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끝내 1층 어디에서도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거실로 모였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다들 감조차 잡지 못했다.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저기.”
번개가 내려칠 때마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음영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어스는 루리아가 해준 이야기와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림이라고?”
“예.”
“루리아 영애가 본 그림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신비가 꼭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페어몬트의 말에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리아가 움직였다고 한 그림이 걸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실에서 그곳까진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일행은 금방 도착했다.
모두가 루리아를 응시했다.
당황할 법도 한데 루리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설명했다.
“초상화의 손의 위치가 달라졌어요.”
“손?”
“예,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본 손의 위치는 오른손이 왼손을 덮고 있었어요. 하지만 식당에서 나오자 손의 위치가 반대였어요.”
이를 본 사람이 루리아 하나뿐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스 네가 본 그림은?”
“제가 본 건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복도였어요.”
“일단 저 그림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페어몬트.”
카멜의 말에 페어몬트가 동의했다.
“뭐든 시도해 봐야지. 여기서 밤을 보낼 수 없으니까.”
초상화가 걸린 곳은 3미터 높이의 벽이었다.
하커가 먼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카의 손이 액자에 닿았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앞에서 하커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헉!”
“뭐, 뭐야!”
“혀, 형!”
눈앞에서 발생한 이 황당하고 기괴한 실종(?) 사건에 너나 할 것 없이 대경했다.
‘설마, 저 그림이 신비? 그럼 내가 본 건?’
그건 착각이었을까?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건 불길한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 열쇠는 저 그림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건 어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커가 사라지는 걸 본 이상 누가 저 그림에 손을 댈까?
“내가 해볼게.”
그는 호커였다.
“저 그림에 대해 좀 더 조사한 뒤에…….”
“카멜 저…… 음, 아니. 벽에서 떼어 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데 어떻게 조사해.”
하커와 호커는 유독 카멜의 말을 잘 따랐다.
카멜이 이 파티의 장이라곤 하지만 나이나 실력만 따지면 하커와 호커 형제가 우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카멜의 말에 고분고분한 건 예외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다 두 형제처럼 행동하면 모를까 오직 그 둘만이 그리 행동하였고, 이에 어스는 의문을 품고서 다른 이들에게 그 연유를 물었지만 그들 역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호커는 카멜이 자신을 붙잡을 것 같았는지 다짜고짜 몸부터 날렸다.
쏜살처럼 그림을 향해 날아간 호커가 그림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앞서 하커가 사라지듯 호커 역시 감쪽같이 사라졌다.
“카멜.”
“예, 페어몬트 씨.”
“아무래도 우리도 뒤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도 없지 않나?”
“하지만 모두가 다 함께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우리처럼 다른 사람들도 비를 피해 저택으로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지.”
페어몬트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모를 일이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남을 사람은 남고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그 생각도 나쁘지 않군요. 다들 페어몬트 씨의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실 분은 의견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택에 남는 것도 꺼림칙하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건 더 꺼림칙했다.
어스는 어느 쪽이 나은지 고민에 빠졌다.
“난 들어가겠네.”
페어몬트가 그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뒤이어 하들리와 프라이스도 들어가는 쪽으로 선택했다.
뜻을 밝히지 않은 인물은 이제 이 파티에 뒤늦게 합류한 어스와 루리아만이 남았다.
“그럼 우리만 들어가고 어스와 루리아 영애는 저택에 있는 게 좋…….”
“아뇨,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루리아의 결정에 어스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섭섭했다.
그의 섭섭함은 이내 루리아가 카멜을 좋아해서 그리 결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파티에 합류한 이후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기분이 확 상했다.
루리아도, 카멜도 꼴 보기 싫어졌다.
‘나만 우리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한 건가요? 루리아 영애.’
가슴 한쪽이 아리고, 뱃속 깊은 곳에선 섭섭한 감정이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질투심이리라.
어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엎지른 물을 아쉬워한다고 물 잔이 다시 채워질 리 없으니까.
그러니.
‘사랑은 놓쳐도 자존심은 지켜야지.’
어스는 이를 선택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어스.”
“예, 카멜 씨.”
“네가 남아서 외부인이 오는지 봐줘.”
카멜의 말에 어스는 반항심이 끓어올랐다.
사랑을 뺏어 가더니 이젠 명령인가?
고깝다.
하지만 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카멜은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일행을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시선 그 어디에도 어스를 향한 시선은 없었다.
외면 받는 기분이 들었다.
확 돌아서서 가버릴까도 싶었지만 졸렬하고 유치한 모습 같아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사람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 카멜이 먼저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페어몬트, 하들리, 프라이스가 모습을 감추었다.
여섯 명이나 잡아(?) 먹었음에도 그림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어스 씨.”
“…….”
“다녀올게요.”
그녀의 작별 인사에도 어스는 끝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이게 그의 최선이었다.
입을 떼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감정을 담아 버릴 것 같았다.
돌아선 루리아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림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림이 그녀를 거부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림은 루리아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삼켜버렸다.
홀로 남은 어스는 그제야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뭘 꼬나봐! 못생긴 아줌마!”
그림 속 귀부인을 향해 쏟아냈다.
그런데 그의 그 말이 기분 나빴던 걸까?
귀부인의 눈동자가 도르르 움직이더니 어스를 매섭게 직시했다.
오싹.
깜짝 놀란 어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몸은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날고 있었다.
그림을 향해.
“취, 최소! 아줌마 예…… 쁘다고.”
때늦은 고백(?)이었다.
* * *
그림에 잡아먹히자마자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자 뜬금없는 목소리에 방문을 받았다.
이에 어스는 놀란 마음을 진정할 사이도 없이 목소리에 집중했다.
-던전에 입장했습니다.
‘던전? 그게 뭔데?’
-첫 던전 입장입니다.
-최초 입장에 따른 보상이 지급 됩니다.
-1천 코인이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입장 던전 한정 경험치 2배가 적용됩니다.
-던전 보스 마녀 타라카를 처치하십시오.
-마녀 타라카 처치 시 지급될 보상 내역입니다.
-모든 스탯 +1 확정 증가. 1만 코인. 던전 탈출.
어스는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최초 입장으로 받게 된 보상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코인 : 1,439.
보상을 받기 전 그가 소지한 코인은 439였다.
그런데 지금은 1천이 더 늘어나 있었다.
‘여긴 뭐지? 혹시, 내게 힘을 준 무언가와 연관된 장소일까?’
자신에게 힘을 준 존재에 대해선, 그리고 지금 이 목소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민해 봐야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다.
그림 속 세상, 아니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확실한 단서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체 던전을 떠돌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 비하면 난 귀족이네.’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앞서 던전으로 들어간 일행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산림과 구릉지가 맞물려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던전 밖과 달리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쾌청하여 그에게 이질감을 선사했다.
‘당최 어떤 곳인지 짐작도 못 하겠네.’
어디부터 먼저 가야 할까? 산림지역은 내키지 않았다.
일단 시야 확보가 어렵다 보니 가까이 가기 전까진 일행이 근방에 있어도 식별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들이 꺼림칙한 숲속으로 들어갔으리란 보장도 없다.
숲이나 산은 보기는 좋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곤란한 일들이 산재한 위험한 지역임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안다.
그러니 시야가 확보된 구릉지부터 먼저 살피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마음이 구릉지로 기운 것처럼.
‘타라카라…… 흠. 내 힘으로 이길 수 있을까?’
마녀가 위험한 존재라는 건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들의 악행과 그들이 사용하는 힘에 대해서도.
바싹 말라 버린 입안을 수통의 물로 적신 어스는 걸음을 옮겼다.
산지보단 규모가 작고 평지보다 침식이 덜 되어 완만한 경사면과 골짜기를 가진 구릉지는 생각보다 힘든 지형이었다.
내려가고 올라가고를 몇 번 반복하자 어스는 금방 지쳐버렸다.
지친 걸음을 겨우 내디뎌 도합 9번째 구릉 정상부에 도착한 어스는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앞서도 그랬듯 이 정상부에서도 일행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산림지역보단 그나마 낫지만 구릉지 역시 완벽한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보니 시야가 닿는 구릉의 반대편이나 혹은 구릉과 구릉 사이의 골짜기의 경우 일일이 확인해야 하다 보니 지금처럼 무턱대고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일행이 던전으로 들어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보니 조금만 움직이면 그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볍게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예상과 다른 상황에 어스는 방법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마년데.’
그의 고심이 깊어지려는 그때, 지금껏 듣지 못했던 이질적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비명과 욕설이었다.
‘찾았다!’
어스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어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 곳에선 페어몬트가 작은 몬스터를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몬스터의 숫자는 총 일곱 마리로, 덩치는 고블린을 연상케 했다.
덩치만 보면.
하지만 그건 덩치만 그럴 뿐, 실상 놈들은 고블린과 전혀 다른 종이었다.
‘저건 대체 뭐지?’
역사학자이자, 모험가인 페어몬트는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 놈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몸체에 비해 기형적으로 가는 팔과 다리와 불룩한 배는 기아 상태의 어린아이를 보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그 가는 팔과 다리로 매서운 공격과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의아하게도 놈들은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페어몬트가 수세에 몰린 건 아니다.
화르르.
그를 수세에 내몬 건 바로 놈들이 입에서 뿜어지는 불줄기 때문이었다.
길거리 공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나 거리 공연장에서 자신의 재주를 보이는 그들과 달리 놈들은 어떤 도구도 없이 불을 뿜었다.
만약 저 불이 아니었다면 상대가 일곱이라곤 하지만 페어몬트의 지팡이에 다들 머리통이 깨졌을 것이다.
실제 그의 지팡이에 두 놈이 당한 듯 팔이 부러진 상태였다.
고통이 심할 텐데도 놈들은 그 팔을 덜렁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좀비라도 된 듯.
급히 불줄기를 피한 페어몬트, 하지만 그가 몸을 피한 곳에선 이를 기다렸다는 듯 세 개의 불줄기가 날아들었다.
더해 두 마리가 양쪽에서 그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손과 다리를 이용해서 낮게 달려오는 놈들이야 발로 차내던, 지팡이로 날려버리든 할 수 있지만 불줄기는 물리적으로 막거나 쳐낼 수 없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부상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닥친 페어몬트.
그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어스였다.
“매직 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