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경험치와 코인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이를 좋아할 수 없었다.
‘포션을 대량으로 매입했어야 했는데.’
한 푼이라도 더 싸게 사고 싶은 욕심에 매번 차후로 미룬 결과 어스가 보유한 마나 회복 포션의 수량은 하급 21개, 중급 1개가 전부였다.
하급 포션 하나당 200의 마나를 즉시 충전할 수 있다.
이를 파이어 볼로 치환하면 84회다.
참고로 중급 마나 회복 포션의 경우에는 한 번에 즉시 충전되는 마나의 양이 1,000으로 마나 총량이 230인지라 나머진 버려진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앞서 자유 마을에서 즉흥적으로 행했던 물에 희석하는 방법을 통해 버려지는 마나 없이 온전히 1,000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어스는 포션으로 총 104회 파이어 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귀의 숫자를 생각하면 104회란 수치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말과 다르잖아요!”
페어몬트가 끌고 온 아귀의 숫자는 앞서 말한 숫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덕분에 당초 계산과 맞지 않은 포션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에 어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내가 직접 확인했어야 했는데.”
“불안하게 왜 그래? 혹, 포션이 떨어진 게냐?”
어떻게 되어 먹은 놈들인지 아귀는 제 눈앞에서 동족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폭사당하고, 불에 타죽어도 겁을 먹고 도망가긴커녕 오히려 더 밀고 들어왔다.
전진만 있고 후진은 아예 모르는 놈들 같았다.
처음엔 놈들의 그러한 성향 덕에 신나 휘파람까지 불었던 어스는 마나 회복 포션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자 지금에 와선 불안감이 휩싸였다.
남은 놈들의 숫자가 몇인지 그것만 알아도 불안감의 크기가 줄어들 텐데, 아쉽게도 출입구는 하나뿐인지라 정찰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이면 저도 얼마 못 버텨요.”
“그럼 어쩌냐?”
“어쩌긴요. 포션 다 떨어지면 박 터지게 싸워야지.”
“하아, 명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겠네.”
마법사로서의 어스는 기대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괴물이다.
소문처럼.
하지만 전사로서의 어스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소린 말고요.”
“내가 안 하게 생겼냐? 그보다 자연 회복력은 어때?”
“완전히 회복되려면 10시간이 필요해요.”
“뭐?”
“10시간요.”
다른 마법사라면 엄두도 못 낼 일, 이렇게 떠들면서도 파이어 볼은 기계처럼 협곡 입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기도 안 찰 노릇이었지만 보통의 마법사와 어스를 비교하는 건 애당초 포기한 페어몬트는 이제 그러려니 했다.
“다른 건 다 사람 놀라게 만들더니 그건 왜 그리 느린 거냐?”
어스에게 생명력과 마나 회복량은 시간당 10퍼센트 고정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아니, 기대하는 건 하나 있었다.
바로 마나 연공법이다.
문제는 돈이 있어도 마나 연공법은 구입할 수 없었다.
“나도 답답하다고요.”
“혹시, 네 스승이란 작자가 네게 마나 연공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뭐냐? 너 정말 마나 연공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냐?”
“예.”
페어몬트는 경악했다.
어스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씨앗도 뿌리지 않았는데 열매를 맺은 나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자질이 마나 연공법의 부재를 메워 버린 유형인가? 이게 말이 돼?’
이게 아니고선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전혀?”
“예, 전혀.”
“어이가 없네. 어이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결과가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이를 어찌 부정한단 말인가.
페어몬트는 흥분한 마음을 가누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파이어 볼이란 화끈한 방어벽(?)에 막혀 기도 펴지 못하고 속속 쓰러지는 몬스터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를 보자.
‘그러고 보니 마법도 무슨 식은 스프 마시듯 쓰고 있구나!’
이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싶다.
‘터무니없는 괴물이군.’
페어몬트는 어스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추기로 했다.
수렁에 빠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만큼 살다 보니 신비를 신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도 배웠다.
쾅쾅쾅-!
끊임없이 날아가는 파이어 볼, 그때마다 줄어드는 몬스터.
‘덕분에 백세인생을 바라도 되려나? 허허.’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거면.
‘살려준 은혜를 생각하면 입 닦고 있을 순 없겠지.’
* * *
난데없는 폭음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한 루리아 글리시아,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마침 그녀가 있는 위치는 골짜기의 위쪽이었기에 아래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고, 거기서 그녀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단신으로 막아 내는 어스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스의 재능과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좀비가 장악한 마을 하나를 단신으로 정리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해당 마을의 규모, 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네크로맨서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렵긴 해도 정리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도저히.
‘아버지는 그가 이런 사람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그래서 내게 그런 제안을 하신 건가?’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가진 여동생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루리아는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지금껏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검을 잡았으며 이를 다듬기 위해 위험한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신히 견습 기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재능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그래서 열등감을 지우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내일은 지금보다 더 빛날 것이라 확신했기에.
하지만 그러했던 마음은 어스를 보자 확연히 꺾이고 말았다.
노력만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를 따라온 건 내 실수였을까? 아니면…….’
루리아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만 초라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골짜기 안쪽 공터를 향해 끊임없이 몰려가던 몬스터의 숫자도 확연히 줄어들면서 상황은 정리되고 있었다.
“루리아 영애! 무사했군요!”
되살아난 열등감을 달래던 루리아, 그런 그녀에게 미친 재능충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무사했는가?”
“페어몬트 씨도 무사했군요.”
“루리아 영애는 이곳에 며칠 정도 있었나?”
“열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열흘?”
“예. 그런데 그건 왜?”
“듣고 놀라지 말게. 이곳과 바깥세상은 시간 왜곡이 있네.”
“시간 왜곡?”
“저 녀석 말로는 우리가 들어가고 나서 30분 정도 있다가 들어왔다는군. 그런데 녀석과 우리의 시간이 완전히 달랐네.”
페어몬트의 설명에 루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림 속 세상의 공간도 놀라운 일인데, 그것도 부족해 시간 왜곡까지 일어났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스 씨, 정말인가요?”
“예, 저도 페어몬트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거예요.”
어스의 말에 루리아는 나직이 침음하며 페어몬트를 보았다.
“페어몬트 씨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셨나요?”
“여기 떨어진 이후 내내 도망만 다녔네. 영애도 보았겠지만 아귀가 보통 몬스터인가? 어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승에 있었을 걸세.”
“아귀?”
“저 녀석에게서 들은 거야. 실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몬스털세. 참, 그리고 이곳이 던전이라고 하더군. 이것도 녀석의 말일세. 흠흠, 루리아 영애는 혹시 던전이란 곳에 대해 알고 있나?”
“처음 들어보는 단어네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어스를 향한다.
의문을 품고서.
‘그냥 입 꾹 닫고 있어야 했는데.’
생각 없이 뱉어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자 어스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흩어진 동료를 찾고 나서 여길 빠져나가야죠.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현실이란 카드를 빼들었다.
이 카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긴,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참, 루리아 영애는 어느 방향에서 왔는가?”
“전…….”
이제 막 도착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니 회의는 주체는 두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열띤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분 어스는 조용히 상태창을 활성화했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32).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2/100).
생명력 : 210/210.
마나 : 230/230.
인벤토리 : 1(+2).
스탯 : 힘(1.2). 체력(23). 민첩(1.1). 지력(9). 정신(27).
직업 스킬(5/9) : 매직 애로우(+0/12). 파이어 애로우(+0/12). 파이어 볼(+0/12). 파이어 버스트(+0/12). 아이스 스피어(+0/12).
업적 포인트 : 2.
코인 : 4,869.
아귀 떼를 거의 마무리할 무렵 레벨을 하나 더 올릴 수 있었다.
받은 업적 포인트는 루리아의 합류로 분배하지 못했다.
‘코인은 반절도 모으지 못했네.’
아쉬웠지만 던전 최초 입장 보상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지 바깥세상이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어스, 어스?”
“예, 페어몬트.”
“휴식을 취한 뒤에 숲 쪽으로 가볼 생각이다. 루리아 영애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우리와 달리 그들은 숲에 떨어진 것 같아.”
“음, 그럼 쉬었다가 가죠.”
흩어진 동료만 모아도 굳이 5서클 스킬 구입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익스퍼트급 검사 셋, 3서클 마법사 하나, 그리고 중급 정령사 한 명이 있으니까.
거기에 자신까지 가세하면 마녀도 큰 문제는 아니리라.
“참, 루리아 영애. 마나 회복 포션은 저 녀석에게 넘기게.”
“마나 회복 포션요?”
“다행히 루리아 영애가 갖고 있는 게 있더군.”
이번 전투로 어스는 가진 포션의 절반 이상을 사용하고 말았다.
지형적인 이점을 살렸음에도 예상보다 많이 쓴 것이다.
이는 아귀의 숫자를 적게 본 결과였다.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전투는 어스에겐 고스란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가 만점의 전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 있어요. 어스 씨.”
루리아가 어스에게 건네준 마나 회복 포션은 6개였다.
개수는 적었지만 상급 1개, 중급 5개로 이를 받은 어스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을 넘어선 고품질의 마나 회복 포션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하급 포션으로 계산하면 35병의 가치를 가진다.
물론 이는 마나 회복 포션을 물에 희석하여도 문제가 없는 어스에 한해서지 다른 이들에겐 결코 아니다.
“검사인 루리아 영애께서 왜 이렇게 많은 마나 회복 포션을 갖고 있는 거죠?”
“제 욕심이라고 해두죠.”
“아무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어스 씨.”
“도움? 당연히 도움이 돼. 내가 증인이잖아. 허허.”
간만에 루리아와 시선을 교환하여 설렜던 어스는 페어몬트가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 기분을 망치고 말았다.
그래도 페어몬트 덕분에 수백 마리의 아귀들을 처리했으니 그를 미워할 순 없었다.
“참, 어스.”
“예.”
“뭐야? 그 불퉁한 표정은?”
“제가 언제요?”
“언제? 방금.”
“시답잖은 말은 그만하고 왜요?”
“갑자기 내키지 않네.”
“뭐가 안 내켜요?”
“마나 연공법.”
“……?”
“너 마나 연공법 배우지 않았다며? 내 그래서 오래전에 입수한 마나 연공법을 주려고 했는데 네 표정 보니깐 아무래도 없던 일로 해야겠다.”
마나 연공법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모를 일이라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마나 연공법을 손에 넣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어스에게 있어 이는 가뭄의 단비이자,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넙죽 엎드리기엔 자존심이 뭔지.
“흠흠, 전 페어몬트를 조, 존경합니다. 몸도 좋으시고, 지식도 많으시고……. 이, 인품도…….”
“얍삽하긴. 크크. 됐다, 됐어. 인석아. 안 그래도 주려고 했어. 마나 회복 포션처럼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지만 장차를 생각하면 너에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리고 나중에 잘 나가면 그때 내 이름도 한 번씩 언급해주고. 흠흠.”
이름을 언급해달라니? 뚱딴지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해할 수 없지만 마나 연공법에 눈이 먼 어스는 페어몬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얼른 손을 내밀었다.
“이건 유적지에서 구한 마나 연공법을 필사한 거다. 주석도 해놓았으니 읽는 데 문제가 없을 게야.”
생각지도 못했던 마나 연공법을 수중에 넣은 어스는 몹시 기뻐했다.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페어몬트의 말처럼 장차는 모르니까.
그리고 도움이 안 될 경우 여차하면.
‘내다 팔아도 되지.’
던전, 이곳은 어스에겐 꿀단지였다.
아낌없이 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