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쏟아지는 파이어 볼을 모조리 피하고 지쳐든 불길에 휩싸인 좀비의 주먹이 어스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단단한 바위도 단숨에 쪼갤 만큼 강력한 일격이 부실한 육체에 닿았으니 당연히 그 육신은 멀쩡할 수 없다.
하지만 어스의 신체는 시스템에 의해 특별한 신체로 변모한 상태였기에 놈의 강력한 일격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대신 물리적인 충격에 어스의 육체는 공처럼 쭉 날아갔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그의 육신은 이내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 상태로 수 미터를 더 미끄러진 뒤에야 멈추었다.
생명력 : 80/210.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한 결과 자그마치 130의 생명력이 단숨에 증발하고 말았다.
마법사로 각성한 이후 처음이었다.
세 자리 숫자의 생명력이 줄어든 것이.
만약 생명력의 투자를 등한시했다면?
‘주, 죽을 뻔했어.’
어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맺혀 노도와 같은 기세로 흘러 아랫도리를 적셨다.
어스를 공격한 놈은 더 이상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를 죽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놈은 제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밤하늘을 향해 포효를 터트렸다.
하는 모양새만 보면 좀비가 아니라 맹수를 닮았다.
놈이 제대로 방심하고 있는 걸 확인한 어스는 서둘러 치료 포션을 복용했다.
하급 치료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는 생명력은 1병에 50이라 세 병을 연속으로 마셨다.
완전 회복이 되어야 안심이 되기에.
생명력 : 210/210.
오버된 양은 증발.
돈이 얼만데.
이어 마나 회복 포션도 복용한 어스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한 뒤 여전히 죽은 척하며 놈의 동향을 살폈다.
어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 좀비는 강적을 물리친 맹수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힘찬 포효를 터트리고 있었다.
어스의 입장에서 놈의 방심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생명력과 마나 모두 최대치까지 회복한 어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파이어 버스터가 통할까?’
파이어 볼에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과 범위를 지닌 스킬이었지만, 불길에 휘감기고도 멀쩡한 놈을 보자 망설여졌다.
차라리 죽은 척 연기하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정은 운이 따라줘야 가능하다.
당장은 승리에 도취되어 이쪽은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 거기에 취해 있을 리 만무하다.
만에 하나 놈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려 든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지 싶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저딴 놈에게?’
절대 죽어 줄 수 없다.
어스는 놈이 화속성에 강한 면역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니 반대되는 속성의 패를 손에 넣어야 한다.
어스는 스킬 상점을 열었다.
지금은 스킬 슬롯을 아낄 때가 아니므로.
4서클 스킬의 가격은 3천 코인. 5서클 스킬을 목표로 아껴 둔 코인이 있어 구입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아이스 스피어였다.
한 번에 여러 개를 동시에 소환하여 적을 공격하는 얼음 속성의 스킬이다.
저 스킬은 4서클 스킬을 구입할 수 있는 코인을 모았을 때 그를 한참 고민시켰던 스킬이기도 했다.
남들은 마법 하나 익히는 데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
이후에는 숙련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어스에겐 그딴 과정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직업 스킬(5/9) : 매직 애로우(+0/12). 파이어 애로우(+0/12). 파이어 볼(+0/12). 파이어 버스트(+0/12). 아이스 스피어(+0/12).
이제 빈 스킬 슬롯 단 4개만 남았다.
이러니 더더욱 칭호 위그드라실의 계승자를 활성화하는 데 힘써야 한다.
구입하기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아쉬움이 그제야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당장은 불에 면역이 있는 좀비(?)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살아서 꽃길을 걷기 위해서라도.
결전의 의지를 다진 어스의 두 눈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내 계획을 틀어지게 한 벌을 꼭 받아내고 말겠다.’
무속성과 화속성 단둘뿐이던 스킬 트리를 3속성으로 변화시킨 어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아이스 스피어!’
200의 마나를 스킬로 치환했다.
2개의 아이스 스피어가 그의 전면에 즉시 출현했다.
그제야 이상을 감지한 좀비가 고개를 돌렸다.
‘뒤져라!’
2개의 아이스 스피어는 쾌속하게 놈을 향해 날아갔다.
그 속도는 그가 익힌 그 어떤 스킬보다 빨랐다.
어찌나 빠른지 그렇게나 민첩하던 좀비도 이를 보고도 피할 생각을 못 했다.
다급해진 놈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단창 크기의 아이스 스피어와 놈의 팔이 충돌했다.
두꺼운 얼음이 단숨에 깨지는 소리가 났다.
파이어 볼이나, 파이어 버스트처럼 폭발력이 없다 보니 아이스 스피어 맥없이 형태를 잃었다.
그러나 그냥 사라지진 않았다.
형태는 잃었지만 냉기는 남아 있었고, 그 냉기는 흡사 굶주린 맹수처럼 놈의 팔을 덥석 물었다.
그 순간 놈의 팔을 휘감고 있던 불길이 꺼지면 서리가 맺혔다.
꿀꺽.
그사이 마나 회복 포션을 연속으로 마신 어스는 아이스 스피어 두 개를 생성하여 놈의 몸뚱이를 향해 날려 보냈다.
콱콱!
섬뜩한 파육음이 연이어 터지며 놈의 전신은 두꺼운 서리에 뒤덮였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얼어버린 놈의 육신은 곧 깨졌다.
산산이 부서져 손톱처럼 작은 알갱이가 되어 허물어졌다.
‘미, 미쳤다!’
아이스 스피어의 위력을 처음 보게 된 어스는 크게 기함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이스 스피어는 강력한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300코인을 습득합니다.
대형 표범 이후 처음으로 세 자리 숫자의 코인을 입수하는 순간이었다.
더해.
-레벨업.
-레벨업.
레벨도 올랐다.
그리고.
-위그드라실의 심장을 발견했습니다.
-온전한 위그드라실의 심장이 아닙니다.
-활성불가.
-위그드라실의 조각입니다.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습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냉큼 받아들인 어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곧 마을 내부로 진입했다.
간혹 좀비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앞서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흡수한 특이한 좀비에 비하면 세 살 먹은 어린애 수준이었다.
그렇게 보무도 당당하게 모든 좀비를 싹 정리해 버린 어스는 생존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암울한 현실에 피가 마르는 공포에 빠져 있던 그는 그야말로 신이 보낸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쏟아지는 생존자들의 눈물과 칭송.
‘나 룬 싫어하는데.’
신을 싫어하는 인간에겐 마뜩찮은 일이었다.
신이 보낸 구원자라니.
* * *
구조한 생존자 중에 성인 남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노인 역시.
어린아이들뿐이었다.
마을의 위급을 알려준 양치기 소년 또래의 남녀 아이들.
어스는 남녀 아이 십수 명을 데리고 마을 회관으로 들어갔다.
야심한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동할 수는 없었다.
시골 아이들이라 몸뚱이는 제법 튼튼한 편이었지만, 아이들이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워낙 크다보니 이를 수습해서 이동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서 택한 것이 마을 회관이었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어스는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달달한 간식을 꺼내 나눠줬다.
‘여기까지다.’
아이들에겐 영주의 군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던진 어스는 냉정한 태도로 돌아서서 창턱에 엉덩이를 붙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그제야 갖게 된 어스는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30).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2/100).
생명력 : 210/210.
마나 : 230/230.
인벤토리 : 1(+2).
스탯 : 힘(1.2). 체력(23). 민첩(1). 지력(3). 정신(27).
직업 스킬(5/9) : 매직 애로우(+0/12). 파이어 애로우(+0/12). 파이어 볼(+0/12). 파이어 버스트(+0/12). 아이스 스피어(+0/12).
업적 포인트 : 4.
코인 : 429.
레벨이 올랐다, 그것도 두 개나.
레벨 30이 되자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변화는 인벤토리 용량의 증가였다.
기존에 30킬로그램이었던 인벤토리의 용량은 이젠 10킬로그램이 더해져 40킬로그램이 되었다.
인벤토리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공간 주머니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가격일 것이다.
공간 주머니와 달리 팔 수도 없고 대여해 줄 수도 없으니 금전으로의 치환은 불가능하다.
딱히 아쉽진 않다.
돈이야 발품 조금 팔면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
인벤토리를 응시하던 어스의 시선은 곧장 위로 올라갔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이제 아흔여덟 개 남았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멀지만 칭호를 활성화했을 때 가질 수 있는 보상을 생각하면 설사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웃으며 갈 용의가 있었다.
‘업적 포인트는 어떻게 한다.’
이게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정신, 체력 그리고 지력에 원 없이 투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현실은 늘 빈곤하다.
마나를 올려주는 정신.
생명력을 올려주는 체력.
스킬 전체의 위력을 올려주는 지력.
이 세 가지 스탯이 그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스킬 위력을 높이는 방식은 딱히 지력이 아니어도 되긴 한데.’
또 다른 방법, 각각의 스킬을 강화하면 된다.
문제는 코인이 부족해서 1, 2서클 스킬만 간신히 강화할 수 있다.
참고로 강화 비용은 스킬 구매가의 2배다.
100코인으로 구입할 수 있는 1서클의 스킬의 경우에는 2까지 강화할 수 있으며, 2서클은 단 한 번 강화할 수 있다.
매직 애로우와 파이어 애로우만 가능하다.
‘차라리 지력 스탯을 올리고 말지.’
남은 스킬 슬롯을 다 채운 상태라면 모를까 각각의 스킬을 강화하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력 스탯을 올리자니 정신과 체력 스탯이 또 아쉽다.
행복한 고민도 고민이다.
이맛살마저 찌푸리며 고심을 거듭한 어스는 이번엔 지력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잖아.’
더 이상의 생각은 심중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기에 어스는 생각을 곧장 실천했다.
지력(7).
기존보다 두 배가 넘는 수치로 변모한 지력.
어스는 그길로 곧장 회관을 나와 스킬을 사용했다.
‘매직 애로우!’
대상은 아름드리나무.
나무에 남은 흔적을 확인한 어스의 입가에 애매모호한 감정이 매달렸다.
2배 이상의 효과를 낼 줄 알았는데 막상 실험의 결과를 살펴보니 그와 같은 효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마음을 충족하기에 부족할 뿐.
‘에이씨.’
잘못 생각했다.
그냥 정신에 줘 버릴걸.
어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 * *
양치기 소년의 마을에 닥친 불행한 소식을 접하게 된 글리시아의 영주는 곧장 전군을 소집했다.
동시에 가까운 영지와 왕국에 전령을 급파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은 왕국 전체를, 아니 타국에도 영향을 미칠 일대사건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무튼 긴급으로 소집된 영지의 군대는 곧장 양치기 소년의 마을로 출군했다.
그들이 도착한 건 그 소식을 접한 지 하루하고 반나절 만이었다.
“어스 씨!”
“루리아 영애?”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영주의 딸이 직접 무장을 갖추고 올 줄이야.
“네크로맨서와 좀비는…… 음, 혹시 어스 씨가 처리한 건가요?”
“네크로맨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영애도 오시다니 의외네요.”
“글리시아 가문의 혈족이자, 예비 기사로서 참전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런데 베르톤 씨나 다른 분들은 보이지 않네요.”
설마, 군대만 보내고 자신들은 뒤로 쏙 빠진 걸까?
“귀환 명령이 떨어져서 그들은 마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안위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는 말에 어스의 기분은 나빠졌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의 이를 눈치챈 것인지 루리아는 그들이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했지만 어스의 귀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훗날 그들을 만나게 되면.
‘상종하지 않아야겠어.’
반면 마을의 위기를 알린 양치기 소년은 영지군과 함께 돌아왔다.
현재 양치기 소년은 어스가 구출한 아이들을 얼싸안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짠한 마음에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때 전신 갑옷을 착용한 다부진 체격의 중년 기사가 어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글리시아 영지의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과 짧게 인사를 나눈 어스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에 어스를 바라보는 루리아와 기사단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내가 만난 마법사들 중에서 그대가 가장 용맹하군. 글리시아의 영지민을 구해준 그대의 공은 영주님께서 분명 후하게 보상해 줄 걸세.”
‘역시, 고생엔 금전적인 보상이 최고지.’
물론 이러한 속내는 일체 드러내지 않고 오직 겸양을 고수했고, 그의 그런 태도는 두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성이 제대로 박힌 마법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