12).
업적 포인트 : 7.
코인 : 15,803.
열 개가 넘는 던전을 처리했음에도 레벨은 고작 하나만 올랐다.
레벨을 올리는데 필요한 경험치가 폭발적인 수준으로 증가한 때문이었다.
‘힘이랑 민첩 스탯 올리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서야.’
최근 힘과 민첩 스탯이 각각 0.1씩 올랐다.
루리아와 꾸준히 수련했음에도 말이다.
코인 수익이 좋다 보니 그간 손도 대지 못했던 스킬 모두 3강까지 올릴 수 있었다.
3강이 되자 블링크의 시전에 필요한 마나는 이전 200에서 15 줄어든 185가 되었다.
블링크 하나만 보면 마나 400을 괜히 맞춘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5서클 스킬을 생각하면 최소 2번 연속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에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남은 건 몽땅 지력이 맞을까?’
사용처를 정하지 못한 7업적 포인트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이틀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어스를 지력 스탯 앞에서 멈칫하게 만든 이유는 체력 스탯 때문이었다.
마나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체력이 너무 빈약해 보였다.
‘아차 실수를 외치는 순간 저승일 텐데.’
5서클 스킬을 강화하지 못했다면 지력 스탯이 더 끌렸겠지만 기본 강화라곤 해도 일단 3강까지 만들자 지력에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이젠 그만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내일 5띠 던전에 들어가야 하기에.
참고로 이번엔 이전과 달리 원정대의 전력이 확충됐다.
3띠와 달리 5띠의 경우 일반 몬스터도 무척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웨이즈를 포함하여 기사의 수는 네 명, 영지군과 용병들을 포함하여 300명을 꾸렸다.
짐꾼은 기존 120명 그대로다.
심사숙고한 끝에 어스는 남은 포인트 모두 체력 스탯에 분배했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생명력 : 280/280.
막상 찍고 나니 허탈감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이를 달래기 위해 어스는 숙영지 한쪽에 마련된 공터로 걸음 했다.
그곳은 선객이 차지하고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선, 수평, 역사선 베기에선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처럼 완벽한 검로였다.
‘머, 멋지다!’
창이 아니라 검으로 전향할까 잠시 생각하다 이내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창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그 어려운 검을 다룬다니 지나가는 개도 비웃을 일이었다.
그의 작은 기척에 선객의 검이 멈추었다.
빙글 돌아선 선객의 말총머리 끝자락이 닿지도 않았는데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다.
두근두근.
“언제 왔어?”
“수련에 방해된 건 아니죠?”
“방해됐어.”
“…….”
“미안해. 진담이었어.”
“보통 농담이라고 하던데.”
“안자고 왜 나왔어?”
“날도 선선하고 달빛도 고와서 그런지 창사의 피가 끓어올라서 그냥 잠들 수 없지 뭐예요.”
“농담?”
진담인데.
“당연히 농담이죠.”
그녀가 검을 휘두르듯 자신도 창을 그처럼 멋들어지게 휘두를 수 있다면 당당히 진담이라고 말하겠지만 실력이 안 되다 보니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얼버무렸다.
마음은 최고의 창술가인데.
“걱정 돼?”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루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겨울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저기, 루리아 누나.”
“응?”
“카멜 형이랑 연락은 자주 해요?”
진작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묻지 않았던 건 상처받는 게 싫어서였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으면 되지만 마음이 아픈 건 뭘 먹어도 잘 낫지 않는다.
‘제발, 아니라고. 아니라고…….’
루리아는 알까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아니.”
“예, 그렇군…… 예? 아니라고요?”
“딱히 할 말도 없고.”
“카멜 형 섭섭하겠다.”
“왜?”
“그...”
저리 물으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넌 내가 그와 연락했으면 좋겠어?”
세상 어느 남자가 마음에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연락하고 시시덕거리는 걸 좋아할까.
그 모습을 상상한 어스는 반발감에 준 고백 수준의 발언을 내지르고 말았다.
“제가 싫다면 안 할 건가요?”
떨린다, 미치도록.
루리아는 대답이 없이 달만 한참 올려다보았다.
이제 대답할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더니 이번엔 별을 본다.
설마, 별이 몇 갠지 일일이 세는 건 아니겠지.
“그럴게.”
“예? 뭐라고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잘 못 들었나 싶어 확인하고자 물었더니,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를 스쳐 지나가 버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건가?
너무 빨리 걸어가 버려 붙잡을 수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잡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잡지 않았다.
왜?
‘분명…… 분명 그럴게라고 했는데.’
가슴이 너무 간질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대답이 어떤 의미일까?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 걸까?
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이 비슷한 장면을 소설에서 본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 *
어스의 신호를 받은 기사 웨이즈가 던전 진입을 알렸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글리시아 원정대의 19번째 원정이 시작됐다.
이번은 앞서와 달리 난이도가 매우 높다.
때문에 원정대 전력을 보강했다.
오스완드 영주가 작정하고 힘을 실어주었기에 인원과 물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레이몬드 사제도 디콘 80명과 함께 원정대에 합류했다.
첫 번째 던전 이후 원정대에 이름만 올릴 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기에 레이몬드 사제의 등장은 의외였다.
현재 알려진 가장 높은 등급의 던전은 띠 일곱 개다.
그 던전은 왕국과 마탑 그리고 교단이 연합을 구성하여 원정대를 꾸린다고 하였다.
아직 꾸려지진 않았다.
던전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모은 뒤 한다고 들었다.
이는 고급정보로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그럼에도 어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레이몬드 사제 덕분이었다.
직급은 평사제인데 권한은 성기사와 동급인 교구 사제, 아니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역시, 든든한 백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것도 추기경급이리라.
“어스 형제는 안 무서운가? 무려 5띠 던전인데.”
“룬께서 지켜주시겠죠.”
“그, 그렇지. 흠흠.”
가끔 어스는 레이몬드가 사제인지 졸부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 쏟아지는 관심이 너무 많거든. 아무튼 이번에도 나는 어스 형제님만 믿고 있을게.”
“가요.”
어스와 레이몬드 사제를 끝으로 원정대의 모습을 그렇게 현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망했다!’
던전에서 눈을 뜬 어스는 앞에 펼쳐진 풍경에 좌절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환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동굴이다.
3띠도 아니고 5띠가 하필 동굴 지형이라니.
동굴이었지만 주변은 환했다.
마법 손전등을 넉넉히 보유하고 있었기에 횃불보단 시야를 좀 더 넓게 확보할 수 있었다.
동굴의 폭은 15미터, 높이는 20미터쯤 되어 보였다.
작은 동굴은 아니지만 500명이 밀집하기엔 부족한 면적이었다.
자연 원정대는 길게 늘어설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는 원정대의 악재였다.
기사들이 발 빠르게 진영을 구축했다.
진영은 크게 세 부분은 나뉜다.
선두와 후미는 병사와 용병들을 배치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그제야 불안해하던 일꾼들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디콘은 레이몬드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중열에 배치했다.
명목은 일꾼들의 보호였지만 레이몬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일을 하느라 2시간이 그냥 날아가고 말았다.
“어스 경, 경이 굳이 정찰에 나설 필요가 있나? 용병들을 내보내세.”
제한적인 공간과 어둠을 두려워한 레이몬드 사제는 어스를 곁에 붙여두고 싶어 하였다.
“신속하게 끝내고 나가려면 제가 가야합니다. 레이몬드 사제.”
직위만 보면 어스가 레이몬드 사제보다 높았지만 둘 사이에서 그런 상하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몬드 덕에 손쉽게 성기사가 되었으니까.
어스는 짜증을 감추며 좋은 말로 레이몬드를 설득했다.
“하, 할 수 없군. 하지만 멀리 가진 말게.”
“물론이죠.”
레이몬드를 설득한 이후 걸림돌은 없었다.
어스는 소수 정예의 정찰대를 꾸렸다.
단독 행보를 보이던 이전과 다른 행보였다.
이는 그 역시 동굴 지형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기사 1명에 디콘 4명.
거기에 발이 빠르고 경험이 많은 용병 두 명을 대동한 어스는 곧 본진에서 나왔다.
루리아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어스는 그녀의 참여를 막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말 한마디에 설득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았다.
글리시아의 기사 블릭이 용병 둘과 함께 선두에 섰고, 어스는 중무장한 디콘들의 호위를 받으면 움직였다.
마법사가 포함된 무리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진영이었다.
‘이런 마법사 대접, 처음인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