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하늘은 유난히 쾌청했으나, 날씨는 겨울이 아닐까 싶을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물이 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불 안이 너무 포근하였기에 도저히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동면하고 싶다. 진심.’
하지만 더는 뭉그적거릴 수 없었기에 어스는 이를 악물고 침대라는 이름의 천국에서 몸을 일으켰다.
맨 발이 바닥에 닿자 한기가 이를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왔다.
물에 빠진 강아지가 몸을 털어내듯 온몸을 털어내며 인벤토리에서 로브를 집어 들었다.
막상 로브를 꺼냈지만 입을 수 없었다.
‘넝마가 따로 없네.’
그래도 기능은 남아 있으니 보긴 안 좋아도 입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차가운 공기에 몸이 얼기 전에 냉큼 로브를 입었다.
그런데 단 1의 온기도 로브에서 느낄 수 없었다.
로브의 수명이 다하면 부여 마법이 해제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밤새 운명을 다했구나.’
그래도 그렇지 1,500테스나 주고 산 로브, 그것도 명색이 마법 로븐데 조금 험하게 입었다고 수개월 만에 이렇게 쓰레기가 되는 게 말이 돼? 혹시, 색상이 아니라 품질 자체에 이상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나 이내 양심의 외침에 의심은 사라졌다.
‘하긴 그렇게 험하게 입었는데 멀쩡하면 마법 로브가 아니라 신의 로브라고 해야겠지.’
떠나보낼 건 떠나보내야 한다.
“그게 사내지. 사낸데…… 그래도 최소 1년은 버텨야 하는 거 아냐? 한두 푼도 아니고.”
로브를 가슴에 품고 한동안 울분을 삭히던 어스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이만 보내주기로 했다.
슈웅. 턱.
쓰레기통으로.
보낼 땐 깔끔하게.
잠시 묵념 후 돌아선 어스는 침대로 다시 이불로 기어들어 가 몸을 돌돌 말았다.
‘산행을 생각하면 로브는 필순데.’
두 번 다시 검은 색상의 로브는 만나기 힘들 것이다.
제작 주문이면 모를까.
아무래도 그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게른 산맥에 오를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비싸도 사긴 사야 할 것 같았다.
‘돈 벌긴 힘들어도 쓰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인생은 허무하다더니.
맥없는 모습으로 연방 한숨만 쉬는 그의 방문이 울기 시작했다.
똑똑!
“어스, 뭐 해? 안 갈 거야? 왜 이렇게 뭉그적거려! 빨리 나와.”
문짝이 부서져라 두드리고 있는 이는 외모와 달리 성격이 급한 프라이스였다.
“가, 간다고!”
“뭐야? 아침부터 왜 성질이야. 깨우러 와줬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내가 언제? 칫. 됐다, 됐어. 다른 사람들은?”
“다들 1층에 있어. 그런데 왜 그래? 간밤에 악몽이라도 꿨어? 얼굴이 죽상이네.”
안 써도 될 돈을 쓰게 생겼는데 그럼 웃으랴?
“내 악몽은 저기 있어.”
어스는 턱짓으로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수선할 거라며?”
“마법 기능이 아예 사라졌어.”
“오호. 그래서 내게 성질을 부렸군.”
“성질 안 부렸다니깐. 그냥 우울해졌을 뿐이야. 형도 생각해봐 고작 4개월 만에 1,500테스가 쓰레기통으로 갔는데 형이라면 괜찮겠어?”
“천오백? 마법 로브를 고작 그 돈으로 샀다고? 헐, 아, 아니구나. 색깔이 별로였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기분이 다운된 거였어?”
이리 말하며 오히려 실실 웃는 프라이스였다.
한 대 때릴까?
사람 치기 딱 좋은 날씬데.
어스는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마 프라이스에게도 질까? 아니, 지려나? 얼굴만 보면 이길 것 같기도 한데. 한 번 해봐? 아니다.
그러다 두들겨 맞으면 쪽팔림을 어찌 감당하랴.
나쁜 생각은 아웃.
“지금 놀리는 거야?”
“까칠한 놈. 에이, 기분이다.”
프라이스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공간 주머니에서 진한 연두색 마법 로브를 꺼냈다.
어스의 로브에 없던 수실로 된 무늬까지 박혀 있었다.
“그건 뭐야?”
“뭐긴 뭐야. 네 선물이지. 이거 마법 로브야. 가져.”
“선물? 설마 나 준다는 거야?”
냉큼 만져본 로브의 감촉이 상당히 좋았다.
평소 아껴 입었던, 현재 쓰레기통에서 안식의 길로 들어간 로브 따위완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디자인, 색상, 촉감 등등 모든 게 마음에 든다.
“이 형이 네게 목숨의 빚도 졌으니까. 이참에 갚는 셈 치고 주는 거야. 받아. 참, 이것도 받아라.”
로브도 감지덕지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부츠까지 건네는 프라이스였다.
“이건?”
“마법 부츠야. 색상이나 디자인을 보면 알겠지만 이거 세트다.”
“혀, 형. 아니. 형님.”
자고로 어른이 주는 건 사양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프라이스가 변심할까 봐 그 자리에서 냉큼 입었다.
그러곤 한걸음에 거울 앞에 섰다.
대충 껴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간지가 좔좔 흘렀다.
여기에 후드까지 쓰고 보니 좔좔이 아니라 간지가 폭발했다.
선물 받은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프라이스도 이에 크게 만족했다.
“참, 로브와 부츠 각각 네 가지 마법이 부여된 거야.”
그 말에 어스는 기함할 정도로 놀랐다.
마법 부여 2개의 물품과 3개의 가격 차이는 거의 10배가 난다.
2와 3개의 차이가 이 정도인데, 하물며 4개라면?
꿀꺽.
말문이 막힌 어스의 모습에 껄껄 웃던 프라이스는 부여된 마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체온 조절, 클린, 복원, 충격 완화가 걸려 있어. 험하게 쓰지 않는다면 수선 걱정은 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이, 이렇게 좋은 걸 정말 나 줘도 돼?”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러니 오히려 약소한 거야.”
“그런데 형은 왜 이런 걸 사용하지 않았어?”
“난 활동적인 옷차림을 선호하는 편이라 로브같이 걸리적거리는 건 별로 거든. 그나마 부츠는 괜찮은 데 신고 벗기가 귀찮더라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이 멋진 로브와 부츠를 사용하지 않았다니.
‘저 형…… 정체가 뭐지?’
아무튼 프라이스의 개인적인 취향과 게으름으로 인해 자신에게 이런 보물급의 마법 물품이 오게 된 것이기에, 어스는 프라이스의 취향과 게으름을 속으로 찬양, 또 찬양했다.
“잘 입고, 잘 신을게.”
“선물이니까 팔아먹진 말고. 그리고 그거 시중에서 구하기 힘들어. 유적지에서 얻은 거거든. 크크.”
이러면 또 이 물품의 가격이 달라진다.
대폭!
‘이러면 내 재산을 몽땅 털어도 사기 힘든 거 아냐?’
현재 어스가 가진 현금만 물경 48만 테스에 이른다.
이 액수는 평범하게 생활하는 4인 가족의 경우 자그마치 160개월 동안이나 생활할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런데 그런 고가의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는 프라이스의 배포라니.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형님이다.
‘저 형이랑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겠어.’
갑자기 온 세상이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옆에 돈 많은 형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프라이스 형, 우리 의형제 맺을까?”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프라이스는 생긴 거와 달리 시원시원한 성격이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 이제부터 우린 형제다.”
* * *
프라이스에게서 선물 받은 마법 로브와 마법 부츠를 차려입고 어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자 동료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중에서 가장 큰 반응을 보인 이는 하들리였다.
“프, 프라이스 그거 내가 사겠다고 했잖아?”
“하들리 형, 형도 알다시피 던전이라는 괴상한 세계에서 어스가 아니었다면 나나 형,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저건 어스에게 선물로 준 거야.”
물욕이 거의 보이지 않던 하들리마저 욕심 낼 정도의 마법 로브와 부츠라니, 새삼 프라이스의 선물이 더 대단해 보이는 어스였다.
하긴 유적지에서 나온 물건인데.
‘이건 죽어도 안 뺏겨.’
하들리가 욕심낸다면 생사대결도 마다치 않으리라 단단히 작심한 어스는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라이스의 말에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눈길에 담아 잠시 보내는 것으로 미련을 떨쳐낸 듯 보였다.
프라이스의 말에 흔들린 건 비단 하들리만이 아니었다.
“이런 말 듣고도 모른 척하면 아무래도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어스.”
“예, 호커 형.”
“너 창술 좋아하니까 내가 간간이 지도해 주마. 소소해도 내 형편이 그래서 말이야.”
나쁘지 않다.
호커는 무려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다.
그런데 그런 실력자가 왜 기사가 아닌 일개 모험가로 살까?
그러한 의문은 사실 호커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문은 아니었다.
그의 형인 하커 그리고 카멜에게도 해당된다.
아직 그들이 모험가를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묻지 않았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나, 취향이 다르니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어서 한번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그때 들은 대답은 낭만 때문이라고 했다.
어스는 이를 농담으로 여겼다.
낭만 때문에 번듯한 포장길을 내버려 두고 위험하고 험난한 비포장 길을 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죠.”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건 행운이다.
마법 하나 배우는데 짧게는 몇 개월에서 수년, 혹은 그 이상 걸리는 일반적인 마법사와 달리 어스에겐 그런 제한이 없었기에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흠흠, 그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다른 이들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지 몸으로 때우려는 하커, 호커 형제였다.
굳이 두 명에게 배울 필요는 없었지만 뭐든 부족한 것보단 버리는 게 있어도 넘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어스였기에 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런 그럼 난 뭘 줘야 하지……. 아! 그렇지. 어스 너 포션 다 썼다고 했지? 어차피 파티 자체적으로 포션을 구비해야 하는데. 이참에 필요한 포션을 선물하마.”
포션을 책임지겠다는 파티장 카멜.
‘뭐지? 설마…… 이 모든 순간이 꿈은 아니겠지?’
슬쩍 허벅지를 꼬집어보니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불어내는 어스였다.
“포션 사는 데 나도 그에 보태도록 하지.”
페어몬트는 안 줘도 되는데.
그래도 준다니 굳이 만류하진 않았다.
어른이 주는 걸 받는 것이야말로 어린 사람이 갖춰야 할 예의니까.
하들리와 루리아도 덩달아 어스에게 줄 포션을 구입하는 데 돈을 보태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대박 선물 행진(?)에 어스의 광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자자, 이제 출발합시다.”
* * *
헥터 왕국, 왕도 외곽에 위치한 건물 지하 내부에 가면을 쓴 일단의 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표적이 중간에 샜습니다.”
“낌새를 눈치챘단 말인가?”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랬다면 흔적을 지웠을 텐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표적의 현 위치는?”
“소도시 버진까진 일정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계기가 있나?”
“그것까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표적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는 글리시아 가문의 여식과는 헤어진 건가?”
“질질 끌지 말고 신속히 표적을 처리한다. 표적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고 하니 일처리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져 좋을 게 없다는 건 너희들도 알 터이니 긴말하지 않겠다. 현장에 나가 있는 루비오 대장에게 전하도록. 새해 전에 처리하라고.”
상석에 앉은 가면인은 통보를 끝으로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에 남은 가면 무리는 서로를 일별한 뒤 곧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그 시간 어스는 자신을 향한 위험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프라이스가 준 선물에 흠뻑 빠져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