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환상적이고 멋진 어스의 공연은 광장의 모든 관심을 끌어당겼다.
저들을 위한 공연이 아니었지만 다들 기뻐하였기에 어스 역시 기분이 좋았다.
파괴와 살육이 아닌 기쁨을 주는 마법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의 관념에도 이번 일은 적잖은 여운을 남기는 일이었다.
어스와 루리아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뒤로하고서 광장을 나섰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정적이 찾아온 거리로 들어서자 그제야 루리아가 입을 뗐다.
“잘은 모르지만 어스 씨처럼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을 것 같아요.”
“아직은 부족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죠.”
진중하고 겸손한 그의 태도에 루리아는 발걸음을 멈추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을 흘리는 둥근 달을 담고서.
참고로 어스의 눈동자 색 역시 녹색이다.
연한.
“당신이란 사람은 재능 못지않게 심지도 곧군요.”
청춘남녀의 가슴에 불을 댕기기에 충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순간 누구라도 먼저 손을 내민다면 급격하게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연애는 이번 생이 처음인지라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저보단 루리아 영애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루리아의 표정에 잠시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표정이었기에 어스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예?”
“아니에요.”
루리아는 다시 예의 그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서 걷기 시작했고, 어스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의 분위기가 좀 전과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 들어서였다.
‘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 어스는 실수하지 않았다.
루리아의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었다.
마나의 재능을 타고난 여동생 소피에 비해 아무런 재능도 없는 루리아는 내내 아버지에겐 부족한 장녀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녀에겐 트라우마가 되어 오늘날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열등감 괴물!
루리아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열일곱이란 어린 나이에 그녀는 소드 유저의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이는 헥터 왕국에선 상위 20퍼센트에 해당한다.
십 대 중후반을 기준으로 했을 때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루리아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열등감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프면 소리치고, 슬프면 울어야 하는 법인데 그걸 못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온전히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 오스완드 남작의 영향이 적잖이 작용했다.
오스완드 가문의 가족사와 개인사를 어찌 어스가 짐작이나 할까.
평범한 평민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가.
어스는 보이지 않는 벽을 따라 걷는 심정이 되었다.
곁눈질로 루리아를 살피길 여러 번 하였지만, 도저히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루리아 영애는 정말 어려운 사람이구나.’
루리아에 대한 고마움과 동경심이 호감으로 자랐으나, 그 감정이 쌍방향이 아닌 일방이라 점점 답답함을 느끼게 된 어스였다.
그렇게 어색해진 감정에 불편함을 느끼며 걷던 중, 돌연 루리아가 어스보다 반보 앞으로 나가더니 검병을 잡고서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이에 화들짝 놀란 어스는 루리아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루리아가 경솔하게 행동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어스는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 입구로 파이어 애로우를 날려 보냈다.
쏜살같이 날아간 파이어 애로우는 골목 입구에서 딱 멈춰서 골목 안쪽을 밝혔다.
화륵, 화르르.
화살이 형상을 한 불꽃이 연방 성을 내자 골목에서 인영 하나가 가슴 어림 높이로 양손을 들고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영은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였다.
남자가 황급히 입을 뗐다.
“두 분을 공격할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마법사님과의 대화입니다. 아니, 제안이라고 해야겠군요.”
순간적으로 달라진 루리아의 태도에 내심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던 차에 등장한 불청객은 어스에겐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루리아의 등, 작지만 듬직한 그 등을 일별한 어스는 잠시 계면쩍은 표정을 한 뒤 앞으로 나섰다.
“날 압니까?”
“아까 광장에서 마법을 시현하는 걸 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실력이더군요. 그걸 보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제 일에 반드시 도움이 될 사람인 것을.”
이리 말하며 남자는 후드를 뒤로 젖혔고 그 얼굴을 확인한 어스는 저도 모르게 루리아를 쳐다보았다.
같은 남자가 봐도 혹할 정도로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루리아 영애.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어.’
전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조금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변함없는 그 표정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이에 살짝 고무된 어스는 보란 듯이 어깨를 쫙 펼쳤다.
그래 봐야 상대의 넓은 어깨에 비하면 한 줌이지만.
‘기분 나쁜 어깨네. 쳇.’
* * *
남자는 자신을 카멜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얼굴도, 어깨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스는 그와의 대화를 거절했다.
칼같이.
하지만 다급한 표정으로 이어진 카멜의 말에 어스는 거절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미발굴 유적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현재 어스가 취한 두 개의 위그드라실 조각 모두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는 카멜이란 남자가 말한 미 발굴 유적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발굴이 끝난 유적지였다.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조금 의외였다.
수십 년 전에 발굴을 마친 곳에서 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마법사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분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대박 아니면 쪽박인 건 아시죠?”
미발굴 유적지를 발견하고도 쪽박을 찬 인물을 알고 있었다.
바로 쌍도끼 여관의 주인 노바였다.
“후자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확신에 찬 카멜의 말에 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 자신감은 뭘까? 설마…….
“들어가 봤습니까?”
“더 이상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동참 전에는 어렵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큰일이다 보니 마법계약서도 따로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명색이 마법산데.”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마법사님.”
“괜찮아요. 그럼 발굴단 규모는 어떻게 됩니까? 유적지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유적지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그 역시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발굴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만만찮은 실력의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마법사님께서 동참해 주신다면 이번 발굴은 분명 성공할 겁니다.”
중개인(용병 길드)을 끼지 않으니 일이 성공하면 중개료를 따로 지출할 필요가 없으니 이점은 좋으나, 대신 뒤통수를 맞게 되는 경우엔 온전히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유적지는 탐나지만 이 점이 꺼림칙했다.
-개인 의뢰일 경우 의뢰주의 신분과 평판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개인 의뢰 잘못 맡아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용병들이 부지기수야. 그러니 거너 대장 말 명심해.
-목돈 만지려다 네 목 날아가는 수가 있어.
-다들 어스를 물로 보네. 어스가 어디 보통 녀석이에요. 마법사라고요, 마법사. 절대 꾐에 빠져서 제 무덤 파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하지 마세요. 저 니코가 보장합니다.
거너, 아그네스, 린다, 니코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여기 있었다면 이런 고민도 없을 텐데.
‘포기하기엔……. 미발굴 유적지잖아.’
어스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 루리아가 입을 뗐다.
“그 의뢰에 나도 참여하겠어요.”
“루, 루리아 영애가 왜요? 왕도에 가야 하잖아요.”
“늦어도 상관없습니다.”
루리아의 목적은 처음부터 왕도가 아닌 어스였다.
그러니 어스가 저 의뢰를 받고 중간에 내린다면 루리아 역시 왕도에 갈 이유가 없었다.
어스는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했기에 루리아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선 것이라 여겼다.
‘영애의 그 마음은 제가 안전으로 보답할게요. 꼭.’
귀족 가문, 그것도 영지를 가진 가문의 장녀가 동참한다면 보험하나 들고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호감이 가는 여자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다면 그녀도 자신을 다시 보게 되리라.
“카멜 씨, 들었죠? 루리아 영애도 받아주시면 저도 그 제안 받아들이죠.”
상대는 자신이 반드시 필요한 듯 보였다.
그래서 어스는 배짱을 부렸다.
만약 상대가 거절하면 그땐 분배율을 낮춰서 협상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카멜은 루리아의 참가를 거부하지 않았다.
“감이 좋은 검사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그렇게 어스와 루리아는 미발굴 유적지 발굴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카멜과 다시 만날 시간을 정한 어스와 루리아는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참, 수행원들은 어쩌죠?”
기사와 마부, 그리고 하인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어스의 걱정과 달리 루리아는 별일 아닌 듯 대답했다.
“그건 제게 맡기세요.”
참 든든한 말이었다.
* * *
다음 날 루리아의 수행원들은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고 글리시아 영지로 돌아갔다.
일언반구도 없이.
‘의외네.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물을 줄 알았는데.’
어쨌건 조용히 사라져준 덕분에 어떤 말로 상대를 납득 시킬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서 그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루리아 영애가 글리시아 가문에서 소외받는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하나에 하인 하나만 달랑 붙여준 것도 그렇고, 그녀가 수련 여행을 하던 시절엔 수행원 없이 혼자 돌아다닌 것도 어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루리아 영애가 무뚝뚝한 건 가정환경 탓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수컷의 보호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루리아에게 좀 더 잘해주기로 마음먹은 그는 여관 뒤뜰로 향했다.
그곳엔 루리아가 구슬땀을 흘리며 검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쾌속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녀의 검로는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사납고 흉포했다.
이는 어스가 보아온 루리아의 성격과는 완전히 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멍 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어스의 시선을 느낀 루리아가 검을 회수하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9월의 바람이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타고 허공으로 비산하는 땀방울마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맺혀 있었다.
화끈.
“몸을 풀도록 하세요, 어스 씨.”
마법사가 창술을 수련한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럴 시간에 마법서 한 권이라도 더 보는 것이, 명상을 하는 것이 마법사에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성장할 수 없는 어스에겐 그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마디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창술을 수련하는 이유를 천재의 취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넵.”
기합을 잔뜩 넣어서 대답한 어스는 죽은 게이브가 알려준 방식에 루리아의 조언을 더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짧으면 20분, 길면 30분이 필요한 이 스트레칭은 마치고 나면 난로에 오래 앉아 있던 것처럼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처음엔 시간 낭비 같았던 스트레칭이었지만 이제는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전과 달리 몸이 한층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때문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민첩 스탯이 0.1 상승합니다.
깜짝 놀란 어스는 상태창을 열었다.
정말이었다, 정말 민첩 스탯이 올랐다.
1이었던 수치가 지금은 1.1이 되어 있었다.
“움직임이 전보다 유연해진 것 같네요.”
“예. 어제보단 확실히 움직임이 좋아졌어요.”
“루리아 영애 덕분입니다.”
한껏 고무된 어스는 루리아가 만류할 때까지 창술을 수련했다.
몸이 가벼워진 만큼 그의 창술도 전보다 조금은 발전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루리아도 이를 언급하며 어스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