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던전에 대한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며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뤼빅스 대륙의 왕들과 교황, 그리고 거대 마탑의 마탑주가 영상을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한 대책 마련과 향후 행보를 논의하고 있었다.
-검은 소용돌이에 정확한 명칭은 던전입니다.
-던전? 솔론에선 그걸 어찌 알고 있습니까?
-우리 왕국에서 입장한 곳의 보스에게서 알게 된 정보입니다.
솔론 왕국 국왕의 말이 낳은 파장은 컸다.
웅성웅성.
참석자들의 반응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솔론 왕국의 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그러하듯 여러 왕들께서도 독자적으로 던전에 원정대를 보냈을 겁니다. 그러니 정보의 자세한 출처는 관례에 따라 들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점 교황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솔론의 국력은 헥터와 레오다니스 왕국의 사이가 나빠진 이후 양국의 중계 무역을 통해 급성장했다.
헥터와 레오다니스 왕국 입장에선 그런 솔론이 몹시 못마땅했으나 이제 와서 화해하기에는 두 나라 사이의 골은 너무 깊은 상태였다.
솔론 왕국 입장에선 두 나라의 관계가 지금처럼 지속되길 바라였고, 이를 위해 공작도 마다치 않았다.
헥터와 레오다니스 왕국에 멍청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들도 이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솔론이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 버릴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 보니 다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참을 수밖에 없었다.
‘레오다니스만 아니면 솔론의 뻔뻔한 낯짝을 갈아엎어 버릴 텐데. 레오다니스가 문제야, 문제.’
‘헥터만 아니면……. 우라질.’
헥터의 왕과 레오다니스의 왕은 불만을 삼키며 솔론 왕의 말에 수긍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밉보일 수 없었기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검은 소용돌이에 대한 정식 명칭은 던전으로 통일 되었다.
사실 명칭은 그들 입장에선 중요한 것이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솔론에선 많은 투자를 하셨군요. 알겠습니다. 각자의 사정은 묻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교황께 사의를 표합니다.
-천만에요. 솔론에선 던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한데 이 자리에서 제대로 밝히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인류를 위해.
-저희는 운이 좋아 명칭만 알아냈을 뿐, 이를 제외하면 정보라고 할 건 없습니다. 교황님.
-음, 그리 말씀하시니 믿지 않을 수 없군요. 성직자로서. 그렇다면 확인된 정보만 보면 두 가지군요. 첫째, 던전은 보스를 처리해야 닫을 수 있다. 둘째 던전 내부의 몬스터 부산물의 특이한 성질이 마도학에 도움이 된다. 이것이군요.
교황이 언급한 내용 중 두 번째 대목이야 말로 영상 회의가 만들어진 배경이었다.
각 국의 왕들과 탑주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도학의 성장은 각 왕국과 마탑에 있어 군침 도는 이야기였다.
만약 이러한 먹잇감이 없었다면 크고 작은 분쟁을 겪고 있는 왕들이 지금처럼 회의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반면 교단에선 마도학의 발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왕국의 힘이 커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교황은 던전 자원화를 제지할 수 없었다.
저들 사이에 이미 밀약이 맺어졌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약을 맺은 세력이 한둘이면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힘으로 눌러버리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한들 안 할 위인들이 아니지.’
막는다면 분명 음지에서 일을 진행하려 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양지에서 일을 하도록 토대를 조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활할 감시를 위해서라도.
이리 마음의 결정을 내린 교황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말을 해주었다.
-교단은 던전 몬스터의 부산물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겠습니다.
그에 모두가 기뻐했다.
변화와 발전이란 명제에 있어 항상 걸림돌이었던 교단이 처음으로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단.
-……?
-……?
-던전 원정대엔 교단의 인물이 반드시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교황의 제안에도 욕심에 마음이 급해진 왕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부동산 시세를 회복하겠노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에서 던전에 잠입한 어스는 무리지어 몰려오는 몬스터의 정체를 보자마자 가소로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파이어 볼!’
힘차게 날아간 파이어 볼을 가슴팍으로 받은 몬스터의 몸뚱이는 불꽃을 머금은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며 주변에 2차 피해를 일으켰다.
-코볼드를 처치했습니다. 2코인을 습득합니다.
……
……
앞서도 코볼드였는데 이번에도 코볼드였다.
그때와 다른 점은 동굴이 아닌 들판이란 점이다.
블링크의 제약이 없는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동굴이란 제한적인 공간에서와 달리 파이어 볼로 한 번에 처치할 수 있는 숫자가 적어진 건 내키지 않았다.
‘포션 겁나 마셔야겠네.’
파이어 볼의 폭발과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불꽃의 위험성을 목격한 놈들이 간격을 넓게 벌렸다.
갯과라서 그런지 참 영리하다.
붕어나 새였다면 저런 생각도 못 했을 텐데.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쾅쾅.
마나 : 10/310.
레벨 50이 되어 습득한 업적 포인트 2는 정신 스탯에 분배하여 기존 300에서 10이 더해졌다.
10의 마나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지력 30에 세 번 강화한 매직 애로우의 위력은 이미 1서클의 수준을 벗어난 상태였다.
관통까진 못해도 매직 애로우의 머리 일부가 등가죽 밖으로 삐죽 나왔다.
일반적인 매직 애로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사들의 금기라는 마나 고갈, 하나 어스에겐 알뜰한 소비일 뿐 마나 고갈로 인한 조금의 피해도 그에겐 없었다.
꿀꺽.
한 병의 마나 포션에 깃든 마나를 파이어 볼로 치환했다.
4발의 파이어 볼을 사용하니 또 마나는 ‘0’이 되고 말았다.
마나 총량에 맞게끔 마나 회복 포션의 농도를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계처럼 마나 회복 포션을 마시며 파이어 볼을 연사하자 그 많던 코볼드 무리도 씨가 말랐다.
콧잔등에 주름을 부르는 역한 냄새와 연기로 사방이 가득했다.
‘파이어 버스터 3강은 보스를 잡아야 가능하겠네.’
코인을 확인하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참고로 파이어 버스터는 현재 2강까지 강화를 마친 상태였다.
이곳이 3띠 던전이니 보스를 잡으면 필시 보너스로 업적 포인트 1개가 주어질 것이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더 높은 띠의 던전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해.’
띠 5개짜리 던전을 클리어해 본 경험은 있지만 목숨이 날아갈 뻔했던 끔찍한 쓴맛을 톡톡히 경험하였기에 제 발로 5띠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어스는 코인과 경험치 앵벌이를 위해 보스가 있음직한 곳을 확인했지만 그곳은 피하고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쾅쾅쾅-!
블링크를 통해 외곽의 코볼드를 모두 처리한 어스는 그제야 보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5천 코인과 보너스 업적 포인트 1을 수거하기 위해서.
* * *
어스는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올 때쯤 던전에서 나왔다.
당연히 보스를 처치하고서.
새벽이라 주변이 어두웠다.
덕분에 던전이 사라진 걸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블링크를 통한 이동이 가능한 어스에겐 넉넉한 시간이었다.
빠져나가기에.
그렇게 어스가 사라지고 난 뒤 던전이 사라진 걸 발견한 경비 초소는 단숨에 일대혼란에 빠졌다.
당황한 병사들의 고함을 뒤로한 채 어스는 임시로 지내고 있는 여관 지붕에 내려서고 있었다.
지붕에서 자신의 객실까지 또 한 번의 블링크를 사용한 어스는 파이어 버스터를 강화하여 100퍼센트 성공이 적용되는 3강을 끝낸 후 보너스 업적 포인트는 정신 스탯에 분배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똑똑.
잠깐 잠이 들었던 어스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전히 피곤했기에 이를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 되는 소리에 더는 무시할 수 없어 얼굴에 짜증을 덕지덕지 붙이고서 문을 확 열었다.
소란의 주범은 루시였다.
“잠 좀 자자, 잠 좀! 꼭두새벽부터 뭐하는 거야? 전쟁이라도 났냐?”
“아침부터 왜 성질이야. 그리고 지금이 몇 신데 새벽이래. 눈 삐었어?”
창문을 보니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는데 언제 해가 저리 떴을까?
그래도 짜증은 가시지 않았다.
“늦잠을 잘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안에서 반응이 없으면 그냥 가면 안 되냐? 꼭 그렇게 문짝을 두드려야만 했냐? 애가 매너가 없어, 매너가. 으하암.”
“수상하네. 밤에 뭐 하느라 아직도 한밤중인 거야? 외박했지? 외박하고 새벽에 들어왔지? 그렇지? 아하, 그런 거네. 엄마아빠한테 일러야지.”
고자질쟁이로 돌변하여 뛰어가려는 여동생, 그런 여동생의 뒷덜미를 냉큼 잡아챘다.
보통 뒷덜미를 잡힌 사람이 멈춰야 하지만 여동생의 힘이 워낙 좋다보니 오히려 몇 걸음 끌려가 버린 어스였다.
민망함은 왜 항상 자신의 몫일까?
“놔라, 좋은 말 할 때. 어디서 숙녀의 뒷덜미를 잡는 거야?”
“깨운 이유를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이유!”
“밥 먹으라고.”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내 단잠을 깨운 거야? 내참 어이가 없네. 그리고 외박은 또 뭐야? 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너 없는 말 지어내면 벼락 맞는다.”
콜 라이트닝 한 방 쏴줘야 할까?
그래야 두 번 다신 없는 말 지어내지 않을 것 같은데.
어스가 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하였지만 설마 자신의 오빠가 번개까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루시는 이에 콧방귀를 꼈다.
“내가 세 살 먹은 앤줄 알아? 그런 말에 벌벌 떨 것 같아?”
진짜 콜 라이트닝 한방 날려?
“그리고 머리에 그 풀때기는 떼고 말하는 건 어때?”
머리를 만지니 진짜 싱싱한 풀때기가 박혀 있었다.
보스와 싸울 때 일어난 돌개바람에 날린 풀때기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게 지천인데 고작 이거…….”
“지금 겨울이거든.”
그렇지, 지금은 겨울이다.
흔해 빠진 잡초도 보기 힘든 계절인 것이다.
움찔.
“그, 그…….”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이 겨울에 이렇게 싱싱한 풀때기를 대체 어디서 묻혀 온 거야?”
“닥치고 꺼져. 곧 내려갈 테니까. 엄마 아빠는 식당에 있어?”
“말 돌리는 거 봐. 진짜 이상하네. 뭐야? 뭔데? 뭐 있지?”
“있긴 개뿔. 얼른 내려가 씻고 내려갈 테니까. 내 음식도 시켜. 난 어제 먹던 그 메뉴로.”
여동생의 등을 떠민 어스는 냉큼 객실 문을 닫았다.
탕탕.
“진짜 뭐 있지? 설명 제대로 안 하면 엄마 아빠한테 이른다.”
여동생의 성격을 생각하면 쉬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더해 고자질까지.
딱히 잘 못한 건 없지만 귀찮은 상황에 놓이기 싫은 어스는 여동생이 입을 닫는 조건으로 100테스를 던졌다.
“주둥이 알지?”
“사랑해.”
돈의 힘이란…… 이래서 남자들이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게 아닐까 싶다.
“꺼져. 소름 끼치니까.”
그러고 보니 여동생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 생애 처음 듣는 소리인 듯했다.
“진짜 소름 돋아 버렸어. 으으으.”
* * *
던전이 사라졌기에 어스는 가족들과 함께 구입한 주택으로 입주했다.
전에도 병사들이 많던 곳이 지금은 더 많아졌다.
던전 실종(?) 사건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여러 번 검문을 받아야만했지만 입주엔 문제가 없었다.
큼직큼직한 덩치의 가구나 침대는 전 주인에게서 구입한 상태라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건 주문하여 마당에 도착한 상태라 이를 풀어 배치하면 이사 끝이다.
“저기에 검은 소용돌이가 있었다니.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낸들 알겠어. 그나저나 이 집 진짜 좋네. 아들.”
“응.”
“이거 얼마 주고 산 거니?”
“150만 테스.”
떠억!
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였지만 반면 세 사람의 충격은 몹시 컸다.
고향 마을에서 150만 테스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는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물가가 제 아무리 비싸다곤 하지만 고작 집 한 채에 150만 테스라니.
“뭘 그렇게 놀라. 시세보다 싸게 사서 150만이야. 실제는 더 비싸.”
“얼마나?”
“예전엔 두 배.”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집이 좋아도 그렇지 300만 테스라니……. 그런데 그런 집을 150만에 샀다고?”
“검은 소용돌이 덕분이지. 지금은 보다시피 사라져서 본래 시세로 돌아갈 테니 우린 가만히 앉아서 150만 테스를 번 거야. 어때? 아들 안목 죽이지?”
던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산 건 도박이다.
하나 이 상황에 다들 놀라고 있었기에 어스가 어째서 던전 인근의 집을 산 것인지는 아무도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150만 테스가 준 무게감이 워낙 컸으니까.
“언제까지 놀란 붕어처럼 입만 움직일 거야. 빨리빨리 정리해야지 밤에 편하게 자지.”
어스는 가족들을 떠밀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어스의 가족들의 손엔 청소도구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