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어스가 보스를 잡겠노라 호언장담하고서 떠난 뒤 일행은 하피의 재침공에 맞설 준비를 하였다.
하나 그 조치가 무색하게도 하피의 재침공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 들어오게 된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나이 먹도록 어스 너처럼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녀석은 살다 살다 처음이다. 정말이지 넌 전설이 되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일행의 경탄에도 어스는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전설? 전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떠난 배지 싶었다.
언제 가능할지 모를 칭호의 활성화 전까지 5서클 마법사일 테니까.
‘대체 위그드라실은 누가 부순 거야? 양심도 없는 새끼. 어떻게 백 조각으로 부숴.’
하다못해 조각의 위치를 단정할 수 있는 지도나 아님, 단서라도 있어야 할 텐데 단서라곤 고작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단서라면 단선가?’
그러고 보니 하나가 더 있다.
조각에 가까이 가게 되면 가슴의 문신이 반응한다는 점이다.
어찌 이리 다 애매한지.
“천재는 오만하다던데 넌 떡잎부터 됐어. 사람이 겸손해야지. 아무렴. 하하. 참, 이번에도 마녀냐?”
“아뇨, 그리핀 비스무리하게 생긴 놈이었어요.”
어스는 자신이 물리친 보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노학자의 취미 중 하나가 몬스터 도감을 만드는 일이었다.
페어몬트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페어몬트.”
“왜?”
“페어몬트는 박학다식하고 경험도 많잖아요. 오랫동안 모험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사설 접고 본론부터 말해. 뭐가 궁금해서 그래?”
“정말 던전에 관한 기록물이 없는 거 맞아요?”
“내가 신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걸 다 알 수 있겠냐? 이번 일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알아볼 생각이다. 아도니스로 가려면 많은 준비를 해야 하니 그 안에 단서를 찾을지도 모르지.”
사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던전에 관해서 가장 열의가 깊은 이는 페어몬트였다.
다만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어 열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
“열심히 응원할게요.”
“응원만?”
“저 이번 일 끝나고 당분간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께 효도하며 지내려고요.”
“고향? 아도니스는?”
“아도니스로 가는 배편이 있는 곳이 테아노 왕국인데, 거기까지 가려면 대륙을 횡단해야 한다면서요. 거기다 아도니스 대륙으로 출항하는 배편도 일반인은 구하기 힘들다고 말한 사람은 페어몬트잖아요? 이런저런 준비만 하는 데도 엄청 걸릴 테고, 배편을 구해서 아도니스로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하면 못해도 수년은 걸릴 게 뻔한데 가기 전까지 가족들이랑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조금 힘든 면도 없지 않고. 아무튼 지금 생각은 그래요.”
다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도 아닌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을 리 만무하다.
어스의 말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뭐, 당장은 휴식부터 취하죠. 보스랑 한판 했더니 피곤하네요. 카멜 형 괜찮죠? 쉬었다가 가도?”
“어차피 이 날씨에 이동하는 건 무리야.”
이번 던전은 외부와 시간의 비율이 1 대 1인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설마, 이 눈보라가 며칠씩 계속 된 것이 아니라면.
일행은 곧 캠프로 방향을 잡고서 발걸음을 열심히 놀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싶었지만 장작을 넣어 두었던 공간 주머니에 장작 대신 던전에서 죽인 몬스터의 부산물이 있어 피우지 못했다.
“전엔 부산물 안 챙겼잖아요?”
“하피의 부산물은 귀해. 거기다 전엔 경황이 없어서 챙기지 못했는데 두 번째라 그런지 심적으로 여유가 되더라고 그래서 짬짬이 챙기다 보니 이렇게 쌓여 버렸네. 어차피 다들 마법이 걸린 로브나 망토가 있으니까 상관은 없겠지만 찬 공기가 문제군. 벌써 코안에 고드름이 생긴 것 같아.”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이렇게. 파이어 볼.”
성인 머리통 크기의 파이어 볼이 떡하니 등장하자 다들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렸다.
“미, 미쳤어!”
“터지면 다 뒤져! 얼른 해제해!”
사람들의 저와 같은 호들갑은 당연한 반응이다.
사방이 탁 트인 곳도 아니고 실내였으니까.
파이어 볼이 등장하자마자 한 명도 빠짐없이 지금 벽 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루리아 역시.
‘인간적이네.’
그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 어스였다.
“설마 자폭하려고 시전했겠어요. 절대 안 터지니까 걱정 마요. 이렇게 움직여도 멀쩡하다니까요.”
“어어!”
“저리 치워!”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
“내가 두 번이나 구해줬는데 다들 날 못 믿어요?”
“너 같으면 믿겠냐?”
“프라이스 형, 우린 의형젠데 이러면 섭섭하지.”
“장난도 정도가 있는 거야.”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내 말 한번 믿어 봐요.”
10분을 옥신각신한 끝에 파이어 볼을 모닥불처럼 쓸 수 있었다.
모두의 안락한 휴식을 위한 조치인데 칭찬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입이 마를 때까지 설득하고 나니 그제야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허락은 받았지만 다들 경계심을 지우지 못해 벽 쪽에 붙어 있었다.
그 덕분에 어스는 넓은 공간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다.
“어스.”
“예, 하들리.”
“마나 소모가 심할 텐데 괜찮아?”
“유지에도 마나가 들어가…….”
하들리의 눈치를 보니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비전이 있어요. 그 비전 덕분에 유지엔 마나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면 돼요.”
어스의 스승은 하들리나 다른 이들에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대마법사로 받아들여진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스와 같은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어스 역시 이를 알기에 매번 궁지에 몰리면 없는 스승을 팔곤 했으니까.
“피곤해서 저 먼저 잘게요. 심신이 지쳤는지 졸음이 오네요.”
그렇게 어스는 모두를 남겨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쿨쿨.
* * *
거센 눈보라가 걷히고 쾌청한 아침이 밝았다.
산중의 날씨는 심술이 심해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를 일이기에 일행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중간중간 몬스터를 만나면 하커와 호커가 튀어나가 처리하곤 했다.
가끔 루리아도 양해를 구하고 나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트롤도 보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트롤을 실제로 보니…….
‘별거 아니네.’
일전에 겪은 마녀의 자식이라던 회색 거인에 비하면 조금 작은 편이었기에 두려움에 몸이 경직되는 일 따윈 없었다.
트롤은 어스가 나서기도 전에 하커와 호커가 처리했다.
‘하커와 호커 형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사회적인 성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목숨을 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커, 호커 형제는 특이한 사람들이 분명했다.
어딜 가도 존중 받을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으로 이런 파티에 있다니.
두 형제가 처리한 트롤은 이전과 달리 부산물을 채취했다.
가죽, 피, 심장, 뇌, 힘줄 등등.
‘도축가로 나서도 밥은 굶지 않겠네.’
칼질을 잘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도축에 대한 경지도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에 마나 소드까지 쓰는지 두꺼운 뼈들이 쓱쓱 잘려 나간다.
깔끔하게 트롤을 처리한 일행은 다시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만큼 좁은 틈이 입구였다.
어린아이 하나 간신히 통과할 틈이었기에 곡괭이나 삽을 들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땅과 연관된 일에 있어 최적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노임, 길을 만들어 줘.”
땅의 중급 정령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 모습에 어스는 다시 한 번 소망이 생겼다.
정령 하나 분양받고 싶다, 간절하게.
* * *
얼어붙은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주 오래전 만들어진 통로였지만 당시의 건축술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세월의 흔적이 덧씌워져 보행에 불편이 있을 뿐 붕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튼튼하네. 앞으로 수백 년도 충분하겠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손전등을 쥐고 있었다.
마법으로 구동되는 것으로 저것의 개당 가격은 200테스다.
화재의 우려가 있는 촛불이나 기름을 원료로 사용하는 등잔 대신 사용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최장 5시간이 한계라 가성비가 떨어지는 제품이었다.
거기다 충전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라 다 쓰면 장식품 정도로만 쓸 수 있다.
이러니 금전적으로 구애받지 않는 부유층이 아니고선 엄두도 낼 수 없는 물품이었다.
여하튼 마법 손전등을 통해 어스는 다시 한 번 일행의 재력에 대해 새삼 놀랐다.
그 비싼 걸 대수롭지 않은 듯 막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개만 사용해도 될 텐데.
놀랍게도 한 번에 무려 4개나 사용하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모험가도 못하는 건가?’
사실 이는 카멜 파티가 특별히 부유한 파티였기 때문이지, 실상 대부분의 모험가 파티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 재력 한정이랴.
개개인의 능력 역시 카멜 파티가 압도한다.
아무튼 모험가 파티의 실상이 이러하다보니 용병들보다 모험가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모험가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모험가란 직업에 한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벼락부자였다.
중간에 쉬며 끼니를 두 번 해결하자 드디어 끝날 것 같지 않던 통로도 그 끝이 보였다.
그에 답답한 속이 뻥 뚫린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까진 운이 좋았어. 함정이 없었으니까. 이제부턴 그런 운을 바랄 수 없으니 다들 긴장해.”
카멜이 한 말이다.
그리고 저 말은 어스와 루리아에게 한 경고였다.
두 사람만이 이 파티의 유일한 초보 모험가였으니까.
잠시 휴식을 가진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인공 건축물의 흔적이 보였다.
크고 작은 건축물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과거의 멀쩡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부서진 상태였다.
어떤 건 터만 남아 있었다.
‘설마…… 개털?’
초입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만 이런 느낌인가 싶어 동료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자신과 같은 느낌은 없는지 경계와 이동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하 도시의 대로를 가로질러 이동한 끝에 웅장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다른 일행에 비해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하들리였지만 이곳에서 확연히 달라졌다.
“하들리.”
“맡겨둬.”
하들리가 선두에 섰다.
카멜과 하커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하들리의 경호에 돌입했다.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였다.
‘뭘 하려는 거지?’
어스가 호기심을 드러내자 옆에 있던 프라이스가 입이 근질거렸는지 묻지도 않는 말을 해주었다.
고맙게도.
“하들리 형은 탐지와 스캔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야. 하들리 형 수준의 마법사는 손에 꼽을 정도지.”
탐지와 스캔은 무속성 계열의 마법이다.
이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정통한 경지까지 이른 마법사는 드물다.
참고로 무속성, 혹은 공통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은 사람들의 실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건축, 마법 물건 등등.
그중 어스가 물처럼 마셔대던 마나 회복 포션 역시 공통 마법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연금술사가 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마법사가 제작하는 것이다.
아무튼 공통 마법이 돈이 되는 것이다 보니 마탑은 공통 마법 연구와 개발, 그리고 상품 개발에 지속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개인이든 단체든 돈은 필수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공통 마법을 시전하던 하들리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졌다.
표정만이 아니다.
“경계!”
경고를 날렸다.
그에 일행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곧 하들리가 경고한 위험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리빙 아머군.”
유적지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살아 있는 갑옷이었다.
현대의 마도학으론 재현이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그런 존재가 검, 창, 도끼를 휘두르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의 삐걱거림도,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놀랍게도.
‘입이 떡 벌어질 거란 프라이스 형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