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룬 교단에는 총 72명의 추기경이 존재한다.
교황 다음가는 성직자인 이들의 영향력은 교단 내부에서 막강하다.
그런 추기경 중 한 명인 헤롯 추기경의 집무실로 선한 인상의 사제 하나가 들어서고 있었다.
헤롯 추기경은 사제에게 자리를 권한 뒤 상석에 앉았다.
조금은 딱딱한 표정을 하고서.
“전날 보고는 받았네. 자네가 직접 온 걸 보니 재가를 받기 위함인가?”
72명의 추기경 중 23번째의 지위에 있는 헤롯 추기경, 그런 그에겐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다.
1,800년의 전통을 가진 비밀 조직의 수장이다.
그리고 헤롯 추기경을 찾아온 사제는 헤롯이 수장으로 있는 비밀 조직 성전단의 대장 중 하나인 루비오 사제였다.
성전단 제13대 대장, 이것이 루비오 사제의 숨겨진 신분이다.
참고로 헤롯 추기경의 또 다른 신분과 성전단에 대해 아는 인물은 교단 내에서 교황 단 일인밖에 없었다.
“예, 각하.”
“으음. 확실한가?”
“정황 증거만 보면 80퍼센트 이상입니다.”
루비오의 말에 헤롯 추기경의 다문 입에서 얇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입에서 재가가 떨어지는 순간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룬을 위해 그리고 교단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였기에 헤롯은 한차례 두 눈을 질끈 감고 난 뒤 보다 단호한 표정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교란자의 신분은?”
“평민입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헤롯 추기경의 표정은 교란자의 신분을 듣자 안도감이 떠올랐다.
잠시.
“루비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우린 많은 피를 흘렸다. 그중엔 의혹만으로 유명을 달리한 자들도 적지 않다.”
뤼빅스 대륙엔 이런 말이 있다.
천재 단명!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들의 단명을 범인보다 뛰어난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범인은 평생을 노력해도 이루지 못할 것들은 그들은 손쉽게 이뤄냈기에.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단명한 천재 중 열에 아홉은 자연사가 아닌 암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암살을 주도한 단체는 바로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 바로 저 성전단의 소행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씨가 아깝다 하여 방치한다면 그 불씨가 자라 온 산과 들을 태울 것입니다. 데릭 가이어스라는 예가 있지 않습니까? 각하.”
성전단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물로 역사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교단이 개입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금기인 그의 이름까지 언급할 정도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하게 던진 헤롯 추기경의 말에 루비오는 단정한 앞섬을 재차 여미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 루비오를 빤히 응시하던 헤롯은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루비오의 요청을 수락했다.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히지만 이는 룬을 위해서이지, 결코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님을 명심하라.”
“룬의 미천한 종, 루비오 각하의 재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세간에 퍼진 천재 단명이 가장 고귀하고 엄숙하며 자애로워야 할 성전에서 결정됐다.
“참, 그의 출신지는?”
“헥터 왕국입니다.”
“헥터라…… 흠. 그나마 다행이군.”
헤롯 추기경은 그 말을 끝으로 본업으로 돌아갔고, 루비오는 밀물이 빠져나가듯 기척 없이 자리를 떠났다.
루비오가 사라지자 펜대를 놀리고 있던 헤롯이 잠시 이를 멈추곤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세상은 룬을 받드는 우리로 인해 이미 완벽하다. 안 그렇습니까? 룬이시여?’
* * *
어스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페어몬트는 그의 두 다리를 기존보다 강한 힘으로 때렸다.
짧으면 1분, 길면 5분 안에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어스가 30분이 지나도록 쓰러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아픈 모습이라도 보이면 좀 더 해볼 의향이 있었지만 그런 모습도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쥔 지팡이의 재질까지 의심했다.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는 어스의 모습에 질린 건 사실 페어몬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어스를 달리 보고 있었다.
‘맷집도 보통이 아닌데?’
‘분명 마법은 아니었어.’
사람들에게 묵직한 충격을 안긴 어스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페어몬트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분한 마음에 눈이 반쯤 돌아간 모습이었다.
그러나 평정심을 갖추어도 페어몬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 어스다.
하물며 흥분한 그 공격이 통할 리 없다.
오기와 자존심에 눈에 뒤집힌 어스의 공격은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허공을 찌른 창은 이내 뒤로 쑥 빠졌다.
어스가 뒤로 뺀 것이 아니라 페어몬트의 지팡이 끝이 명치를 깊숙하게 찔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페어몬트는 어스의 팔과 다리만 때렸다.
힘을 뺐다.
하지만 이젠 그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기에 완벽한 정리를 위해 급소를 노린 것이다.
물론 전력으로 내지르진 않았다.
끝이 뭉툭한 지팡이라고는 하지만 작정하고 찌르면 살가죽을 뚫을 만큼의 파괴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푹-!
“페, 페어몬트 씨!”
“미쳤어요!”
페어몬트가 갑작스레 어스의 급소를 찌르자 프라이스와 하들리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졌다.
루리아 역시 크게 놀라 지켜보던 자세를 풀고 황급히 앞으로 몸을 날렸다.
반면 카멜과 하커 호거 쌍둥이 형제는 페어몬트가 힘 조절에 들어간 것을 알아보았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켰다.
지금까지와 다른 제대로 된 타격!
그러나 어스는 다시 두 발로 일어섰다.
그에 어스를 향해 달려가던 루리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고, 페어몬트의 손속이 가하다고 소리쳤던 프라이스와 하들리는 놀란 토끼인 양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숨이 가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그, 그걸 맞고도 일어난다고? 대체…… 3서클이 맞긴 한 게냐?”
3서클은 결코 얕잡아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30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방어 마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천부적인 감각, 그리고 오랜 숙련을 통해 시전과 취소를 병행하여 마나를 아낀다면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건 외부의 공격이 드문드문한 경에 한한다.
지금처럼 분단 4, 50회의 타격이 쏟아지는 상황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도 초 단위로 마법을 시전하고 취소하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대련을 제지하지 않고 지켜본 것이다.
어스가 가진 저력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대련 중에 그딴 건 왜 물어요!”
한 대, 딱 한 대만 친다.
버럭 소리친 어스의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밖에 없었다.
기합과 함께 어스는 페어몬트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대련 초반보다 창의 궤적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페어몬트의 담금질(?)이 만든 결과였다.
어스에게 도움을 줄 요량으로 시작한 대련이다.
그러니 결과만 보면 최상, 아니 특급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결과에 대해 감탄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창술이 보다 성장한 어스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탁!
어스의 공격은 허무하게 막혔다.
앞서는 공격이 막히는 것과 동시에 얻어맞았다.
그러나 이번엔 30분간 무진장 맞으면서 몸에 쏙쏙 밴 감각이 발동했다.
휙.
‘피, 피했어! 내가 저 노인네의 지팡이를 피했다고!’
내심 환호작약했다.
동시에 몸을 회전하여 페어몬트의 다리를 노렸다.
맞아라, 제발 맞아라.
이건 호감이 있는 여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젊은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 자존심은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빡!
페어몬트의 지팡이를 정수리로 받았다.
기절하고도 남을 충격이다.
하나 이번에도 어스는 멀쩡했다.
고통? 당연히 그딴 건 없다.
그의 인생에 죽음은 있어도 맞아서 느끼는 고통은 없으니까.
이 역시 생명력이 가진 신비 덕분이다.
아무튼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버티지 못한 어스의 중심이 아래로 내려간다.
다행히 지속적으로 누르는 힘이 아니다 보니 어스는 굽혀진 무릎을 펼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페어몬트를 향해.
쿵-!
어스는 머리로 페어몬트를 들이박았다.
그에 페어몬트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서.
한편 공격을 성공시킨 어스는 재빨리 그와 거리를 벌렸다.
도도도.
치고 빠지는 전술!
실상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뒤로 빠진 어스는 페어몬트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가 우려하는 일은 없었다.
페어몬트는 말뚝처럼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 민망하게.
* * *
게른 산맥으로 향하는 여정 8일 차, 점심나절이 가까워지자 돌연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조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돌풍은 예상 밖의 상황이었기에 예민한 말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마차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엎어진 어스는 프라이스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갔다면!
“헉!”
화들짝 놀란 어스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뒤 자신의 검은 머리를 마구 비볐다.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야! 나도 놀랐거든.”
프라이스가 홍당무가 되어 버럭 소리쳤다.
“미, 미안.”
“쳇.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거린 프라이스가 마차 문을 여는 순간 마차 문은 바람에 의해 벌컥 열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프라이스는 그만 손을 놓았고, 문은 마차를 때리며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
“…….”
“…….”
“뭐, 뭐야?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람 때문이잖아!”
앞으로 4, 5일은 더 가야 하는 상황에서 마차 문의 일부가 부서지고 말았다.
바퀴가 멀쩡한 이상 이동엔 문제가 없지만 있던 문짝이 없어지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한숨을 내쉬며 프라이스를 스쳐 마차에서 내렸다.
“형.”
“왜?”
“이 마차 비싸지?”
“어? 응. 그런데 그걸 왜 묻는 거야?”
“알면서.”
“이, 이 녀석이.”
어스는 프라이스의 손을 피해 냉큼 마차에서 내렸다.
휘이이이잉.
시커먼 하늘과 세찬 바람에 길 양쪽의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허리가 뚝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날씨 한번 미쳤네.’
이런 날씨엔 마차를 모는 건 위험하다.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한바탕 쏟아질 것 같네. 비를 피할 장소를 찾아야겠어.”
하늘을 쳐다보던 페어몬트의 말에 일행 모두 동의했다.
그렇게 일행은 비를 피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서둘렀다.
때마침 적당한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뭐지? 왜 저런 저택이 여기 있는 거지?’
저택은 오랜 세월 방치 된 것인지 넝쿨과 흙먼지로 잔뜩 뒤집어 쓴 모습으로 보자마자 흉가가 연상됐다.
차라리 비를 맞고 이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꺼림칙했다.
하지만 어스의 동료들은 그의 기분과는 별개로 저택을 피난처로 정해버렸다.
‘뭐야? 나만…… 찜찜한 건가?’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진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만 멀뚱거릴 수 없던 어스는 겨우 발을 뗐다.
그러다 자신처럼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인물이 있음을 발견했다.
“루리아 영애.”
“네?”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혹시…… 무서우세요?”
본인도 찝찝해했으면서 루리아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잘도 연기하는 어스였다.
“아, 아뇨. 들어가요.”
당황한 루리아의 모습을 본 어스는 좀 전의 일도 잊은 듯 내심 웃었다.
그게 표정으로 드러난 건가?
루리아는 못마땅한 기색을 살짝 드러내며 그를 스쳐 저택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
루리아를 쳐다보던 그의 머리 위로 천둥과 번개가 쳤다.
쿠르르릉, 번쩍!
이에 화들짝 놀란 어스도 루리아를 쫓아 움직였다.
잰걸음으로.
그렇게 어스 일행 모두 저택으로 들어가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 더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넝쿨에 뒤덮은 낡은 녹슨 철문을 때렸다.
그 충격에 철문에 고정되어 있던 공고문이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공고문에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 글자를 제외하면.
「출입 금지.」
우르르릉. 쾅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