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루리아가 가져온 천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글쓴이는 카멜이었다.
글의 내용은 어스를 비롯해 두 사람에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그들이 충격 받은 이유는.
“숲에서 나갈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돼요?”
“카멜의 장난이라고 생각해?”
“그런 아니지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여기 온 건 말이 되고?”
어스와 페어몬트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흉흉한 울음소리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소리는 이들에겐 익숙할 대로 익숙한 소리였다.
“아귀네요.”
참고로 숲에서 나갈 수 없는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바로 숲에서 살생을 한 경우이다.
이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인들까지 해당된다.
카멜이 남긴 천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차피 버린 몸, 처리해야죠.”
“별수 있냐. 아님 우리가 잡아먹힐 텐데.”
페어몬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지팡이를 힘껏 움켜잡았고, 루리아는 말없이 검을 빼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쥔 검은 기존에 쓰던 장검이 아닌 공간 주머니에서 단검이었다.
‘하긴 장검은 마음껏 휘두를 수 없는 환경이지.’
특히 그들이 위치한 곳이 더 그랬다.
“사방이 포위되면 안 되니까 저쪽 나무를 등지고 싸우죠.”
루리아의 말에 어스와 페어몬트는 일언반구도 없이 따랐다.
세 사람이 후방을 지켜줄 나무 앞에 도착하자 수풀이 쫙 갈라지며 그 안에서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의 아귀들이 뛰쳐나왔다.
그 수가 만만치 않았다.
‘약이라도 빤 거야? 눈이 왜 저래?’
그렇지 않아도 불편하게 생긴 놈들이 눈까지 이상하게 뜨고 있으니 더 소름 끼쳤다.
만만치 않은 놈들의 숫자에 일행 모두 긴장했다.
하지만 놈들을 등지고 달아나는 건 자살행위였기에 다들 필사의 뜻을 세웠다.
전투의 시작은 어스의 매직 애로우가 장식했다.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괴악한 소리를 지르며 짓쳐들던 아귀 12마리가 그 수에 맞춰서 날아온 매직 애로우를 얻어맞고서 일제히 뒤로 날아갔다.
딴엔 날아오는 매직 애로우를 쳐내겠다고 팔을 휘둘렀지만, 그에 막힌 매직 애로우는 단 한 발도 없었다.
지력 스탯에 투자한 효과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뭐 그리 중요하랴.
아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돌겠네. 매직 애로우!’
남은 마나 전부를 매직 애로우로 치환하여 날렸다.
힘차게 날아간 열한 발의 매직 애로우는 정확히 그 수에 맞춰 적의 머리수를 줄였다.
죽은 놈도 있고, 살아 있는 놈도 있다.
알람이 들린 건 일곱 번, 그러니 넷은 부상을 입은 상태이리라.
‘마나 아깝게.’
한편 루리아와 페어몬트는 아귀 떼를 상대로 온 힘을 다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루리아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놈들이 목숨도 족족 날아갔다.
간결하고 깔끔한 솜씨였다.
반면 페어몬트는 힘으로 놈들을 찍어 눌렀다.
나이를 초월하는 체력과 힘이 실로 놀랍다.
두 사람이 놈들의 어그로를 확실히 끌어준 덕분에 어스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잠시일 뿐이다.
다시 어스는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파이어 볼이나, 파이어 버스트를 쓰고 싶었지만 이곳에선 사용할 수 없었다.
화재는 적아를 구분하지 않을 테니 사용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
‘저것들도 화재를 우려해서 불을 뿜지 않는 건가?’
겉보기엔 정신이 나간 듯 보였지만 실상은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나?
루리아와 페어몬트라는 인간 방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시로 매직 애로우를 날리던 그때, 어스의 뒤편 나무 위에서 아귀 두 마리가 그를 향해 그 높은 곳에서 겁도 없이 몸을 날렸다.
휙휙.
전방만 신경 쓰고 있었기에 어스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 말은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었다.
“위!”
마침 고개를 돌린 루리아가 이를 보고 그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에 놀란 어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생각처럼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매직 애로우가 그를 대신하여 움직였다.
힘차게 날아간 매직 애로우는 놈들을 격하게 마중했다.
명치와 목에 꽂혔다.
놈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힘을 잃은 두 개의 동체가 시간 차를 두고 바닥에 떨어졌다.
쿵쿵!
그제야 어스는 움직일 수 있었다.
“나, 난 괜찮아요. 루리아…… 조심해요!”
자신을 신경 쓰느라 빈틈이 생긴 루리아, 그 틈을 비집고 아귀 하나가 달려들었다.
작고 촘촘한 이빨을 자랑하며.
앞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몸보다 그의 매직 애로우가 더 빨랐다.
루리아의 다리를 노렸던 아귀의 입안으로 매직 애로우가 틀어 박혔다.
엉뚱한 것을 물게 된 놈은 두 눈을 부릅뜨며 뒤로 자빠졌다.
영원히.
눈빛으로 어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루리아는 검을 고쳐 잡고서 다시 놈들을 베기 시작했다.
금방 안정을 되찾은 루리아는 철의 방벽이라도 된 듯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들게 만들었다.
이쪽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에 반해.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나보다 페어몬트의 움직임이 확연히 둔해졌고, 이로 인해 그는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페어몬트의 목과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던 아귀 두 마리가 매직 애로우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에 페어몬트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인사할 겨를도 없었기에 페어몬트는 입술을 악물고서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순간은 힘차고 쾌속했지만 몇 번 휘두르자 다시 느려지는 지팡이였다.
‘이래선 안 돼.’
페어몬트가 무너지면 루리아 혼자서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
한 방향만 틀어막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모를까 후방을 제외하면 3면이 노출된 상태다.
더구나 일부 몬스터는 나무를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저게 무슨 의미인지 방금 당해 봤기에 안다.
‘불나방도 아니고.’
놈들은 자신의 부상이나 죽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약 이를 두려워했다면 애초 나무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매직 애로우를 날리며 방법을 찾던 어스의 측면으로 유난히 빠른 발을 가진 아귀 하나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엔 누구의 경고도 없이 이를 알아차린 어스, 하지만 피하기엔 놈이 너무 빨랐다.
아니, 그가 느렸다.
민첩(1.1).
어쩜 이리 빈곤한지.
발만 빠른 게 아니라 놈은 손도 빨랐다.
나름 피한다고 피했지만 어스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그만 눈을 찔리고 말았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아귀.
그리고 그 미소를 향해 침을, 아니 주먹을 내지른 어스.
퍽!
어스의 주먹이 아귀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다.
힘(1.2).
민첩 스탯보단 그나마 0.1 높은 힘으로 가격했다.
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싣기에는 자세가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솜 주먹이다.
하나 놈이 허공에 뜬 상태라 그 주먹에도 놈은 뒤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주먹에 맞은 것보다 엉덩이가 더 아픈 듯 놈은 제 엉덩이를 감싸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구겨지는 존심이여.
‘우씨. 매직 애로우!’
어스는 매직 애로우에 감정을 실어 날려 보냈다.
눈에는 눈!
푹-!
“끼이에에에엑!”
눈을 공격당한 놈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곤 이내 죽었다.
그 소리에 장내는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어스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싸우세요.”
아귀를 향해 한 말은 아닌데.
아귀들이 더욱더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소중이(?)를 터트린 것도 아니고 눈알만 터트렸을 뿐인데.
‘미쳤나?’
아무튼 이 상황은 오래 끌면 아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루리아와 페어몬트는 현상 유지만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수시로 매직 애로우를 날리며 고심 또 고심하던 어스는 스킬 상점을 열었다.
그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그의 눈에 4서클 스킬 하나가 쏙 들어왔다.
저걸 구입하면 5서클은 더 멀어질 텐데.
아니, 그건 괜찮다.
세상에 널린 게 몬스터니까.
문제는 코인으로도 구입할 수 없는 스킬 슬롯이다.
‘곧 죽어도 칭호를 포기할 수 없겠어.’
어스는 두 눈 질끈 감고서 4서클 스킬 일루젼을 구입했다.
부디 이게 효과가 있기를.
“내가 신호하면 뒤로 빠져요!”
“무, 무슨 소리냐? 헉헉.”
“……?”
“닥치고 빠지라면 빠져요. 백수까지 살고 싶으면. 셋 하면 뒤로 빠집니다. 알았죠.”
어스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지 않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어스가 셋을 세자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빠졌고, 그 틈을 향해 어스는 일루젼을 시전했다.
그러자 일루젼 스킬에 영향을 받은 아귀들이 돌연 몸을 돌려서는 제 동족을 공격하며 삽시간에 동족상잔의 현상이 벌어졌다.
“뭐 해요? 달려요!”
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일루젼을 한 번 더 뿌리고서.
다다다다다다.
그런데 자신보다 늦게 출발한 루리아와 페어몬트가 왜 눈앞에 있는 건지.
‘내가 느린 게 아니라 저들이 빠른 거야.’
또 한 번 무너지는 존심이여.
“굼벵이도 너보단 빠르겠다.”
좀 전만 해도 숨이 넘어갈 만큼 헉헉거리던 늙은이가 맞나 싶을 만큼 달리기 실력을 보여주는 페어몬트의 핀잔에 어스의 존심이 또 한 번 상처 입었다.
* * *
마법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어스는 비공격 스킬에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스킬 슬롯이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번 일이 없었다면 쭉 그랬을 것이다.
‘좋은 건 알겠는데……. 하아.’
이럴 땐 평범한 마법사가 부럽다.
자신과 달리 그들은 배울 수 있는 마법의 숫자에 제한이 없으니까.
“어스, 넌 대체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는 게냐? 셋? 아님…… 넷? 혹시…… 다섯? 에이. 설마 그건 아니지?”
일루젼 스킬을 통해 일행은 무사히 아귀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환상을 보여줘 동족상잔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아쉬운 건, 자신의 스킬로 인해 상잔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1코인의 이득도 얻지 못한 점이었다.
파이어 볼이나, 파이어 퍼스트의 경우와 달리.
“지금 그게 중요해요? 흩어진 동료를 모아서 진짠지 가짠지도 모를 괴상한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야죠.”
“말투가 왜 그래? 내게 섭섭한 감정이라도 있어?”
“예?”
“말투가 삐딱하잖아?”
“에이, 페어몬트가 예민한가 보네. 제가 페어몬트에게 삐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나 연공법도 공짜로 받았는데. 절대, 아니니깐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가?”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 즉 방향성을 잡는 긍정적인 계획을 수립하자고요.”
“말을 돌리는 것 같은 기분인데?”
“아니라니깐 그러시네. 루리아 영애, 영애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일단 흩어진 동료들부터 결집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어스 씨가 말한 보스를 처리하려면 아무래도 우리들만으로는 부족할 테니까요.”
어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페어몬트는 금방 이를 잊은 듯 회의에 진지하게 임했다.
“우리가 그들을 찾으러 이동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카멜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래야겠지만 쪽지엔 그가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그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루리아의 신분을 고려한 페어몬트는 점잖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루리아가 먼저 질문에 대답했다.
“동의해요.”
“좋아, 그럼 어스 넌?”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만장일치네. 좋아, 그럼 우린 이곳에 캠프를 만들고 카멜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으로 하지.”
세 사람이 피신한 장소는 아귀 떼의 습격을 받은 장소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동굴이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엔 작은 폭포도 있어 식수의 수급이 용이했다.
“다 좋은 데 카멜 씨가 오기로 한 곳과 이곳이 동떨어진 게 마음에 걸리네요.”
“그 점은 걱정 마시게. 근방에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적은 쪽지를 살포할 생각이니까. 카멜이 그랬듯 말이야.”
“그렇다면야.”
페어몬트의 생각은 이 상황에선 가장 이상적이다.
“쪽지 살포는 제가 할게요.”
“어스 네가?”
“예.”
“넌 걸음이 느려서 안 돼.”
“그럼 페어몬트가 하려고요?”
“너보단 아무래도 내가 낫지 싶다.”
“페어몬트 잊었어요? 저 마법사라고요. 그리고 제 마법으로 다들 아수라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그러니 제가 하는 게 맞아요.”
어스의 의견은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그만 혼자 보내기엔 마법을 제외한 스펙(?)이 워낙 형편없다 보니 페어몬트와 루리아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제가 어스 씨와 함께 행동하겠습니다.”
“루리아 영애가 나서준다면야.”
루리아와 단둘이 움직이는 건 나쁘지 않지만 마냥 이를 좋아할 수 없었다.
약골로 취급받는 걸 그 어떤 사내가 좋아할까.
‘힘이랑 민첩 스탯의 효율은 왜 그따위야?’
업적 포인트를 투자해도 정신, 체력, 지력 스탯의 10분의 1이 영 불만인 어스였다.
“자 결정은 했으니 오늘은 이만 쉬자고.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도 없네. 허허.”
페어몬트의 말에 세 사람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올 수 있는 좁은 동굴 입구를 적당한 크기의 돌과 나뭇잎으로 막아 놓은 다음 몸을 뉘었다.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다들 체력이 한계까지 방전된 상태였기에 다들 기절하듯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