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벤슨이 선포한 결투 재판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결투에 임해야 한다.
결투 재판을 선포한 벤슨이 이를 철회하거나, 혹은 어스가 벤슨이 만족할 만한 것을 내주지 않는 이상 멈출 수 없다.
소피는 벤슨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벤슨의 동문들 역시 만류했다.
그러나 벤슨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명예가 실추되겠지만 저놈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벤슨의 입장에서 이는 불명예였다.
보잘것없는 평민 어린아이를 상대로 결투 재판을 선포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벤슨은 이를 감수했다.
어스를 죽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벤슨을 제외한 모두가 체념한 표정으로 어스를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겁을 집어먹고 눈치를 살필 것이라 생각했던 어스의 입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나오자 다들 놀랐다.
‘미친 건가?’
‘보통 성격은 아니라고 했지만 죽음까지 불사할 정돈가?’
‘벤슨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거 아냐? 평가 점수 떨어지면 안 되는데.’
다들 어스를 겁 없는 망아지 보듯 하였다.
그때, 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그녀가 나서자 벤슨이 도끼눈을 떴다.
“루리아 영애,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설마, 저를 막아설 생각입니까?”
“벤슨 공자 그대를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결투 재판은 신성합니다. 그러한 결투에 저 아이가 상대로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벤슨 공자의 양심에 묻는 겁니다.”
루리아의 말은 비수가 되어 벤슨의 양심을 찔렀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를 듣기에는 벤슨의 화는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상태였다.
“결투 재판을 철회할 생각은 없습니다. 루리아 영애. 그러니 물러나십시오. 루리아 영애가 제게 가한 행동은 약자를 돕기 위한 명예로운 마음에서 그러한 것이라 생각하고 넘기겠습니다. 하나, 저 천박한 꼬맹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루리아의 말에 소피의 표정이 바위처럼 변했다.
그녀는 루리아가 어떤 행동을 할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루리아 영애.”
“저 아이를 대신해서 결투 재판에 서겠습니다. 물론 저 아이가 허락해야겠지만.”
“지, 진정 날 이렇게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여야겠습니까? 루리아 영애! 고작 저 천박한 꼬맹이 하나 살리자고 할리 가문과 글리시아 가문에 골을 만들 생각이십니까?”
어스는 루리아의 행동에 또 한 번 놀랐다.
‘뭐지?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려는 거지?’
이러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루리아는 벤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지 어스만 쳐다보았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과 무심한 눈빛을 하고서.
저 모습만 보면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이 맞나 싶다.
‘멋지네.’
어스는 루리아에게 반하고 말았다.
인간적으로.
모두가 어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어스가 루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깨위에 있는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백퍼센트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스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 결투 재판 제가 하겠습니다. 루리아 영애.”
그렇게 다부진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밝힌 어스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활짝 펴진 그의 손이 오무라들자 그 손엔 검은색 로브가 쥐어져 있었다.
허공에서 빠져나온 검은색 로브를 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저, 저 아이가 마법사였어!”
“방금 그건 뭐였지? 로브를 허공에서 빼들었어.”
“공간 주머니 아니었을까?”
“공간 주머니? 무슨 얼토당토않는 소릴 하는 거야. 그의 손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어. 다른 손은 내려진 상태였고.”
“그, 그럼 공간 왜곡? 헐. 공간 속성 재능은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한 재능인데.”
“어쩐지 태도가 당당하더라니.”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특수한 체질을 타고난 자들이다.
이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그에 반해 속성 재능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참고로 속성 재능이란 3서클 이후부터 중요해진다.
만약 자신의 속성 재능을 모르고 엉뚱한 속성을 익히려 든다면 남들이 날아가는 동안 혼자서 기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평소 학구열이 남다른 두 젊은 마법사가 어스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현실도 잊고서.
그에 빨강머리 주근깨 소녀가 끼어들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선배들이 말하는 그 희귀한 속성 재능의 소유자와 벤슨 선배가 결투 재판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요!”
빨강 머리 주근깨 소녀의 이름은 나리아, 그녀의 말에 다운즈와 베르톤은 물론 다른 일행 역시 얼굴이 구겨졌다.
한편 벤슨 할리는 어스가 선보인 한수에 놀라 멘탈이 부서진 상태였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의 나약함을 감춰온 벤슨에게 있어 어스는 생애 최대의 고비였다.
아니, 난제였다.
벤슨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몇몇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들 모두 평소 벤슨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이었다.
“따라오세요. 벤슨 할리 공자.”
로브를 뒤집어쓴 어스는 넓은 로브 소매를 한차례 크게 펄럭인 뒤 벤슨을 쳐다보며 목에 힘을 주어 말하며 앞장섰다.
벤슨의 눈에 그 모습이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아, 아냐.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 저 어린놈이 희귀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그래 봐야 애새끼야.’
벤슨은 이를 악물며 어스의 뒤를 쫓았다.
* * *
결투 재판을 하기에 적당한 공터를 찾아낸 어스와 벤슨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루리아와 벤슨의 마탑 동문들은 복잡한 심경을 내보이며 한쪽에 서서 참관자이자 관객이 되었다.
그들을 일별한 벤슨은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나 벤슨이 시전한 매직 애로우는 벽에 박힌 못 마냥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늦게 마법을 시전했음에도 먼저 마법을 완성한 어스의 마법이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 파이어 볼!”
벤슨의 입에서 절망에 찬 신음이 터졌다.
참관자이자 관객들의 입에서도.
“3, 3서클이라니.”
“최강 동안인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돼.”
“누구 어스 씨 나이 아는 사람?”
어스에 대한 호칭에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루리아도 이 순간은 특유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열다섯입니다.”
사람들이 다 궁금해하기에 어스는 서비스 마인드를 발휘하여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적을 눈앞에 두고 보이기엔 너무나 여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3서클 마법사의 나이가 고작 열다섯이란 말에 다들 머리에 메테오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벤슨은 더더욱 절망했다.
시전자의 멘탈이 부서지자 매직 애로우도 형체를 잃어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사 간 대련이나 결투에서 이는 패배를 선언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주춤.
연신 뒷걸음치던 벤슨은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스는 파이어 볼 하나를 더 추가했다.
두 개의 파이어 볼은 흡사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눈을 연상시켰다.
화르르.
“사, 살려 줘! 내가 졌어!”
죽음의 공포를 느낀 벤슨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선언을 용납할지 말지는 오직 당사자인 어스의 뜻에 달렸다.
원래 결투 재판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스에게로 향한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마조마한 심정을 담고서.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루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깊고 차분한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어스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벤슨의 항복을 받아주겠다는 의미였다.
“제가 중재자로 이 문제를 풀어볼까 합니다.”
루리아의 제안에 어스는 말없이 공중으로 파이어 볼을 날려 보내 터트렸다.
두 번의 폭발음에 놀란 벤슨은 오줌까지 지렸다.
그에 다들 벤슨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날려 보냈다.
이는 벤슨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와그작.
벤슨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전처럼 화를 내지 못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어스가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칫.
“맡기겠습니다. 루리아 영애.”
* * *
벤슨은 마탑으로 돌아가는 약간의 여비만 남기고 소지한 돈과 귀중품을 모두 어스에게 내놓아야만 했다.
열일곱 살짜리가 갖고 있어 봐야 얼마나 있을까 싶어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어스는 벤슨이 소지한 재물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상단이 발행한 1만 테스 전표 열장, 10킬로그램 용량의 공간 주머니와 십여 개의 보석과 치료 및 마나 회복 포션을 살려주는 대가로 받았다.
놈에게서 받은 재물의 가치는 자그마치 30만 테스에 육박했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번 돈이 푼돈이 되는 순간이었다.
“유적지 탐방요?”
동문이 알거지가 되어 떠났음에도 젊은 마법사들은 어스를 멀리하지 않았다.
멀리하긴커녕 오히려 그와 가까이 지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어스는 벤슨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
한편으론 인간관계에 있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예, 어스 마법사님도 관심이 있나요?”
유.적.지!
이 단어는 어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1/100).
그도 그럴 것이 칭호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위그드라실의 조각, 그 조각의 출처가 바로 유적지였으니까.
물론 지금 저들이 갈 유적지에서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그 외에 다른 정보가 없다 보니 유적지라면 일단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유적지로 소피 일행이 간다고 하니 어스로선 밀어내도 따라가야 할 판이다.
“저도 마법사니까요.”
“그럼 저희랑 함께 가시지 않으실래요?”
“외부인인 절 데려가도 문제가 없나요?”
“20년 전에 발견된 유적지라 모든 조사가 끝난 상태예요. 지금은 저희 같은 마법사나 학자들만 찾는 일종의 관광지? 뭐, 그런 곳이니까 어스 마법사님과 동행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요. 다들 어스 마법사님이 동행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
소피는 어스와의 인연을 길게 이어가고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행하게도 그녀의 동문들 역시 특별한 재능을 보유한 그와의 인연을 바라고 있었기에 어스만 승낙하면 되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당연히 어스는 승낙했다.
벤슨 할리의 빈자리가 어스로 대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유적지가 있는, 루리아와 소피의 고향인 글리시아 남작 영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다운즈 마법사님.”
“예, 어스 마법사님.”
“혹시, 위그드라실이 뭔지 아세요?”
이동 중에 어스는 책을 좋아하여 독서량이 많은 다운즈와 베르톤을 알게 되었고, 내내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질문할 수 있었다.
“고대의 신이 심은 신비의 나무라는 설이 있죠. 그런데 어스 마법사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우리 마탑에서도 위그드라실을 아는 분들은 극히 드문데.”
안타깝게도 다운즈가 아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반면 베르톤은 그보다 좀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신화나 전설 그리고 고대역사에 관심이 유독 많은 때문이었다.
어스 입장에서 베르톤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였다.
하지만 다운즈보다 좀 더 알고 있을 뿐 정작 어스가 궁금한 내용은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오히려 어스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그중엔 곤란한 질문도 여럿 있어 어스의 진땀을 빼기도 했다.
‘실망하지 말자.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 가면 되는 거야.’
이렇게 스스로의 조바심을 달랜 어스는 전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엔 루리아 글리시아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인연? 운명? 어스는 내심 그 단어를 혀로 굴리며 루리아의 시선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녀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여동생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어스 마법사님은 몇 서클이세요? 앗! 죄송해요. 실례를 저질렀네요.”
사실 이 문제는 모두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부분이었다.
공간이란 특별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 싹을 틔우지 않은 상태면 모를까 그들은 그 싹이 움텄다는 걸 목격했다.
인벤토리에서.
딱히 숨길 생각이 없던 어스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파이어 버스트까지 익혔습니다.”
그에 달리는 역마차 내부에선 젊은 마법사들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재!
어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