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본 던전으로 추측되는 세계,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형은 앞서 경험한 던전과 유사점이 있었다.
구릉지와 숲으로 칼로 자르듯 반듯하게 나뉘어 있었다면 이곳은 황무지와 돌산으로 나뉘어 있었다.
느낌상 저 돌산에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열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실시간으로 추락중인 어스.
높은 나무에도 오르지 못했던 시절이 무색하게 어스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음에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스킬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그가 겁먹지 않는 이유였다.
인벤토리에서 마나 회복 포션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마신 어스는 또 한 번 블링크를 시전했다.
이번엔 허공이 아닌 지상.
2, 30초 만에 다시 어스는 예의 그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폼 나게 나타나고 싶었지만 숙달이 덜 된 건지 엉거주춤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카멜을 비롯한 일행이 그를 보고 우르르 몰려왔다.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당황했잖아!”
페어몬트의 잔소리.
“블링크일 리 없어. 블링크로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
여전히 어스의 블링크에 대해 깊은 불신을, 아니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는 하들리.
이후 어스는 미리미리 말하고 사라지라는 말을 일행들에게서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하나 놀라운 건 루리아도 한마디 했다는 것이다.
다 같은 잔소리고 걱정의 말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이들의 말은 귀에 안 들어오고 루리아의 말만 귀에 속속 박혔다.
이래서 잔소리는 엄마들이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스는 자신이 상공에서 본 돌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해 주변 지형에 대해서.
그에 페어몬트가 턱을 매만지며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첫 번째 던전의 구릉지는 일종의 대기실이 아닐까 싶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있는 이 황무지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대기실로.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의문은 말이야. 첫 번째 던전에서 만난 아귀들의 행동이야. 놈들은 대기실에선 불을 뿜는 강력한 수단을 행사한 반면 어째서 본 무대인 숲에선 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놈들이 화재를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당시 페어몬트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후 쭉 돌이켜 생각해봤는데 놈들의 행동이 흡사 머뭇거리지 말고 얼른 무대 위로 가라는 재촉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더구나.”
“음…… 듣고 보니 일리 있네요. 그런데 그게 중요해요?”
“뭐?”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앞서도 그랬듯이 보스를 잡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던전에서 우리 좀 형편없었잖아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어스 볼 낯이 없다니까요.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나름 답례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우리도 제대로 한번 해봐요. 업혀가는 건 그때 그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니까.”
프라이스의 미안한 마음을 담은 답례라는 말에서 어스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참 좋았는데.
‘이번에도 답례를 받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목표 의식이 보다 뚜렷해진 어스였다.
“돌산까지 거리가 멀어요. 도보로 이동하면 최소 이삼일은 걸릴 테니까 제가 가서 후딱 정리할게요.”
“너 혼자서 하겠다고?”
“그게 편해. 어차피 블링크로 이동할 거라 시간도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하고 있었지만 실제 어스와 마녀와의 전투는 그처럼 가볍지도, 간단치도 않았다.
스킬 시전 속도.
제때 구입한 블링크.
마나 회복 포션.
바로 위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중 단 하나라도 빠졌다면 그리고 잠깐이라도 실수를 저질렀다면 이 자리에 어스는 없었을 것이다.
“전투가 장난이냐? 그땐 운이 따라준 것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때와 달리 우리 모두 무사하니까 지금은 힘을 모아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카멜 형, 제 말이 틀렸어요?”
프라이스는 화난 표정으로 어스를 쏘아붙인 뒤 카멜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스, 나도 프라이스의 말에 동감이다. 전투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말도 있어. 물론 우리 모두 네 실력은 인정해. 그러나 변수를 고려한다면 함께 힘을 모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도 카멜과 프라이스의 의견에 찬성이다.”
페어몬트를 시작으로, 하커, 호커, 하들리, 루리아까지 모두 한편이 되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이상 어스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일게요.”
그렇게 그들은 하나가 되어 황무지 횡단 길에 올랐다.
“페어몬트.”
“왜?”
“던전이란 거 정말 전례가 없던 일이 맞긴 맞아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자주 겪는 것 같아서요.”
“우리 중 불행을 몰고 다니는 녀석이 있나 보지. 참고로 파티의 신참은 너랑 루리아라네. 크크.”
“지금 나랑 루리아 누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전자는 맞는 것 같은데. 후자는 아니지 싶다.”
“나요? 내가 왜요?”
“최근 네가 겪은 일을 떠올려 봐라.”
그 말에 어스는 말문이 막혔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각성하고 나서부터 일이 하나씩 터졌는데. 혹시…… 불행의 원인이 각성 때문일까?’
설사 그렇더라도 결코 이 힘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제 그림자를 어찌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거봐. 너도 반박 못 하겠지. 그러니 이번 일 끝나고 나서 아도니스로 바로 건너가자 가면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술사 만나서 굿하자는 소리잖아요.”
“기억하고 있었네. 크크.”
진담인지, 농담인지 아무튼 페어몬트의 말을 들어보니 아도니스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 때문은 아니다.
위그드라실과 엘프.
둘 사이에 연관성이 깊으니 어쩜 그들을 통해 위그드라실 조각을 입수할 수 있는 방법이나, 혹은 조각의 위치에 대한 단서를 그들에게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어 아도니스행을 마음먹었다.
* * *
돌산을 목표로 이동하던 일행의 전면, 땅울림과 함께 균열이 발생했다.
그 균열에서 칼, 도끼, 창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지진에 놀라고, 균열에 또 한 번 놀랐던 일행은 난데없는 병사들의 등장에 또 한 번 놀랐다.
아니, 그들이 정체에 기함했다.
“어, 언데드!”
“조, 좀비 같은데요.”
“무장한 좀비라니……. 살다, 살다 이런 건 처음이네. 새로워, 엄청.”
“페어몬트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땝니까?”
“그럼 울까?”
놀라긴 해도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어스는 페어몬트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넌 가만있어.”
앞으로 나가려는데 프라이스가 어스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왜?”
“땅에서 올라온 자, 땅으로 돌려보낸다. 이 일을 누가 더 잘하겠냐?”
프라이스는 얼른 말해 보란 듯 턱짓으로 어스를 재촉했다.
“한둘이 아닌데 괜찮겠어?”
“지켜봐.”
프라이스는 흡사 홈그라운드의 똥개처럼 온갖 개폼을 잡았다.
못 볼 꼴 본 사람처럼 뒤로 물러선 어스는 루리아 옆에 섰다.
다른 이들은 다들 지켜보겠다는 듯 무기조차 빼들지 않았다.
“노임, 묻어 버려.”
땅의 중급 정령 노임이 두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힘을 주자 지면에 균열이 발생했다.
균열은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괴성을 지르며 일행을 향해 달려오던 좀비 병사들이 그 균열에 떨어졌다.
지표 아래서 살이 터지고,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의 소리였다.
꽤 많은 수의 좀비 병사를 단숨에 처리했지만 적은 여전히 많았다.
“노임 그것밖에 못해?”
프라이스의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노임이 콧방귀를 뀌며 지표면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앞서와 균열이 더욱더 커지며 전방의 땅을 뒤흔들었다.
여파는 노임의 뒤에 서 있던 일행에게도 미쳤다.
이에 당황해 넘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짜 인생 편하게 사네.’
프라이스에게 힘을 보탤 필요는 없어 보였다.
힘이 부족해 보이지도 않고, 좀비 병사의 숫자도 대폭 줄어들어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녀석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댓 구가 전부였으니까.
저쯤은 파티에서 가장 약한 루리아가 나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루리아 누나가 어디 가서 약하단 소릴 들을 사람은 아닌데…….’
어쨌거나 프라이스의 활약(?) 덕분에 초반 범상치 않은 기세로 모습을 드러냈던 좀비 병사들이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칼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 하늘을 봐!”
하커의 외침.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일행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상반신은 인간, 하바신은 독수리의 그것을 닮은 하피 떼가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양손에 활을 쥔 모습이었다.
그냥 궁수도 무서운데 하물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궁수라니,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프라이스!”
자신의 활약에 잔득 고무되었던 프라이스는 기겁하여 노임에게 명령했다.
“캠프 만들어!”
수차례 해봤기에 그 한마디에 노임은 즉시 움직였다.
이번엔 작은 발로 땅을 탕탕 때렸다.
저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매번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어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놀랄 시간도 없었다.
날아오는 화살이 지척에 도달하고 있었으니까.
벽이 세워지기 전 화살이 먼저 도착했다.
하커, 호커 형제가 언제 뽑았는지 검을 휘둘렀다.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답게 그들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화살이 모조리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가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더 멋있었다.
화살을 막는 데 힘을 쓰는 건 두 쌍둥이 형제뿐만이 아니다.
카멜, 루리아도 힘을 보탰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아내자 드디어 흙벽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화살이 도착할 무렵엔 지붕까지 만들어졌다.
지붕에 무언가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오랫동안.
사면의 벽과 지붕,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에 잡혔다.
“라이트.”
정신을 차린 하들리가 마법을 시전하여 어둠을 몰아냈다.
“다친 사람 없어?”
익스퍼트 3명, 소드 유저 한명의 몸을 사라지 않은 노력 덕분에 부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첫 번째 던전은 여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란 생각이 드네.”
페어몬트의 말에 모두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사이 캠프에 접근한 하피들이 지붕을 부수기 위해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쿵쿵쿵-.
대체 어떤 것으로 후려치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을 만큼 울림이 묵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활대로 때려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해먼가?
아무튼 이로 인해 지붕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에 기겁한 프라이스가 노임을 재촉해 지붕을 보수했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계속 공격이 이뤄진다면 언젠간 지붕이 박살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 일행은 독 안에 든 쥐새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프라이스, 땅굴!”
카멜이 소리쳤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최선이다.
하지만 앞서 너무 힘을 빼버린 탓에 프라이스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무, 무리예요.”
어쩐지 처음부터 힘을 쏟아붓더라니.
사람이 생각을 하고 힘을 써야지.
프라이스의 비명은 일행의 귀에 사형선고로 들렸다.
“어스, 방법이 없어?”
하커가 소리쳤다.
방법은 진작부터 찾고 있는 어스였다.
직업 스킬(8/9) : 매직 애로우(+0/12). 파이어 애로우(+0/12). 파이어 볼(+0/12). 파이어 버스트(+0/12). 아이스 스피어(+0/12). 일루젼(+0/12).
콜 라이트닝(+0/12). 블링크(+0/12).
이 중에서 어떤 스킬을 써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제외, 제외…… 제외.
홀몸이면 캠프가 부서져도 문제없다.
최강의 도주기 블링크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찌 나 하나 살자고 동료들을 사지에 버려둘 수 있으랴.
‘일루젼이면 될까?’
지금으로선 일루젼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일루젼의 범위였다.
‘부족해, 일루젼만으론…… 어려워.’
“어스!”
“지금 생각하고 있으니까 재촉하지 말아요.”
눈이 슬금슬금 스킬 상점으로 향한다.
현재 보유한 코인은 만 삼천이 조금 넘는다.
빈 스킬 슬롯도 하나 남았는데.
이 금액으로 살 수 있는 건 5서클 스킬뿐이다.
젠장, 4만 코인만 더 있었어도 6서클 스킬을 구입할 텐데.
6서클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스로 뺨을 때렸다.
찰싹!
그에 놀라는 일행들.
하지만 어스의 눈엔 그들의 표정 따윈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명년 오늘이 동료들의 제삿날이 될지 모를 상황이기에 어스는 최선의 선택지를 찾기 위해 집중했다.
그렇게 집중한 끝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 스킬이 보였다.
‘될까? 가능할까?’
더 이상은 머뭇거릴 수 없었다.
하들리의 라이트 마법이 밝히던 내부에 조금씩 외부의 빛줄기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자신의 무기를 빼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진지하고 비장한 모습이었다.
“어스, 기회 봐서 탈출해.”
“루, 루리아 누나?”
“어스, 루리아 말 들어.”
“그래도 다행이네 막내가 살아서. 하하.”
“하커 형, 우리도 젊어.”
“어스보단 늙었잖아. 그러고 보면 페어몬트는 여한이 없겠어요. 지금 죽어도.”
“아도니스 대륙을 밟고 싶었는데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각오해야겠군. 어스, 만약 내가 죽으면 나대신 아도니스에 가 봐. 가서 주술사도 찾아서 행운을 부르는 굿도 해보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어스는 5서클 스킬을 구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