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다음 날 어스는 레이몬드 사제가 보내준 마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루리아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으나 끝내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어스는 이를 다행이라 여겼다.
제대로 된 대답은 할 수 없었으니까.
영주관에서 레이몬드 사제의 집까지는 마차로 20분 거리였다.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레이몬드 사제의 집은 저택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었다.
‘집만 크면 뭐해 가치는 내 집이 더 나가는데.’
저택의 경비는 디콘이 맡고 있었다.
교단을 왕국으로 비유하면 디콘은 병사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그들을 경비원으로 부리고 있었다.
평사제에 불과한 레이몬드가 이러한데 그보다 높은 계급의 사제들은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으리으리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인과 하녀들이 도열한 채 그를 맞이했다.
“내 집에 온 걸 환영하네.”
사제복을 벗어 던진 레이몬드는 왕도에서도 보기 드문 명품으로 전신을 도배하고서 어스를 맞이했다.
옷맵시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보니 명품이 눈물짓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레이몬드는 그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원탁은 몹시 넓었지만 이내 하녀들이 내온 음식으로 물잔 하나 놓을 자리가 없어졌다.
매일 이렇게 쳐 먹는다고 가정하면 지금의 레이몬드는 오히려 날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촐하네. 들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일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전 고용인 네 명을 들였는데도 살림이 빠듯하던데.”
“에? 고작 고용인 네 명을 들였는데도 살림이 빠듯하다고? 5서클이나 되는 마법사의 살림이 그리 빈약해서야. 집사.”
“예, 주인님.”
“창고에서 상자 하나 가져오게. 1번 창고에 있는 것으로.”
“이, 일번 말씀이십니까?”
놀라 되묻는 집사의 표정을 보니 엄청 대단한 선물을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꽂혔다.
그래서 사양하려는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저 사제 의외로 통이 큰 사람인가? 첫인상은 안 그랬는데.’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면 거의 프라이스급이다.
“갑자기 창고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지만 모른 척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선 어린 나이가 도움이 된다.
사소한 실수는 그냥 넘어가니까.
“자네 사정을 알게 됐는데 내 어찌 방관하겠는가. 우리가 의형제를 맺진 않았지만 내 마음에 자네는 이미 내 의동생이네. 그러니 내가 자넬 그리 생각하듯 자네도 날 그리 생각해준다면 받아주게.”
사회적인 위치나 지위가 있는 처지가 아니니 청탁을 위한 뇌물로 보기 힘들다.
오히려 자신이 레이몬드에게 주면 그에 걸릴지 모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순수한 선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과연 욕심 많아 보이는 저 인간이 그런 의미로 주는 것인지는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엘프만 봐도 충분한데 거기다 선물까지라…….’
레이몬드에 대한 인상이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이렇듯 아낌없이 퍼주니 도저히 싫어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그가 천하에 몹쓸 악당일수도 있겠지만.
‘……부담스럽네.’
찝찝했지만 내심 레이몬드의 집사마저 놀라게 만든 상자의 정체가 궁금해 도저히 사양할 수 없었다.
“형님께…… 이런,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울컥해서. 흠흠. 아무튼 레이몬드 사제님께서 절 이리 생각해주시니 무엇을 주실지 모르지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그래야지. 자자. 드세.”
레이몬드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호방함과는 정반대의 외모다.
그럼에도 이를 억지로 흉내 내려고 하다 보니 꼴사나워야 하는데 전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러다 진짜 레이몬드 사제랑 친해져 버리는 거 아냐?’
내심 이러한 우려를 하였지만 어스는 레이몬드에 말에 맞장구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끝마쳤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집사가 상자 하나를 그의 앞에 놓았다.
상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그런데 그걸 들고 온 집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레이몬드의 말도 그렇고.
어스는 앞에 놓인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엔 실크로 만든 봉투 하나만 달랑 들어 있었다.
봉투와 레이몬드를 번갈아 보았다.
레이몬드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사라졌던 기대감이 다시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봉투를 개봉하자 그 안엔 마법 계약서와 유사한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수표였다.
수표가 있다는 건 들어봤지만 실제로 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 십…… 처, 천만?’
줄지어선 ‘0’의 행렬, 그리고 그 앞에 당당히 자신을 뽐내고 있는 숫자는 무려 5였다.
꿀꺽.
“사, 사제님?”
어스는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이 액수의 5분의 1만 줘도 정신이 혼미할 텐데 이를 넘어서는 액수를 선물 받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그간 목숨을 무릅쓰고 모았던 전 재산을 단숨에 푼돈으로 만들어버렸기에.
이제야 집사가 놀라 되묻던 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집사는 담대했던 것이다.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저 인간 대체 뭐지? 뭔데 사람 마음을 이렇게 흔드냐고!’
비명을 간신히 참고서 바라본 레이몬드, 그의 뒤로 후광이 보였다.
끔뻑끔뻑.
* * *
레이몬드는 약속대로 그에게 자신의 이종족 노예를 소개했다.
어스가 기대했던 엘프는 그곳에 없었다.
고양이 인간, 아니 묘인족뿐이었다.
스물한 명.
고양이 귀와 눈, 그리고 탐스러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레이몬드를 보호하듯 둘러 싼 스물한 쌍의 눈엔 어스를 향한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이에 레이몬드가 자상한 음성으로 그들을 달래었다.
그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노예라며? 이 모습 어디에 노예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 거지?’
알면 알수록 레이몬드는 이상한 남자였다.
기대했던 엘프가 아니었기에 관심이 급격하게 식어버린 어스는 이후 레이몬드와 다과를 나누며 드디어 레이몬드가 준비한 진짜 선물이 무엇인지 듣게 되었다.
“내 자네를 성기사로 추천했네. 보통은 절차가 까다롭지만 조만간 통과 되어 정식 임명장이 도착할 걸세. 물론 자네가 승낙해야겠지만.”
승낙을 운운했지만 레이몬드의 태도에선 당연히 어스가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받아먹은 게 있다 보니 딱 잘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물을 토해내고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러자니 액수가 너무 컸다.
하지만.
“저는 어딘가에 매이는 걸 싫어합니다. 때문에 모험가를 선택하였고요. 이렇다보니 아무래도 성기사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 싫다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모험가가 제 적성에 맞습니다. 하지만 절 생각해주신 레이몬드 사제님과의 인연만큼은 이 문제를 떠나 항상 제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이건 생각도 못 했군. 다들 하고 싶어서 난린데…… 음, 아직은 젊어서 그런가? 흠.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라 머리가 멍하군.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숙고하는 건 어떻겠나? 성기사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없네. 절차도 절차지만 심사도 엄청 까다롭네. 그래서 천 명이 지원하면 그중 두세 명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좁은 문이 바로 성기사라네.”
‘그렇게나 대단한 자리를 평사제의 추천만으로 가능하다고? 뭐지? 교단 내 인맥이 좋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몬드에 대해 좀더 알아볼 걸 그제야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배신감마저 드네.”
‘선물을 토하라는 건 아니겠지?’
레이몬드의 태도를 보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러기엔 깊이 생각한다는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심하던 레이몬드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모험가는 많이 돌아다니는 일이지?”
“그렇죠.”
“그럼 그에 맞는 보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어떤가? 그래도 거절할 텐가?”
추기경이나 대주교급 인물이 아니고서야 감히 꺼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런 제안을 일개 평사제가 하니 도저히 레이몬드 사제의 뒷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의 거절은 레이몬드와 원수가 되겠다는 선언이리라.
평사제와의 마찰도 껄끄러운 현실임을 감안하면 여기서 승낙해야 할 듯싶었다.
그가 제 입으로 한 말을 지킨다면 딱히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기사가 된다면 자신도 면책특권을 누릴 테니까.
더해 대륙 곳곳에 흩어진 신전에서 무료 숙식은 물론 필요하다면 사제와 디콘을 동원 할 수도 있다.
더해 귀족들의 눈치도 더는 볼 필요 없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신다면 사제님을 친형님처럼 생각하는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다만,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됐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가 신경 쓸 건 없어. 내 살다 살다 성기사 서임을 마다하는 사람을 다 보게 되다니.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아야 하나봐.”
“그 말씀 비꼬는 거죠?”
실실 웃으며 말하였다.
레이몬드 사제의 표정이 풀어진 것 같아서.
제대로 봤는지 레이몬드는 그 말을 고깝게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아무튼 내 자네를 위해 출혈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 향후 나에 대한 자네의 마음이 진심이길 바라네.”
무리한 부탁만 하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받은 게 적지 않으니까.
“물론이죠. 우리가 남입니까?”
“그럼?”
“형제죠, 형제.”
“넉살하곤.”
어스가 작정하고 비위를 맞추자 레이몬드는 좀 전의 일을 잊은 듯 저녁만찬을 준비시켰다.
그날 어스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대취했고, 술김에 왜 자신을 이처럼 챙기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에 레이몬드 사제는 꼬부라진 음성으로.
“어리고 귀여운데다. 능력까지 어마어마한데다 성격도 좋으니 내가 어떻게 싫어하겠어. 까다로운 구석이 있지만 그것도 자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내 호의를 거절할 땐 순간 날 무시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니까 잊어버리자고.”
“대인배!”
“자, 마시자고, 마셔!”
그게 어스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후 사람이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셨으니까.
* * *
어스와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자 레이몬드는 던전 원정에서 빠졌다.
그의 입장에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를 던전이 두려웠던 것이다.
대신 어스가 레이몬드를 대신해 원정대 목록에 그의 이름은 계속 올려놓았다.
레이몬드가 문책 당할 일을 방지한 것이다.
그렇게 글리시아 영지에서 세 번째 던전의 보스를 처리하자 그간 이제나저제나 목 빼고 기다렸던 반가운 선물이 터졌다.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1을 획득합니다.
-레벨업.
-업적 포인트 3을 획득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어스는 크게 기뻐했다.
레벨업에서 업적 포인트로 3을 받았기에.
흥분과 떨림을 억제한 어스는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51).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5/100). 승리의 노래(4/12).
생명력 : 245/245.
마나 : 325/325.
인벤토리 : 1(+4).
스탯 : 힘(2.3). 체력(30). 민첩(2.2). 지력(30). 정신(46).
직업 스킬(9/9) : 매직 애로우(+3/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0/12).
콜 라이트닝(+0/12). 블링크(+0/12). 체인 라이트닝(+0/12).
업적 포인트 : 4.
코인 : 28,483.
‘지리겠네, 지리겠어.’
* * *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5일에 한번 꼴로 던전이 닫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이웃 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그들이 놀란 마음을 진정할 겨를도 없이 돌아간 뒤, 어스의 이름은 헥터 왕국 서부에서 들불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던전 원정을 준비 중이던 서부에서 힘깨나 쓰는 영주들이 오스완드 영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어스를 넘기라는 압력이었다.
오스완드 영주는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어스를 고용하여 쓰는 게 아니라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기에.
그래서 서신에 이를 사실 그대로 적어서 보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나왔다.
오스완드 영주 입장에선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당해낼 힘이 없다보니 결국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어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한 것이다.
하나, 어스는 아니었다.
왜?
-최소한의 의무만 지면 돼. 그러니 성기사든, 모험가를 하던 알아서 하게. 대신 교단의 명예를 먹칠하는 짓만 하지 말게.
책임은 없고 권리만 누릴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