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맡지 않아도 될 숙제를 자청해서 떠맡게 된 어스는 피곤을 이유로 일단 시간을 벌었다.
다들 출출한 상태였기에 그의 의견은 별다른 의심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맛있기로 유명한 음식점에서 구입한 음식, 나오자마자 곧장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기에 갓 나올 때와 같은 놀라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음식조차 전에 먹었던 그 음식이 맞나 싶을 만큼 지금은 맛이 없었다.
반면 어스에 대한 신뢰가 이미 하늘에 닿아 있는 사람들은 근심걱정 모두 다 내려놓고서 마치 소풍이라도 온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루리아 역시.
그런 그녀를 보자.
‘누나도 날 믿는군.’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줏대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어스, 내 동생 너 지금 표정이 어떤지 알아? 예술이야, 예술. 뭐랄까? 우수에 젖은 고독한 마법사 같아. 내가 여자면 반하고 말았을 거야. 이제 귀여운 미소년 인상은 지우고 지금처럼만 해. 그럼 꽃들이 알아서 모일 거야.”
어찌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탐지와 스캔의 대가인 하들리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던 숙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런데 의형이란 작자가 의동생 속이 타들어가다 못해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것도 모르고 저딴 소리를 하다니.
이참에 의형제는 없던 것으로 해버릴까?
욱하는 마음에 그런 결단을 내리려던 찰나.
“이건 내가 진짜 아끼던 건데. 너 준다. 가져.”
“봉투?”
“봉투 말고 그 안의 내용물을 봐야지.”
뭐지? 뭘까? 제 입으로 진짜 아끼던 거라고 했다면 필시 보통 물건이 아닐 텐데.
프라이스에 대한 반발심을 한쪽으로 치우고 봉토를 개봉한 어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라이스가 선물이라며 준 봉투 안엔.
꿀꺽.
“따, 땅문서?”
“정확하게는 농장 문서다. 헥터 왕국 건 아니고. 솔론 왕국에 있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누구냐? 정령사, 그것도 땅의 정령사다. 노임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그 농장 옥토야. 옥토가 뭐다? 작물이건 가축이건 키우면 쑥쑥 자라는 곳이다.”
“형님, 우리 왕국 사람 아니었어요?”
“모험가에게 국적이 어디 있어. 눌러앉아서 살면 거기가 고향이고, 조국이 되는 거지.”
애국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정령사 같으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조국을 저리 천대한단 말인가.
나라에서 받아먹은 건 없어도, 부모님이 등골 빠지게 일해서 번 귀하고 귀한 수입의 일부를 강제로 가져가는 나라지만 그래도 내 나라다.
그러니 고까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더라도 지키고 아껴야 하는 게 바로 조국이 아니던가.
어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애국심이 펄펄 끓어올랐다.
그래서 매섭게 한마디 해주려는데.
“내가 살 때 800만 테스 정도 줬거든. 2년 전에 산 건데 지금은 더 올랐을 거야. 최소 2배? 아니 3배가 올랐을지 모르겠네. 워낙 좋은 땅이니까. 경치도 좋고.”
“솔론 왕국은 가족 이민 절차가 어떻게 돼요?”
내가 정 붙이고 살면 그게 고향이고, 조국이지 아무렴.
“이번 일 끝나면 솔론으로 갈 거니까 그때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일사천리로 해결해 줄 테니까.”
“오! 외국 여행. 나 처음인데 외국 여행은.”
“그럼 같이 갈 거야?”
“당연하죠.”
“카멜 형!”
“왜?”
“어스 녀석 넘어왔어요. 이제 솔론 왕국의 국민이에요.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무조건이라고. 큭.”
뭐지? 덫에 걸린 기분은.
어스는 농장 문서와 프라이스 그리고 프라이스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카멜을 보며 의혹에 사로잡혔다.
“진작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네가 어려워할까 봐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카멜이 무게를 잡고서 말하였다.
이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그가 경박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그저 이런 분위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만인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나 볼 법한 느낌을 받았다.
앞서 한번 이런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도리아 하우든 영애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신분을 감춘 고위 귀족의 자제일까? 그런데 왜 위험한 모험가를 하는 걸까?
“귀족…… 이세요?”
어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카멜이 분위기를 잡자 루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음식을 내려놓고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분위기뿐이랴.
표정과 자세부터가 달라졌다.
이에 놀란 건 역시 그들과 함께 식사 중이던 루리아였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내 이름은 카멜 솔론. 솔론 왕국의 4왕자다.”
와, 어쩐지 아무리 성공한 모험가라고 해도 아니지 그걸 떠나서 일개 모험가 파티치고 전력이 상상 이상이었던 이유가 이제야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배신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다.
그런 상황인데.
‘왕족이라니…… 왕자님이라니…… 이게 현실이야? 동화야?’
그럼 이 상황은.
‘나 간택 받은 건가?’
끔뻑끔뻑.
간택 아닌데.
어스의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눈앞의 이 모든 상황이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
당연히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왕자님은 이를 오해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내 힘이 닿는 한 네가 솔론 왕국에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마.”
왕자가 내민 손.
저 손을 잡는 순간 출셋길이 열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왕자는 왕이 되지 못하면 제 목숨 부지하는 것도 힘들지 않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왕자들의 투쟁은 배움이 짧은 어스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실제 어스가 사는 헥터 왕국에서도 불과 10여 년 전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
다행히 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꽤나 혼란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이 없었다면 어스는 어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설사 어린아이의 꿈이라곤 하지만 워낙 구체적이다 보니 그 꿈을 예사로 보기 힘들었으니까.
그럼에도 어스에 관한 이야기가 교단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왕자들의 충돌이 어스의 마을에까지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흉흉한 소문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이처럼 어수선하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전을 고려해서 어스의 일을 교단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들불이건 산불이건 시작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그들도 잘 알기에.
“죄송하지만 솔론 왕국으론 못 갈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카멜 모험가 파티의 일원인 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모험가 파티!
어스는 이 단어에 유독 힘을 주었다.
이에 카멜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지었지만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속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좋아.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해 줘. 내 신분은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내심 증거인멸 당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던 어스는 그 말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이죠. 저와 루리아 누나는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거예요. 루리아 누나, 누나도 약속하죠?”
사내가 어찌 제 한목숨 구하겠다고 가녀린 아녀자를 버릴 수 있으랴.
경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스는 루리아를 챙겼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카멜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웃음이었다.
‘다, 다행이다.’
고비는 넘겼지만 더 이상 저들과 터놓고 지낼 자신이 없어졌다.
하물며 함께 아도니스로 간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뒤통수라는 건가?’
의형제까지 맺은 프라이스는 물론이거니와 파티에서 가장 많은 대화와 시간을 보낸 페어몬트도 더는 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루리아도 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그나마 솔론 왕국이어서 다행이지. 레오다니스였다면 어쩜 피를 봐야 하는 상황까지 갔을지도.’
오싹.
“아, 밥도 다 먹었으니까. 일해야겠네요. 참, 프라이스 형.”
“속이 답답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다가가자는 말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일을 진행시켰어. 그 덕분에 지금의 이 사달이 나 버렸지. 그런 점에서 내가 경솔했다. 너에게도 그리고 에휴, 카멜 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스, 이것 하나만 네가 알아줬으면 해. 카멜 님이나 우리 모두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야. 그것은 믿어줬으면 줬겠어. 그리고 속인 건 미안하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은 안 할 게. 내 말은 여기까지.”
프라이스는 진심을 담아서 말하였다.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이번 일만 기억에서 지우면 저들은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억을 어찌 임의로 삭제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전과 같은 마음이 되긴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좋아. 형이 사내답게 인정하고 사과했으니까. 농장 문서는 받을게.”
“어?”
“선물과 뇌물은 다른 거잖아? 설마, 농장 문서 뇌물이었어?”
“그, 그건 아니지.”
“선물이지?”
“어? 응.”
막상 대답하고 보니 뒤통수가 얼얼해진 프라이스였다.
곧 프라이스는 폭소를 터트렸다.
“너 진짜 대단하다. 마법사로서의 능력이나 마인드 역시 난 도저히 네 상대가 못 될 것 같다. 카멜 님 안 그래요?”
어스가 농장 문서를 돌려주지 않고 받은 행동은 경직된 분위기를 다소나마 풀어주었다.
설마 이 모든 게 어스의 치밀한 설계였을까? 이를 노린?
어쨌거나 어스는 어스대로 이득을 챙겼고, 분위기는 분위기대로 나름 잘 풀렸으니 상황만 놓고 보면 나쁠 건 없었다.
“그러게. 점점 더 어스의 매력에 빠져드는 기분이군. 확실히 농장은 선물이 맞아. 뇌물 아니고. 이건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그 농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제 그 문제는 접어두고 일에 집중하도록 할까? 난 파티장, 넌 파티원으로 돌아가서. 어때?”
이때가 아니고 언제 왕자를 형이라 부를 수 있으랴.
“물론이죠, 카멜 형.”
그리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왕자라는 줄이 있어 나쁠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알겠는가.
저 카멜이 어느 날 왕이 될 줄.
‘솔론에 왕자가 몇이나 있지?’
왕과 형 동생 하는 사이면, 설사 그 나라가 타국이라곤 해도 어스 입장에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득이다.
더구나 카멜의 편에 서서 참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확실히 이득 맞네.’
역시 부모님의 말씀이 맞았다.
자신은 똑똑한 아들이었다.
그나저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단서가 있어야 풀든가 말든가 할 텐데.’
* * *
일단 큰소리 탕탕 쳤으니 보기 좋게 성공해야 한다.
여기서 믿을 건 오직 자신의 운과 실력뿐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자신의 운은 나쁘지 않았다.
실력? 그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니 객관적인 지표를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여차하면 블링크로 빠져나올 수 있지.’
믿는 건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생명력의 효과 역시 믿고 있다.
남들은 칼에 찔리면 고통이 수반되어 정신을 못 차리거나, 몸의 감각에 문제가 발생하지만 어스의 경우에는 제 스스로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그 모든 문제에서 제외된다.
‘체력 스탯도 신경 썼어야 했는데.’
생명력 : 215/215.
부실해 보였지만 당장 체력 스탯을 끌어올릴 수단이 없는 이상 피해가 발생해도 215의 수치 이내에서 발생하길 소망하며 어스는 청동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 그냥 들어가는 거야?”
깜짝 놀란 프라이스가 어스의 옷을 잡았다.
무모한 듯 보였기에.
이걸 보면 확실히 자신을 걱정해주는 의형제의 모습인데.
‘그러게 왜 속였어.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던가.’
“준비는 마친 상태야.”
“조심해라. 하들리 형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면 엄청난 뭔가가 있을 거야.”
프라이스에 이어 다들 걱정의 말을 해주었다.
어스는 그들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인 뒤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잘 될 거야, 난 괴물 마법사잖아.’
문지방을 넘었다.
이를 넘는 순간.
‘윽……!’
엄청난 충격이 어스의 육체에 가해졌다.
그것은 그로서도 생소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