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지하 유적지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가디언의 씨가 말랐는지 파티를 직접 공격하는 무리는 없었다.
그 때문에 강화시킨 파이어 볼을 공격용이 아닌 생활용 난방용으로만 써야 했다.
관문을 뚫는 건 동료들이 거의 다 하고 있어 딱히 할 일이 없는 입장에선 소소한 일이나마 파티에 도움이 되었기에 그나마 덜 미안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좀이 쑤시는 건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일행의 건강을 책임지는 난방기(?)로서의 역할을 하다 보니 최종 관문으로 여겨지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게 마지막 관문일 거야.”
“페어몬트 진짜 이번이 마지막 관문인 거 맞죠?”
“어허, 맞다니까.”
“나 그 말 이번에 들으면 세 번짼데. 어스, 어스?”
“어? 왜.”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난방이 필요한 거야?”
“그게 아니고. 페어몬트가 저 관문이 마지막 관문이라고 하잖…… 야! 너 아직도 그 일로 삐져 있는 거야? 이제 그만 풀지.”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풀긴 뭘 푼단 말인가.
코는 아까 풀었는데.
“뭘 풀어?”
“몰라서 물어?”
“말해 줘야 알지.”
“카멜 님의 정체를 말해 준 건 우리가 널 진짜 동료로 생각했기에 모든 걸 털어놓았던 거야. 솔직히 카멜 님이 왕자건 아니건 까놓고 말해서 너한테 직접적인 피해가 있었냐? 없었잖아.”
카멜의 신분을 알게 된 이후 일행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딱히 그 문제를 언급하진 않았다.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룰을 프라이스가 침범(?)했다.
사실 이것도 프라이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나 참은 것이다.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한 듯 일행은 두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사태가 커지면 개입할 요량으로.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자 혼자 이상한 놈이 된 것 같아 어스는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신적인 피해는 피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피해자 아냐?”
“그래서 사과했잖아. 루리아는 진심을 알고 받아들였잖아. 왜 너만 꿍해 있는 거냐고? 네가 꽁치냐?”
꽁치? 그게 뭐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하지만 여기서 되물으려니 지켜보는 시선이 신경 쓰여 되묻지 않았다.
“나 꿍해 있던 거 아니거든. 이미 털어버렸거든.”
“그런 녀석이 몇 번을 말해야 대답하고 그러냐?”
그건 생각할 게 많아 서지 결코 꿍해 있었던 건 아니다.
프라이스가 이를 거론하기까지 그 건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마법사가 사색도 마음대로 못하냐?”
“진심이냐? 맹세할 수 있어? 부모님 걸고서.”
지가 전당포도 아니면서 왜 남의 부모님을 걸라는 건지.
“다 건다, 됐냐?”
“진짜? 그럼 방금 정신적인 피해는 뭔데?”
“꼬투리 잡을 심산이면 남자답게 한판 뜨던가.”
“봐봐, 여전히 꽁해 있는 거 맞네. 진짜 한판 떠?”
“응, 떠. 파이어 볼!”
세 번 강화한 파이어 볼 여섯 개가 어스를 중심을 위성처럼 떡 하니 자리 잡았다.
드디어 강화된 파이어 볼의 위력을 볼 수 있는 건가?
“미, 미친! 야! 지금 사생결단을 내자는 거야? 이건 아니지.”
놀란 건 비단 프라이스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몹시 놀랐다.
설마 어스가 저와 같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는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한 일행이 나서려던 그때, 어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건 조명이야.”
“저걸 누가 조명이라고 생각해? 협박이지.”
“나 협박이나 하는 입만 산 타입 아니거든. 귀찮게 그 짓을 왜 해. 그냥 날려버리면 간단할걸.”
솔직히 주먹다짐은 어스보다 프라이스가 한참 윗줄이다.
그러나 막상 싸우게 되면 또 이길 수가 없는 상대가 어스였다.
그 이유는 어스의 맷집 때문이었다.
“살벌한 놈. 네 똥 굵다 굵어.”
저건 항복이다.
어쨌거나 의형제를 맺은 사이 여기서 자신도 호응해 주는 게 맞으리라.
이 상황에서 프라이스와 치고받고 싸워 봐야 떨어지는 건 모양새다.
그리고 삐져서 앞서 준거 도로 달라고 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줄 수밖에 없으니 여기서 모른 척 넘어가야 한다.
상대의 체면도 적당히 살려주며.
“알았으면 됐고. 그런데 왜 불렀어?”
“여기가 마지막 관문이란다. 페어몬트가.”
“어?”
“마지막 관문이라고.”
“그 말 전에도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설마, 그것 때문에 불렀던 거야?”
“겸사겸사.”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네가 요즘 말수가 너무 없는데다, 우리랑 잘 어울리지도 않잖아. 이런 상황에서 저 관문이 진짜 마지막 관문이면…… 그래, 솔직히 말하마. 두 번 다시 우리 안 볼 생각이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걱정된 마음에 찔러 봤다. 에이씨. 이건 너무 구차해졌잖아. 그래도 내가 형인데.”
굳이 역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들은 카멜을 도와 골육상잔의 위험한 싸움판에 끼어들 테니까.
그 싸움에서 이기면 공신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지면 국가의 미움을 받게 된다.
설사 그 나라가 타국이라도 개인이 어찌 국가의 미움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국가도 좋고, 교단도 상관없이 미움을 감수하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끼어들기 싫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끝으로 어쩌다 함께 일하게 된 인연 정도로만 치부할 생각이었다.
‘저 둔탱이가 알아차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음. 알고 있다는 표정이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어스가 난처해하자 카멜이 다가와서 프라이스의 어깨를 툭 건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프라이스는 입을 몇 번 움찔거리다 돌아섰다.
“일단, 일에 집중하자.”
짝짝.
카멜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에 사람들은 관문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홀로 남게 된 어스는 착잡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루리아가 다가와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말없이 가버렸다.
같이 가자는 소리 한번 없이.
그렇게 스쳐간 루리아는 카멜과 나란히 서서 마지막 관문을 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는 페어몬트와 하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이스 녀석 때문에 더 초라해져 버렸네.’
* * *
페어몬트는 문틀에 특 튀어나온 수십 개의 돌출부를 신중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법칙이 있는 것인지 바로 옆에 있는 건 건너뛰기도 하고, 돌연 같은 돌출부를 연속으로 누르기도 했다.
그런 페어몬트의 손엔 문자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양피지가 쥐어져 있었다.
저 양피지는 격자무늬 바닥이 있는 방을 통과하면서 얻은 고문서였다.
참고로 격자무늬 바닥은 잘못 디딜 경우 추락하도록 되어 있는 마법 함정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페어몬트의 손이 가장 하단에 위치한 돌출부를 눌렀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오랜 세월 잠든 보물의 방이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여기, 미발굴 유적지라면서요? 바닥에 있는 저 발자국 저거 아무리 봐도 수백 수천 년 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나만 그래요?”
기뻐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보물로 꽉 채워져 있어야 할 방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옷이나 무기가 걸려 있어야 할 거치대, 고서로 채워져 있어야 할 책장, 황금이나 보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상자 모두가 헐벗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럴 리 없어. 내가 어떻게 알아낸 곳인데 이미 손을 탔다니…… 이럴 수 없어!”
페어몬트의 절규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페어몬트는 실의에 빠졌다.
다들 그를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깊이의 실의가 아니었다.
이미 손을 탔지만 그래도 푼돈은 남아 있었다.
고대 시절의 금화와 은화 십여 개.
‘기념품인가?’
달랑 이걸 손에 넣으려고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허탈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샅샅이 수색했지만 역시 텅~.
누군지 몰라도 알맹이만 알차게 털어먹었다.
“내부를 잘 아는 자의 소행이지 싶은데. 대체, 누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하들리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스캔과 탐지 마법을 마나가 바닥을 칠 때까지 시전하는 집중을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아니, 무섭도록 잔인했다.
고생의 대가가 고대 동전 몇 개뿐이라니.
우라질.
‘그나마 난 농장이라도 건졌으니까 쫄딱 망한 건 아니네.’
아니긴 개뿔.
앞으로 억울해서 밤에 잠은 다 잤다.
“하커, 그자들을 찾는 건 무리겠지?”
“바닥의 흔적을 보면 최소 몇 개월 전에 털린 것 같습니다, 카멜 님.”
“황당하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그나저나 몇 개월 전이면 물건이 풀려도 벌써 풀렸을 텐데. 그런 소문이 없는 걸로 봐선 처분하지 않고 갖고 있다는 소린데. 이건 일반적인 모험가 파티답지 않은 행동인데.”
“나가서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가서 페어몬트나 위로해 줘. 하들리도.”
하커의 등을 떠민 카멜은 한쪽에 서 있는 어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어스.”
“예.”
“결과가 이래서 미안하다.”
“카멜 님 탓은 아니죠. 물건을 가져간 도둑놈들이 나쁜 거죠.”
“그리 말하면 우리나 그들이나 다를 바 없는데. 흠흠.”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졌으니 돌아가야지. 그보다 전에 한 말은 어떻게 할래?”
“무슨?”
“아도니스.”
“빈말 아니었어요?”
“아닌데.”
“전 당연히 빈말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솔론의 왕자라서?”
“그야 아무래도 고귀한 신분이시니까요.”
“내 신분은 변하지 않겠지. 하지만 왕좌의 주인은 다른 사람의 것이야.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서 도저히 경쟁할 마음도 들지 않는 멋진 형님이 계시거든. 한땐 어떻게든 꺼꾸러뜨리고 싶었는데 내 그릇으론 도저히 안 되더군. 그래서 일찌감치 형님께 항복 선언하고 내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 받았어.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이 좋아. 왕자 카멜이 아닌 모험가 카멜이 진짜 사는 것 같거든.”
거짓말 같지 않았다.
거짓말하는 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맑았으며, 표정 역시 진솔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숙청당하지 않나요? 보통 그렇다고 들었는데.”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내가 지지하는 그분은 그런 작은 그릇이 아냐. 만약 그런 남자였다면…… 아니다. 이런 대화는 여기까지. 아무튼 함께할래? 이건 왕자 카멜이 아닌, 모험가 카멜로서 하는 제안이야?”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카멜 곁으로 모여들었다.
한동안 폐인처럼 생활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깊은 좌절과 빡침을 보여주었던 페어몬트와 하들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엄숙한 표정이다.
그런데 그 옆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바로 루리아였다.
그녀가 저 자리에, 저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건 이미 파티에 남기로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결정의 배경에 카멜이 있을까?
머릿속은 혼란했고, 감정은 파도쳤다.
욱한 마음에 주먹질까지 갈 뻔했던 프라이스, 그 일을 그새 까먹었는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어스에게 권유했다.
함께 하자고.
페어몬트, 하들리, 하커, 호커 역시.
루리아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저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어떤 의중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음이 움직였다.
크게.
하지만 이놈의 자존심이 뭔지 함께 하겠다는 말이 꼭 지는 것 같아서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땐 누군가 옆구리 쿡 찔러주면 좋을 텐데.
앞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그 일을 해줄 사람은 아마…… 있었다.
“함께해. 의형이 가는데 당연히 의동생인 네가 빠지면 돼? 돼? 안 돼? 안 돼는 안 돼는 거 알지?”
유치하기 그지없는 언어유희로 자신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프라이스.
“흠흠. 모름지기 남자는 한 입 갖고 두말하는 법이 아니라고 했어. 다른 이유로 함께하자고 했다면 거절했겠지만 앞서 내가…… 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사람 말하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서면 어떻게. 이봐! 이 봐들. 내가 간다고 하잖아. 아도니스로 카멜 파티의 파티원으로 말이야.”
나름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용기를 냈건만, 저럴 거면 처음부터 함께하자는 말을 말던가.
쪽팔리게 쫓아가면서 말하게 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혹시, 솔론 스타일?
“대답은 이미 들었는데 듣긴 뭘 들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이제 가야지. 꿀꿀한 마음도 달래고, 진짜 동료가 된 둘의 환영파티를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짜샤.”
“어스거든.”
“그래, 짜샤.”
“또 한 번 짜샤라고 하면 아까 못 다한 판 다시 까는 수가 있다.”
프라이스와 투덕거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은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그래서인지 카멜과 나란히 걷고 있는 루리아를 봤음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전처럼 억울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설마…….’
스윽.
“왜?”
에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절대! 무조건.
오싹.
프라이스와 더 있다간 큰일 날 것 같아 어스는 냉큼 달아났다.
다다다다.
“저놈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