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금방이라도 사달이 날것만 같았던 던전의 변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덩치가 전보다 조금 더 커지고, 소용돌이 중심부의 불그스름한 띠가 전보다 한층 진해진 것을 제외하면.
포션을 과하게 복용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스킬을 남발한 때문인지 속은 메스껍고 머리는 수백 개의 자갈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것 같아 괴로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검은 소용돌이 중심부에 위치한 불그스름한 모양의 띠였다.
‘여기는 3개네? 뭐지?’
게른 산맥에서 발견한 던전은 띠가 5개, 국경 마을에서 본 던전의 띠는 2갠가 그랬다.
던전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혹시 저 중심의 띠가 아닐까?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몰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몸이 괴로웠기에.
“즉시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라.”
전령을 보낸 찰슨은 몸을 일으키고 있는 어스를 급히 부축했다.
“안색이 매우 안 좋습니다. 어스 마법사. 숙소를 내줄테니 거기서 쉬도록 하시오.”
“아, 아뇨. 그보다 제 가족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려 주세요.”
“그 몸으로 어딜 간단 말입니까? 여기 있으시오. 내 병사를 보내 그대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할 테니 쉬도록 해요.”
“그, 그럼 여기서 쉬겠습니다. 움직이니까 속이 다시 좋지 않아서.”
연방 헛구역질을 하는 어스를 보자 함부로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겠다 싶었는지 찰슨은 자신의 망토를 바닥에 깔아서 그를 앉혔다.
그러곤 병사를 시켜 화톳불을 그 옆에 두었다.
찰슨이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배려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이 모도 소실한 어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울고 있는 머리와, 언제라도 분출하겠다며 성을 내고 있는 속을 달래기 위해 억지 명상에 들어갔다.
당장은 이것 이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모든 걸 잊고 싶다는 간절함을 담아 명상에 매달렸다.
그래서일까? 그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던 마나 연공법이 그의 명상을 깊은 곳까지 인도하며 그의 몸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스를 배려한 찰슨 카멜은 긴장한 병사들을 다독이며 혹시 모를 사태를 우려하여 던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 저것은 룬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린 벌일까? 그도 아님 진짜 악마의 소행인 걸까?’
한편 뜻밖의 기연(?)을 얻은 어스는 포션 과다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완전히 떨쳐내고 무아경에서 한겨울 양지에 깃든 따뜻한 햇살에 몸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그의 기연을 시샘한 것인지 그의 무아경은 그의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가족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무아경에서 강제로 깬 어스는 순간 큰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 그 분노의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씨, 조금만 늦게 오지. 누구야? 누가 마차 빌려준 거야!’
* * *
한때 갈색 자작나무 마을이라 불린 곳에 들어선 요새.
토머스 마을 주민들은 던전이 출현하자 모두 이곳으로 피신했다.
어스의 가족들 역시.
이 모두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주민들 모두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는 천막에서 생활했고,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병영 하나를 비워 그곳에서 지내게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족은 장교 숙소를 하나를 배정받아서 쓰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특혜였다.
불만과 시샘을 살 수밖에 없는.
하나 누구도 이에 대놓고 불평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행크 아들이네.”
“아들이라니, 아드님이라고 해야지. 마법사님인데.”
“그, 그런가? 그런데 전에 봤을 때보다 인물이 더 좋아진 것 같지 않아? 옷도 좋아 보이고.”
“당연한 거 아냐? 마법사잖아, 마법사.”
“좋은 것만 먹었나? 키도 부쩍 큰 것 같지 않아?”
“걸음걸이도 힘이 넘치네. 전엔 비실거렸었는데.”
사람들의 수군거림 중엔 듣기 좋은 말도 있고, 귀에 거슬리는 말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좋은 말들이었기에 웃는 낯으로 간간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태도에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거 봤어? 행크와 엘이나가 자식 교육은 잘 시켰네, 잘 시켰어.”
“저래야지. 암, 저래야하고 말고.”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지?”
“무슨 일이긴 당연히 가족이 걱정돼서 한 달음에 달려온 게지.”
“효자네, 효자야. 에고고. 내 자식은 사고나 안치면 다행인데 말이야.”
부러움과 한탄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어스의 어깨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어스는 슬쩍 고개를 돌려 부모님의 표정을 살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두 분 모두 기쁨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지난 고생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위협적인 태도와 따돌림까지 싹.
어스의 가족이 도착하자 요새 사령관이 직접 나왔다.
그는 어스도 아는 인물이었다.
“오랜만이군, 어스 마법사. 안 본 사이에 훤칠해졌군. 하하.”
“오랜만입니다. 윌리엄 님.”
윌리엄 작슨 그는 피어스 남작령을 대표하는 무력 집단인 가시 표범단의 부단장이기도 한 남자였다.
또한 고블린 토벌대를 이끌었던 사령관이기도 했다.
윌리엄은 어스를 높게 평가하여 영주에게 천거하겠다는 제안까지 한바 있었다.
한마디로 괜찮은 관계다.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그런가?”
“진전이 있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아직도 용병 마법사로 지내고 있나?”
“아뇨, 지금은 모험가 파티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험가?”
“예, 해보니 제 적성에 딱 맞더군요.”
“모험가라면 많은 곳을 다녔겠군. 혹시, 다른 영지에서도 토머스에서 본 검은 소용돌이가 있던가?”
“그곳도 여기처럼 비상이 걸려 교단과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걱정이군. 먼 길을 왔을 텐데 내가 너무 잡아뒀군. 듣기로 몸이 안 좋다던데 들어가서 쉬게.”
윌리엄은 어스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전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어 대화는 여기서 끝냈다.
“몸을 추스른 뒤 찾아뵈겠습니다.”
“어스 마법사라면 언제든 환영이네.”
요새의 사령관까지 직접 어스를 마중 나왔기에 사람들의 부러움은 더더욱 커져 있다.
그런 이들이 시선을 뒤로한 어스는 가족들과 함께 그들이 임시로 지내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병사들이 머무는 숙소를 배정받은 것이라 일반적인 가정집과는 많은 점이 달랐다.
어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루시가 두 눈을 빛내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부단장님이랑 많이 친해? 오빠 몸이 안 좋단 말을 듣자 마차까지 내주시고,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와서 엄청 놀랐어. 그리고 모험가는 또 무슨 말이야?”
“오는 내내 한 질문만 백 개는 될 거다. 입도 안 아파? 그리고 나 환자야, 환자.”
환자 신공을 시전하자 엘이나의 제지에 루시는 입을 삐쭉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스 이리 와서 누워. 엄마가 스프라도 끓어 올게.”
“아냐, 됐어. 그보다 엄마아빠, 이사할 생각 없어?”
사람들은 검은 소용돌이의 정체를 모르지만 두 번이나 그곳을 경험한 어스는 던전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던전이라고 위험의 정도가 다 같은 건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그곳은 무조건 사지라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어스도 조바심을 태우며 그 먼 길을 무리해서 이동한 것이다.
“이사? 토머스 마을에 터를 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행크는 내켜하지 않았다.
반면 엘이나는 남편의 생각과 다른 듯 보였지만 생각이 많은 듯 듣기만 했다.
“혹시 돈 때문이라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백번 말하느니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크고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돈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왠 가죽 주머니? 가족들은 어리둥절했다.
그에 장난기가 동한 어스는 여동생 루시에게 가죽 주머니를 열어 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이 잔득 동했던 루시는 냉큼 달려들어 다섯 개의 주머니 중 하나를 열었다.
그 안을 확인한 루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엉덩방아는 덤이었다.
“오, 오…… 이, 이, 이…….”
“딸, 왜 그래? 혀라도 깨물었어?”
딸애의 반응에 놀란 엘이나는 루시가 연 가죽 주머니를 보곤 뜨악한 표정으로 두 눈만 껌뻑였다.
딸애에 이어 아내까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본 행크 또한 입만 벌린 채 ‘어어’만 연발했다.
가족들이 정신을 차리자 어스는 직접 나머지 주머니도 열어 내용물을 확인 시켰다.
“아, 아들 이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뭐야? 아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이 녀석아 네가 고향을 떠난 지 1년이 됐어? 2년이 됐어? 반년도 안 됐는데 이런 돈 주머니를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다섯 개나 갖고 있는데 아빠가 안 놀라고 배기겠어? 진짜 이상한 일 한 거 아니지?”
남편의 태도에 엘이나가 발끈했다.
“당신 우리 아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 어스가 그럴 아이라고 생각해? 정말 그런 거야?”
“다, 당연히 아니지. 아니지만…… 하아. 모르겠다. 아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불법 전혀 없는 순수한 내 노력의 산물이야.”
“마법사는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거야? 오빠?”
“모든 마법사가 그러겠냐? 오빠니깐 이만큼 버는 거지.”
저것 말고도 자신의 인벤토리에 800만 테스짜리 농장 문서가 있다는 걸 알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가족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건 차후 공개하기로 했다.
‘카멜 왕자의 말이 사실인지부터 확인해야겠지.’
만약 카멜의 말이 사실이라면 솔론 왕국으로의 이민도 고려해볼 생각이다.
좋은 왕 아래 불행한 백성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만간 던전의 실체는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카멜이 자국에 소식을 전하였으니 그들에 의해서든, 아님 각 왕국이 파견한 원정대가 귀환하여 알리든 그렇게 알려질 것이다.
그리되면 사람들 사이에 퍼진 미지에 대한 공포심 역시 지금보단 많이 줄어들 것이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 몬스터가 사는 게 당연하듯 시간이 지나면 던전 역시 당연하게.
‘내 입장에선 던전이 딱히 나쁜 건 아닌데.’
여전히 돈 주머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곤혹스러워 하는 가족들.
어스는 생각을 접고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이사를 주장했다.
“세상에 나가 보니까 까막눈은 사람 구실 할 수 없더라고. 나? 나는 천재적인 머리로 글은 마스터했어.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루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했으면 해.”
짐승이든 사람이든 자식은 최대의 약점이었고, 이 약점을 공략당한 행크와 엘이나는 이주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네가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써.”
“나도 네 아빠 생각에 동감이야.”
“칫, 오빠가 남도 아닌데.”
부모님이 흔들리고 있다.
이를 포착한 어스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래, 루시 말처럼 우리가 남이야? 남 아니잖아. 가족이잖아, 가족! 그리고 아들이 효도하게 기회 좀 줘.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사회적인 내 체면도 생각해주고 말이야. 루시 인생도. 그러니까 내 말대로 이사 가자. 내가 번듯한 벽돌집에 마당 딸린 이층집에다, 아빠랑 엄마랑 함께 일할 수 있는 가게도 차려줄 수 있어.”
아들의 말에 부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쉬어. 이사는 나중에 생각하자. 급할 건 없잖아.”
안 쉬어도 되지만 앞서 엄살 부린 것도 있어 어스는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무아경의 맛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밤새 노력했음에도 그 맛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아침 햇살과 함께 한 줄기 깨달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상태창의 확인!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의 경험이 상태창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몸 상태도 전보다 좋아진 것 같기도 했으니까.
‘멍청하게 진작 열어봤었어야지.’
어스는 자시의 머리통을 때리며 상태창을 열었다.
지금의 이 설렘이 설렘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