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오스완드 영주를 향한 서부 영주들의 압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
그들의 입만 닫힌 건 아니다.
성기사를 압박했다는 소문이 날까봐 지레 놀란 그들은 오스완드 영주를 통해 어스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콧대 높은 귀족들, 그중에서도 진성 귀족이라 불리는 영주들이 알아서 화해를 청해오자 어스는 그 손을 잡았다.
감정적으로 그들과 대립해 봐야 중간에 낀 오스완드 영주만 곤란할 터이고,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들도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보니 오스완드 영주 편에 감사의 인사를 전달했다.
물론 처음부터 선물만 받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보검을 얻으면 휘두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듯 어스 역시 그랬으니까.
그때 그를 만류한 것이 레이몬드였다.
“힘을 가진 자들에게 빚을 지우는 건 몹시 힘들다네. 자네는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려운 일을 한 거야. 그러니 잘 차려진 상을 엎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네. 그들이 작정하고 교단에 로비를 벌인다면 나도 조금 곤란하고 말이야.”
그 말에 어스는 보검(?)을 뽑지 않았다.
오스완드 영주가 심적으로 고생했다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오히려 영주들에게 빚을 지운 셈이니 으스대고 싶은 자신의 마음만 달랜다면 모두가 평안한 일이었으니까.
“던전으로 진입한다!”
어스를 대신하여 기사 웨이즈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번째 원정길이다.
그래서인지 배웅하는 자들이나 원정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에게서 조금의 긴장감도 없었다.
앞서 세 번을 완벽하게 성공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번 네 번째 원정 역시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추위로 고생했다.
하필 동토의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어스는 빠르게 던전을 처리했다.
* * *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 달이 넘었잖아요. 가족들도 볼 겸 벌인 일도 있고.”
루리아는 매번 원정에 참가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은 더욱더 가까워졌다.
그 결과.
“일?”
어스의 개인사에도 관심을 직접 표현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할 때 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남들이 보면 별거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래서 어스는 기분이 좋았다.
루리아와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하나씩 무너져 서로가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데리고 가면 좋을 텐데.’
어스의 이동력을 책임지는 블링크도 하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타인을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8서클의 매스 텔레포트, 이건 반드시 사고 만다.’
그러자면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현재로선 까마득했다.
혼자 하기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의뢰였다.
상인, 용병, 정보, 모험가 길드에 현상금을 걸 생각을 굳혔다.
‘위그드라실의 조각은 거의 비슷한 모양이니까.’
만약 조각 모양이 제각각이었다면 불가능할 테지만 다행하게도 조각의 모양은 대동소이하여 그림으로 그려 각 길드에 뿌릴 계획이다.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어스가 생각하고 있는 현상금은 개당 1만 테스였다.
“전에 말했던 공방이요.”
“오래…… 걸려?”
지인이 아닌 여자로서 묻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르르.
어스의 가슴에 큰 불이 일어났다.
뜨겁다, 뜨거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반쯤 이성이 날아간 어스는 그래서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덥석.
‘소, 손을 잡았어. 내가…… 루리아 누나의 손을.’
손은 여러 번 잡았다.
그간 함께 한 시간과 사건이 몇 갠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잡는 건 처음이었다.
막상 잡자 루리아가 손을 떨쳐낼까 심장이 쫀득쫀득해졌다.
다행히 루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힘주어 잡아주었다.
“기다릴게.”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졌다.
그냥 글리시아 영지에 눌러 앉을까?
좀더 루리아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반쯤 날아간 이성이 제자리를 찾자 더는 그 손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손까지 잡았잖아. 다음엔…… 다음엔…….’
손목인가? 아닌가? 진도를 빼려면 대체 뭘 잡아야지?
아무래도 왕도에 가면 로맨스와 관련된 책부터 구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가기 싫다, 집에.
‘젠장, 블링크!’
* * *
어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전에 없던 건물 한 채가 들어서 있었다.
공방 건물이었다.
‘그새 다 지었네.’
내부는 어떨지 몰라도 외부는 완성형이었다.
어스는 고개를 돌렸다.
뒷마당 한편에 다진 땅에서 여동생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검을 수련하는 것이다.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그새 또 성장한 듯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수련하는 걸 자주 보았고, 글리시아에선 루리아와 매일 수련하다 보니 자연 안목이 늘어난 덕분에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힘이랑 민첩은 왜 안 오르는 건지.’
성장한 여동생을 보자 여전한 자신의 스탯을 떠올리며 얼굴을 구긴 어스의 두 눈이 이내 휘둥그레졌다.
그의 첫사랑, 끝내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곱게 접게 만든 당사자가 수련중인 여동생 곁으로 은밀히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살?
그런 건 아니었다.
암살용으로 목검을 든 경우는 없을 테니.
반가운 마음에 당장 내려가려다 멈추었다.
루리아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한 번 접은 사랑은 다시 여는 게 아냐.’
명대사다.
루시에게 접근한 아그네스가 루시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다.
루시는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 생각했는데.
탁!
‘어라. 막았네.’
단순히 막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격이 동시에 이뤄졌다.
공격을 예상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반응이다.
경험했으니까.
어스는 여동생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아그네스는 역시 아그네스였다.
루시의 반격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공격을 흘리며 다리를 걸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아그네스의 수법이 은밀해서인지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어 바닥을 굴렀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루시를 향해 아그네스의 검이 떨어졌다.
저러면 백퍼센트 패배다.
자신의 경험을 비춰볼 때.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루시는 공이 굴러가듯 지면을 구르며 오히려 아그네스의 발목을 공격했다.
익숙한 듯.
이후 아그네스와 거리를 확보한 루시는 몸을 일으킨 뒤 저돌적인 공격을 펼쳤다.
거칠고 야성적인 공격이다.
여동생의 모습에서 한 사람이 스쳐 보였다.
바로.
“왼쪽 어깨를 틀어!”
‘린다 누나!’
벼락같은 일성에 루시는 왼쪽 어깨를 틀었고 아그네스의 찌르기 공격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나갔다.
공격이 실패한 건 아그네스가 루시를 봐줬기에 가능했다.
‘두 사람이 루시를 가르치고 있었네.’
저돌적인 방식의 공격을 좋아하는 린다와 달리 아그네스의 검은 섬세하고 날카로웠다.
전자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용이하고, 후자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 용이했다.
그런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성질의 검이 하나가 되었다.
루시를 통해.
린다와 아그네스가 전수하는 건 자신들의 검만이 아니다.
그들의 풍부한 실전경험까지 루시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그네스의 상대로는 부족했기에 몇 합 더 버티다 결국 루시는 패했다.
루시는 자신이 패배한 원인에 대해 곱씹었다.
아그네스와 린다는 그런 루시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자주 있는 일인 듯 보였다.
“누구냐!”
루시의 상념은 경계심이 잔뜩 깃든 이 목소리에 깨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거너였다.
“저예요.”
어스는 후드를 뒤로 젖히며 손을 흔들었다.
그에 장내의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어스! 사람 불러 놓고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당장 안 내려와!”
여전히 괄괄한 린다.
“조심해서 내려와.”
혹여 어스가 서둘다 지붕에서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차분하게 말하는 아그네스.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떨어지겠어.”
아그네스의 걱정을 일축하는 거너.
그리고 어스가 왔다는 걸 듣고 한달음에 달려 나온 니코에 이어 줄줄이 나오는 사람들.
‘내 가족, 내 사람들인가?’
자신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자 가슴 한편이 뿌듯해졌다.
“다녀왔습니다. 하하.”
* * *
거너, 아그네스, 린다, 니코가 합류하자 어스의 집은 전보다 더 복작복작해졌다.
귀가(?) 기념으로 어스는 잔치를 열었다.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는 건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열 명분의 충분한 음식을 하려니 자연 바빴고 이에 어스의 어머니 엘이나가 손을 보탰다.
어스의 어머니까지 주방에서 들어갔는데 가만있을 수 없었기에 아그네스와 린다도 거들었다.
아그네스와 달리 린다는 곧 쫓겨났다.
외팔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쫓겨난 건 아니다.
그녀와 주방은 대척점에선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급히 마련한 음식이 식당 테이블 가득 채워졌다.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고도 자리는 남았다.
역시, 집은 크고 볼 일이다.
가족 단위로 고용한 노른 일가도 행크와 엘이나가 재촉하자 함께 자리했다.
넉넉한 음식과 술.
이를 즐기며 서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중 백미는 역시.
“서, 성기사?”
“네가?”
“마법사가 성기사도 될 수 있어? 그게 가능해?”
다들 놀라워했다.
당연히 놀랄 것이다.
집에서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성기사가 되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거짓말이지?”
믿기 힘들다며 증거를 보이라는 여동생, 어스는 그 앞에 교단의 성기사임을 증명하는 패를 흔들어 보인 뒤 꿀밤을 때렸다.
그럼에도 루시는 맞고만 있었다.
멍한 얼굴로.
놀란 건 비단 루시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교단의 성기사는 유명했지만 일반인이 성기사를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기사는커녕 사제도 보기 힘들다.
하물며 사제보다 더한 성기사를 그것도 그 성기사가 가족이자, 지인임에야 말해 무엇할까.
“그, 그럼 앞으로 성기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전처럼 불러요. 조쉬.”
“그래도 성기사이신데 어찌.”
“그 이야긴 그만하고 몸은 어때요? 혈색을 보니 좋아진 것 같은데.”
“많이 좋아졌습니다. 모두 어스 서…… 흠. 어스 님 덕분입니다. 제 평생 어스 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쉬의 아내 실비아는 눈물까지 흘리며 거듭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올겨울도 넘기기 힘든 절박한 상황에서 불현듯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 어스는 저들 부부에겐 평생의 은인이었다.
아니, 곧 태어날 아이까지 포함하여.
찬사와 눈물 어린 감사의 인사가 쏟아지자 민망해진 어스는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파티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눈물의 영향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 조쉬의 아내 실비아가 진통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아니, 좋은 일인가?’
여자들은 모두 실비아의 출산을 돕기 위해 바삐 움직였고, 남자들은 안절부절못하는 조쉬를 달래는 한편 여자들이 소리칠 때마다 필요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원래 내가 주인공인데.’
그러나 현실은 그의 주인공 자리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진통이 시작된 지 3시간, 실비아는 무사히 아들을 출산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내 아들도 아닌데 왜 내가 이름을?”
“부탁드립니다. 어스 님은 성기사시잖아요.”
남의 아들 이름 지으라고 된 성기사가 아닌데.
더구나 자신의 귀환 파티를 쫑(?)낸 녀석인데.
“토, 톰은 어때요?”
어스라는 이름처럼 흔해 빠진 이름이다.
조금의 고심도 없이 툭 꺼낸 그의 말에 실망할 법도 한데 조쉬는 그 이름을 제 아들의 이름으로 정해 버렸다.
그것도 엄청 기뻐하며.
‘왜 그래요? 조쉬, 그냥 장난으로 던진 말인데 그걸 진담으로 받으면.’
훗날 톰이 머리가 굵어진다면 두고두고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니, 어쩜 더 할지도.
톰이란 이름은 어스보다 더 흔해 빠졌으니까.
‘몰라, 내 아들도 아닌데.’
그래 당사자의 아비가 저리 기뻐하는데 훗날 원망하면 그땐 조쉬가 원해서 그랬다고 하면 될 것이다.
“오빠.”
“왜?”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명색이 성기사면서.”
“난 그냥 던졌고, 받은 건 조쉬 씨잖아.”
“그래도 그렇지 조쉬 아저씨와 실비아 언니의 첫 아이인데 톰은 너무 하잖아.”
루시의 말에.
“동감.”
거너.
“백배 동감.”
린다.
“내 생각엔 어스가 질투심에 툭 던진 말이라는 데 한 표.”
니코.
“어스가 너무했네.”
아그네스까지.
그리고 뒤이어 조쉬에게서 이 말을 전해들은 어스의 부모님이 가세했다.
그의 어머니는.
“어스, 지금이라도 조쉬 씨 말려.”
“난 좋은데. 톰, 톰, 톰.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잖아. 우리 어스처럼. 어스가 아빨 닮아서 작명에 소질이 있나봐. 하하하.”
작명 개판은 부전자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