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헥터 왕국 왕도의 주택지에 자리 잡고 있던 던전이 하룻밤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에 해당 지역의 거주자들, 특히 집 주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하룻밤 새 집값이 반 토막이 된 것도 억울한데 더 떨어질 여지도 다분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웃을 수 없었다.
그사이 헐값에 집을 팔아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제 잘못이니 자신의 선택을 탓해야하나 모두가 그러진 않았다.
특히 어스에게 집을 팔았던 사람은 어스를 찾아와서 계약 무효라며 생떼를 썼다.
그게 통하지 않자 자신의 인맥을 열거하며 협박까지 했다.
이에 어스는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마법 로브를 꺼내어 입은 뒤 양 어깨 위로 파이어 볼 두 개를 띄워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역시 세상은 힘이 있고 볼일이다.
이 일을 제외하면 어스네는 별 탈 없는 나날이었다.
반면 던전 증발 현상에 대한 조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덕분에 조용해야 할 동네는 그들로 인해 늘 어수선했다.
‘적당히 하고 끝낼 것이지 왜 저런데?’
처음엔 조사대의 등장에 조마조마했지만 며칠 저들의 동태를 살핀 결과 안심할 수 있었다.
헛발질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깥출입은 자제했다.
자신이 마법사인 건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내용이라 혹시 던전이 사라진 원인으로 자신을 지목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런 의혹도 사지 않았고, 수사대의 방문도 없었다.
이웃집엔 무려 세 번이나 들렀으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무는 동안 어스는 동료들과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를 통해 세간엔 알려지지 않은 특급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던전 자원화 사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확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까지 집안에만 있을 수 없었기에 오늘은 외출하기로 결심한 어스는 평범한 겨울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로브가 편하지만 이목이 귀찮아서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뭐야? 또 청소하는 거야?”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집이 넓다고 다 좋은 건 아닌가 봐. 귀족들은 이보다 더 넓은 집에 살던데 청소는 어떻게 하나…… 아! 하인과 하녀들이 있구나.”
엘이나는 무심코 한 소리였으나 어스는 이를 가볍게 흘러듣지 않았다.
“외출하는 길에 중개인 사무실에 들러서 일할 사람 알아볼게.”
“됐어. 청소가 뭐라고 엄마랑 아빠가 하면 되니깐 괜한데 돈 쓸 생각하지 마. 알았지?”
“나 돈 많다니깐 그러네. 그리고 내가 엄마 청소부 만들려고 이 집 산 줄 알아? 귀부인처럼 살게 해주려고 산거야.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살아. 알았지? 다녀올게.”
어스는 어머니의 손에 쥔 걸레를 뺏은 뒤 걸음을 재촉했다.
“아들.”
“응?”
“고맙다고.”
“가족끼리 무슨. 참, 아빠랑 루시는?”
“지하 창고 정리 중이야.”
“또?”
“거기가 좀 넓니.”
“사서 고생이네. 다녀올게. 참,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마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알았지?”
“조심은 상대가 해야지. 나 마법사잖아.”
지난 몇 달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안다면 저런 소리는 절대 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마음만 좋지 않을 테니까.
더해 지금보다 더 아낀다며 먹는 거, 입는 것도 줄일 게 분명했다.
일꾼을 들이는 일 역시 결사반대하리라.
‘엄마 외투도 사야겠어.’
아버지와 여동생 것까지 외출한 김에 잔뜩 사기로 마음먹은 어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현관을 지나 대문 앞까지 거리가 제법 된다.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니깐.’
투덜거리며 대문을 나선 어스는 한적한 주택가를 쭉 따라 걸었다.
주택가인데다 날도 추워서인지 동네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무장을 한 병사들이 전부였다.
병사들을 배치한다고 사라진 던전이 다시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고생들 하세요.’
그들을 스쳐 지난 어스는 곧 대중 마차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의 집에서 정류장까진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문제는 여기까지 오는 시간보다 마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올래 걸린다는 점이다.
평균 3, 40분에 한 대씩 오지만 가끔 1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블링크로 이동할까?’
그러고 싶지만 날이 너무 밝았다.
어스는 걸어서 가기로 하고 정류장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내일 교단에서 사람들이 나온다는군.”
멈칫.
“검은 소용돌이가 사라지면 좋은 일인데 왜들 이리 난린지 모르겠어.”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높은 분들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 문제는 그 때문에 나만 죽어나게 생겼으니 답답할 수밖에.”
“자네가 왜?”
“내가 맡고 있는 지역이 2군이라고. 당연히 실무 관리자인 내가 그들을 안내하고 접대까지 도맡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뒷돈도 안 나오는데 발품만 열심히 팔게 생겼군. 크크.”
“발품만 팔면 다행이지. 꼬투리나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또 시끄러워지는 건가?’
“아무튼 내일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해. 으이구, 춥다. 마차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다 바퀴라도 빠졌나?”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어스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떼어 걸어갔다.
* * *
“아이고, 운 좋은 손님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하하.”
“집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해서요.”
“거 보십시오. 분명 제가 고용인이 있어야 된다고 했죠. 이전 주인이 세 명의 고용인을 썼다고 합니다. 집안을 관리하는 하녀 둘, 마당관리와 심부름을 도맡는 하인 이렇게요. 참, 승용 마차는 구입하셨습니까? 만약 구입 예정이라면 솜씨 좋은 마부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인건비는 얼마나 하죠? 마부 포함하면.”
“월급이냐 주급이냐에 따라 다르고, 입주냐 출퇴근이냐에 따라서 인건비가 달라집니다. 입주면 더 싸죠. 재워주고 먹여주니까요.”
“입주로 해야겠네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괜찮은 사람들로 알아봐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제 이름을 걸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로 소개하겠습니다. 참, 혹시 가족 단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족 단위면 보다 더 신뢰할 수 있을 텐데.”
만능 상자도 아니고 말만하면 척척 나온다.
루리아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사람만 괜찮으면 됩니다. 내일 볼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내일 제가 댁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아뇨, 여기서 볼게요. 그래도 된다면.”
“물론이죠. 당연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럼 고용이 성사되면 수수료가. 헤헤.”
시골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에선 걷는 거 빼곤 다 돈이다.
시골 사람들 입장에선 날강도나 다름없지만 어쩌랴 이게 도시의 규칙인걸.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운 좋으신 손님.”
중개인 한스의 배웅을 받고 나온 어스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곤 상가 구역으로 걸었다.
상가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혹시, 어스 마법사님 아니세요?”
“누구시죠?”
“어머, 맞구나. 긴가민가했는데. 와아. 그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몸이 되게 좋아지셨네요.”
‘알아, 아는데 넌 누구니?’
“서, 설마 절 잊으신 건가요?”
외투 단추를 슬쩍 풀자 로브를 볼 수 있었다.
눈에 익은 심벌도.
“소피 영애 동문?”
“나름 존재감 있다고 자부했는데. 상처네요. 예예. 소피 영애 동문 나리아입니다. 제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건 분하지만 그래도 객지에서 아는 분을 만나니깐 기분은 좋네요. 왕도엔 언제 오셨어요? 참, 전에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해요. 남아서 도움을 드려야했는데 상부에서 긴급 호출이 와서 다들 부랴부랴 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 그 일로 삐지신 건 아니시죠?”
그때나 지금이나 말은 되게 많은 사람이다.
그래도 한 명이니 천만다행이다.
“그럴 수 있죠. 전 일이 있어서 이만.”
“어머? 그냥 이렇게 가신다고요? 차도 한잔 안 하고요?”
고작 1서클 마법사와 친분을 터서 뭐하랴.
예전이면 마법사들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서 이를 기회로 여기겠지만 지금은 알건 다 알고 있었다.
“바빠서.”
“그럼 할 수 없죠. 혹시 시간 되시면 절 찾아오세요. 전에 일도 죄송하니깐 식사 대접할게요. 참, 어디로 오라는 말을 안했네. 헤헤. 상가 구역 12번 길에 위치한 마법 상점으로 오시면 돼요. 삼 일 전에 발령받아서 근무하고 있거든요. 내키지 않았지만 갑자기 인력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승낙했어요. 참, 이건 비밀인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검은 소용돌이 아시죠? 조만간 원정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거예요. 참고로 검은 소용돌이의 정식 명칭은 던전이래요. 놀랍죠?”
하나도 안 놀랍다.
하지만 영양가 없는 장광설은 아니었다.
“마법 상점이요?”
“예, 부지점장으로 일하게 됐지 뭐예요.”
“조만간 찾아갈게요.”
“정말이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호호.”
어스에게서 거리감을 두려는 낌새를 눈치 챘지만 4서클 마법사와의 친분은 쉬이 얻는 게 아니었기에 스스로 자존심을 굽히며 매달렸던 나리아는 급격히 달라진 어스의 태도에 매우 기뻐했다.
‘어스 씨가 나이에 비해 대단한 마법사이긴 해도 용병인데 어디서 이런 고급 정보를 듣겠어.’
나리아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귀한 정보를 알려준 것에 그의 마음이 바뀐 것으로.
* * *
똑똑.
“오빠, 오빠. 안에 있어?”
마나 연공법을 늦게 까지 수련하고 새벽에 잠들었던 어스는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퉁기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교단에서 사람들이 나왔어. 그 사람들이 오빨 찾고 있어.”
교단이란 이름으로 방문을 받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안 좋은 일.
매우 안 좋은 일.
그랬기에 루시의 안색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어스 역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 무슨 이유로?”
“아빠랑 엄마가 상대하고 있어. 교단의 눈 밖에 난 일이 있다면 당장 달아나. 우리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볼게.”
이는 가족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소리다.
왜냐면 교단이 체포하려는 자를 숨기거나 혹은 도주에 도움을 줄 경우 동급의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지간히 친한 사이라도 교단이 개입하면 모른 척했다.
국법보다 무서운 존재가 바로 교단과 엮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 아니, 검은 소용돌이가 사라진 것 때문이 아니고?”
“그런 말은 없고 바로 오빠를 찾았어.”
‘뭐지? 교단이 왜 날 찾는 거지?’
내키진 않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홀몸이면 모를까 여긴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별일 아닐 거야. 그리고 잊었어? 오빠, 마법사잖아. 마법사.”
어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서 발을 동동거리는 여동생을 달랜 뒤 마법 로브로 환복했다.
여동생 앞에선 큰소리쳤지만 막상 교단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긴장감이 커졌다.
대책이라도 하나 마련해야하지 않을까? 잠시 걸음을 멈춘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내 카멜에게 문자 한 통을 남겼다.
내용은 별거 없다.
비빌 언덕 요망!
이게 끝이다.
긴장감으로 떨리던 마음도 문자 한통 보내고 나자 한결 가라앉았다.
복도 창문을 통해 복장과 표정을 점검한 어스는 가장 진지하고 진중한 모습으로 복도를 지나 층계를 밟았다.
저벅저벅.
구식을 갖춘 제대로 된 응접실 앞, 어스는 그 앞에서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은 뒤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당하게.
“룬의 성실한 신도, 마법사 어스라고 합니다. 저희 집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첫인상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고.
방실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