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어스네 네 식구만 살던 넓은 집에 사람들이 속속 들어왔다.
고용인이란 이름으로.
수도원 같던 분위기는 덕분에 찾을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마당 가득 눈이 쌓여 있었다.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 사람이 다니는 길의 눈만 치웠다.
고용인들이 없었다면 제설작업에 반나절은 걸렸을 것이다.
집안에서 사람이 다닐 길은 확보했지만 문제는 지붕이다.
본채와 별채 모두 단층이 아니다 보니 지붕으로 올라가서 눈을 치우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에 그칠 눈이 아닙니다. 자칫 지붕이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어스의 고향 마을에선 눈을 보기 힘들었다.
간혹 눈이 내리더라도 지금처럼 두텁게 쌓이는 경우는 없었다.
설사 눈이 쌓이더라도 고작해야 발목 깊이였다.
그래서 사람의 통행이나 지붕 붕괴 따윈 다들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처음엔 눈이 쌓여 좋아라 했던 어스의 여동생도, 로맨틱하다고 말하였던 그의 어머니도 지금은 치를 떨고 있었다.
“노른 씨, 정말 눈 때문에 지붕이 무너지는 일이 있습니까?”
“말씀 편히 하십시오. 나리.”
“나리라는 그 말은 그만하세요. 나도 노른 씨와 같은 일개 평민입니다.”
“그래도 제 고용준데 어떻게 말을 놓겠습니까?”
“노른 씨의 고용주는 내가 아니라 내 아들 녀석이죠.”
지붕에 쌓인 눈을 바라보던 어스는 아버지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아니, 한 명은 제외다.
몸이 완쾌되지 않은 조쉬는 방에서 요양 중이다.
어스는 조쉬의 쾌차를 위해 치료비를 아끼지 않았다.
만삭인 그의 아내 역시.
현재 이 집의 성비는 남성 네 명, 여성 일곱에 성별(?)불상이 한 명이다.
그렇게 이 집엔 총 11명이 살고 있다.
조만간 거너 일행이 합류하게 되면 그땐 15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제가 그러겠습니까?”
“노른 씨도 한 고집 하시네요. 어스야.”
행크는 노른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고용주와 고용인이란 벽으로 인해 좀처럼 진전은 없었다.
조쉬가 있지만 그는 환자였기에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라 여건이 되지 않았다.
“예.”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겠냐?”
“안 그래도 마법으로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가능해?”
“가능하죠. 싹 녹여버릴게요.”
파이어 볼 몇 개 띄워 놓으면 되리라.
녹아도 다음 날이면 또 지금처럼... 눈송이의 크기를 보니 더 많이 쌓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쩌랴 지금도 위험하다는데.
부자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노른은 내심 깜짝 놀랐다.
어스가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법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스는 지체하지 않고 파이어 볼을 생성하여 본채와 별채 지붕의 눈을 녹이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불덩이라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밤에 본다면 더 보기 좋을 것이다.
아님, 두렵거나.
점심 식사 준비를 끝냈다며 이를 알리기 위해 나온 노른의 처이자 고용인이기도 한 로젠이 이 모습을 보곤 제자리에 얼어붙어서는 입만 뻐끔거렸다.
파이어 볼의 활약으로 눈은 모조리 녹여버릴 수 있었다.
“지붕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죠?”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작은 나리. 용병으로 이십 년을 구르며 별의별 걸 다 봤지만 작은 나리 같은 마법사는 단연코 처음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두 번이 아니다.
마법사인 하들리 역시 그러했다.
놀람의 무게를 따진다면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들리 쪽이 더 무거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동네에서 유일하게 어스의 집 지붕만 눈이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지어진 집인데다 담장까지 높았기 때문이었다.
“로젠 아줌마 거기서 뭐하세요?”
“앗! 제가 깜빡 했네요. 큰 나리, 작은 나리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행크와 어스는 서로를 보며 낮게 한숨을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나리라는 호칭은 들을 때마다 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요. 아빠. 노른 아저씨도.”
고용주와 고용인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집에선 달랐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한다.
노른과 로젠 부부, 그리고 저들 부부처럼 어스에게 고용인으로 고용되어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부부의 두 딸 역시.
처음엔 고용주 가족과 한 식탁에 앉는 걸 불편해하던 이들도 지금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한 울타리에 살면 식굽니다. 식구가 왜 식굽니까? 그러니 밥은 무조건 같이 먹는 겁니다.
이는 행크가 한 말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은근히 카리스마 있다니까. 엄마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 * *
드디어 눈이 그치고 길이 뚫렸다.
어스는 곧장 상가 지역으로 걸음 했다.
마차가 다니기엔 도로 정비가 완전하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도보로 이동했다.
평소 외투 차림으로 돌아다녔던 어스는 이번엔 마법사답게 차려 입었다.
딸랑.
왕도에 있는 모든 마법 상점은 마탑이 직접 운영하는 형태였다.
그렇다 보니 손님일지라도 상점 안에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귀족이더라도.
어스가 입고 있는 로브는 문외한이 봐도 범상치 않다.
덕분에 이 옷을 입고 있으면 어리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는데.
“너, 너……!”
“황당하네. 유니폼을 보니 여기 점원인 것 같은데 손님에게 대뜸 너라니.”
어스는 몹시 불쾌했다.
마법 로브를 입고 있지 않으면 몰라도 입고 있는 지금 무시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무시가 아니라 시빈가?
아무래도 시비로 생각하는 게 맞을 듯.
“크흑.”
점원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움켜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뭐지? 왜? 어째서 저러는 거지? 나랑 원수진 일 있나?’
원한을 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처음엔 점원의 태도에 화가 났던 어스는 이젠 오히려 궁금해졌다.
자신을 언제 봤다고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인지.
어스가 그 이유를 물으려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어스 씨!”
입구에 서 있는 그를 본 나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등장으로 어스는 점원이 자신에게 왜 저와 같은 황당한 짓을 벌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두 사람이 딱 그 짝이네요. 호호.”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일이 호호 할 일인가?
수다쟁이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성격도 괴팍하지 않은가.
“원수라뇨? 저 점원과 제가요?”
“어머, 벤슨을 기억 못 하세요? 결투도 했으면서.”
“아! 그 두꺼비! 저 점원이?”
“풉! 당사자 앞에서 그건 너무했네요. 아무리 두 사람이 결투까지 한 사이라곤 하지만.”
어스는 두 눈을 연방 비비며 벤슨을 보았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벤슨 할리는 두꺼비를 탈피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을 빼서 못 알아 봤나?’
찬찬히 뜯어보니 벤슨과 닮은 구석이 보였다.
“정말, 그 사람이네. 그런데 복장이 왜?”
“그야 어스 씨 때문이죠.”
“저 때문이라고요? 왜요?”
“마탑의 명예를 실추시켰잖아요. 그래서 벤슨은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벤슨.”
“…….”
“벤슨!”
“예…… 부, 부지점장님.”
“이분은 내가 모실 테니까 가서 일봐요.”
동문은 동문이었다.
벤슨의 기분을 고려하여 자리를 피할 구실을 만들어 주는 걸 보면.
벤슨은 어스를 한차례 쏘아본 뒤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
“귀족 아니었어요? 그때 지 가문이 대단하다고 엄청 자랑했었는데.”
“그나마 가문 덕에 이정도지 그런 가문도 없었다면 더 심한 벌을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여긴 당연히 절 보러 오신 거 맞죠?”
“지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왔는데요.”
“에?”
“지인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왔죠.”
언제 토라졌냐는 듯 금방 한하게 웃는 나리아였다.
“저 퇴근하려면 2시간 더 있어야 하는데. 에이, 모르겠다. 그냥 퇴근해야겠어요. 나가요. 제가 밥 살게요.”
“그건 나중에요. 지금은 살게 있어서.”
“뭐야? 정말 손님으로 온 거예요?”
“겸사겸사라고 말했잖아요.”
“그렇다면 손님으로 모실게요. 호호. 무엇이 필요하세요?”
“경량화 배낭을 살려고 해요.”
처음엔 공간 주머니를 살까 했지만 조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공간 주머니에 비해 배낭이 크다보니 한 사람이 휴대할 수 있는 숫자에 제한이 있으나 인벤토리가 있는 어스에게 있어 그 점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따로 공간 주머니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참고로 어스는 전날 벤슨 할리와 결투에서 금전 이외에 10킬로그램짜리 공간 주머니도 하나를 취한 바 있었다.
“경량화 배낭이요?”
“없어요?”
“있긴 있는데 어스 씨는 운이 좋네요.”
“그게 무슨 말이죠?”
“만약 내일 왔다면 재고가 있더라도 팔지 못했을 거예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 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나리아는 주변을 살핀 뒤 갑자기 다가와선 그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요? 던전.”
“예.”
“목소리가 너무 커요. 아무튼 그 때문에 경량화 배낭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각 마탑 직영 공방들 마다 난리도 아니에요. 생산이 수요를 따라 잡지 못하니 어쩌겠어요?”
“판매 중지가 있을 거란 말이군요.”
“그래서 제가 운이 좋다고 한 거예요. 적어도 오늘은 팔 수 있거든요.”
“그런 정보를 왜 내게 알려주는 거죠? 나리아 씨가 곤란할 수도 있잖아요?”
“어머, 우리가 남인가요?”
‘남 아닌가? 설마…… 날 욕심내고 있는 건가?’
오싹.
“지인이죠, 지인.”
그의 말에 나리아는 언뜻 실망한 기색을 비췄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냉철한 투지를 발휘했다.
“그렇죠, 그래요. 지금은 그렇다고 하죠. 참, 배낭은 몇 개나 필요하세요?”
인벤토리 용량과 공간 주머니를 합하면 총 70킬로그램까지 가능하다.
여기에 자신의 소지품, 특히 포션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외하면 30개까진 가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숫자는 25개가 전부였다.
30개는 최대치였기에 25개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낫지 싶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해당 몬스터의 부산물을 추출하는 고되고 험한 작업 모두 온전히 자신의 몫이기에.
블링크가 다 좋은 데, 매우 만족하는데 한 가지 절실히 안타까운 점은 타인을 대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건 강화를 해도 마찬가지다.
블링크의 강화는 마나 소비를 줄이는 게 전부다.
나쁘진 않지만 엄청 좋은 것 역시 아니다.
“25개 몽땅 주세요.”
“모, 몽땅 말인가요? 그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요?”
“쓸데가 있어요. 그보다 저녁이나 먹어요.”
입막음을 위한 멘트.
“옙, 고객님. 25개 모두 내드리겠습니다.”
* * *
경량화 배낭 25개를 사는 대가로 어스는 나리아와 내키지 않는 저녁식사를 해야만 했다.
밥 한 끼 먹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녀가 쏟아내는 수다로 인해 먹기도 전에 배가 불렀다.
어지간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던 어스도 결국 음식을 남겼다.
그래도 식사자리는 끝났으니.
‘다행이다!’
두 번 다신 나리아와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리라.
“2차 가야죠.”
나리아에게 학을 뗀 어스에게 있어 이는 절망적인 통보였다.
“여기도 디저트 나오는데…….”
“디저트라니.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젠 성인들의 시간을 보내야죠. 술, 술 말이에요.”
“어쩌죠? 통금시간이 있어서.”
그물에 걸리기 전 어스는 무사히 빠져나왔고, 어부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듯 몹시 아쉬워했다.
“그럼, 다음엔 낮술해요.”
나리아는 포기를 모르는 수다쟁이 어부였다.
“예, 다음. 다음에 기회가 되면요.”
당분간 상가 지역은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있지도 않은 통금이란 카드를 통해 물고기는 유유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