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하우든 백작령의 주도에서 출발한 역마차는 3박 4일 내내 아무런 사건사고도 없이 목적지 도시 게린에 무사히 도착했다.
탈이 나길 바란 건 아니지만 내심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무대를 바랐던 어스에게 있어 이는 작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다들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도 저희 역마차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긴 것과 달리 상냥한 마부의 인사를 뒤로하며 승객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싸가지 없는 은인 역시.
‘독하네, 독해. 끝까지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냥 가버리네.’
시원섭섭한 감정이 일시 고개를 내밀다 맥 빠진 한숨에 실려 그의 가슴속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는 걸 흘낏 본 어스는 그들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그곳은 매표소가 있는 대합실 방향이었다.
왕도로 출발하는 마차 편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매표소 한쪽에 큼지막한 입간판이 보였다.
그 앞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이 원하는 마차 편을 확인하고 있었다.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확인한 어스는 매표소 직원에게 묻는 걸 포기하고 운행일정표가 적힌 입간판 앞으로 걸어갔다.
간단한 글자는 읽을 수 있었기에 어스는 어렵지 않게 왕도로 출발하는 마차편의 시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배운 것을 실생활에 활용한 것에 그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면 자랑했을 텐데.
다시 한 번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걸 자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허전한 마음을 가눈 어스는 내일 왕도로 출발하는 마차편의 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 창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매표소 창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멈췄다.
‘마법사들인가?’
로브를 입은 한 무리의 젊은 남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건 비단 어스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들을 경외의 시선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마법사들에 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어스는 그들이 자신처럼 소속이 없는 자유 마법산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가슴팍을 살폈다.
로브의 왼쪽 가슴 부위에 같은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소속이 있는 마법사구나.’
자신과 다른 마법사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어스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어스가 바라보던 마법사들 중 한 명이었다. 화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어스 바로 앞에서 서고는 눈을 부라렸다.
그러곤.
“죽고 싶어?”
끔뻑끔뻑.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어스에게 상대는 한 방 더 먹였다.
“눈깔 안 깔아?”
‘무늬만 마법산가?’
삼류 용병도 저딴 식으로 초면인 사람에게 막말을 날리지 않는다.
하물며 마법사가 아닌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놈이 바로 그 짝이 아닐까 싶다.
같은 마법사로서 심히 부끄러웠다.
“내 눈깔 내가 뜨고 다니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넌 죽는 게 소원이니?”
자고로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외의 반격에 놀란 것이다.
“너,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남자는 곧 크게 격분하여 소리쳤다.
아니, 고함으로 그치지 않고 어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스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남자의 얼굴을 이마로 박아 버렸다.
빡!
“으악!”
어스의 이마를 얼굴로 받은 남자는 콧잔등을 쥐고 주저앉았다.
얼굴을 감싼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액체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꼬맹이가 미쳤나 봐. 마법사님의 얼굴을 이마로 받아 버리다니.”
“마법사님의 말이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마법사님의 얼굴을 박아버릴 생각을 한 거지?”
“요즘 애들이 앞뒤 재는 거 봤어? 욱한 마음에 일부터 저지른 거겠지.”
“마법사님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집안 말아먹게 생겼네.”
애들을 대동한 부모들은 혹여 제 자식이 이를 보고 배울까 봐 훈육에 들어갔다.
“저기 봐. 마법사님의 동료들이 소년에게로 가고 있어.”
그 말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하며.
“벤슨, 괜찮아?”
“저,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아픔도 아픔이지만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공장소에서 밤톨만 한 꼬맹이에게 맞아 코피가 터졌다는 사실에 남자, 아니 벤슨은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 나 벤슨 할리가 원하노니 천박한 악을 멸할 지어다! 매직 애로우!”
꼴에 마법사라고 주먹이 아닌 마법을 사용하는 벤슨.
한편 어스는 마나의 사랑 어쩌고저쩌고 하기에 엄청 대단한 마법을 시전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 순간적으로 움츠려들었다가 시전한 마법이 매직 애로우임을 확인하자 허탈감에 빠졌다.
이 상황에 어이없어 하는 어스와 달리 벤슨의 동료들은 기함했다.
“벤, 벤슨 무슨 짓이야? 상대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라고. 당장 마법을 거둬.”
벤슨의 동료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눈이 완전히 돌아간 벤슨은 그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선사한 꼬맹이를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 그 하나의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벤슨은 자신의 살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동료들이 만류에 마음이 흔들려서? 살인의 후폭풍이 우려돼서? 전혀.
벤슨이 행동하지 못한 건 뒷목에 가해진 충격 때문이었다.
퍽.
쿵.
얻어맞고 쓰러지는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벤슨의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서 벤슨을 기절시킨 주인공을 보았다.
그 시선 중 하나가 크게 놀란 얼굴을 하고서.
“어, 언니!”
마법사 중 한 명에게 언니라고 불린 여자, 그는 어스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달려오는 마차에서 자신을 구해준 소녀이자, 3박 4일 내내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던 바로 그 소녀였다.
* * *
공공장소에서 마법을 시전한 건 벤슨 할리의 잘못이었다.
벤슨의 상대가 범죄자이거나 혹은 그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였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겠으나, 로브를 걸치지 않은 어스의 외양은 오히려 피해자 포지션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그가 벤슨의 얼굴을 들이박은 다혈질적인 모습은 충격이었지만 어쨌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일의 진행을 봤을 때 잘못은 벤슨 할리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지켜본 눈이 한둘이 아니니까.
치료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한 벤슨, 그는 두 눈에 독기를 잔뜩 품고서 어스만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번개가 튀네, 튀어.’
어스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벤슨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찼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설마 나 마중하러 온 거야?”
“우연.”
“칫, 빈말이라도 마중 나왔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
“거짓말은 기사의 수치다.”
어스를 두 번이나 도와준 루리아 글리시아는 기사 지망생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은 1서클 마법사였다.
한 집안에 기사와 마법사가 나온다면 이는 집안의 경사였다.
평민 가정의 경우에는 동네잔치를 열었을 것이다.
참고로 어스는 루리아 글리시아 덕분(?)에 젊은 마법사들 무리에 꼽사리 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은 정정한다.
벤슨 할리의 집중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루리아라, 이제야 은인의 이름을 알게 됐네. 그런데 친동생에게도 되게 무뚝뚝하네. 누가 보면 남남인 줄 알겠어.’
루리아에 대한 어스의 선입견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서 있는 어스를 그제야 일별한 루리아의 여동생.
“그런데 저 아이는 어떻게 아는 거야?”
소피 글리시아가 어스를 언급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마법사가 된 이후 이런 대접은 처음이군.’
자신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면 싹 달라질 것이다.
문제는 제 입으로 떠들기에는 모양새가 엄청 빠진다는 점이다.
영웅이란 주둥이가 아닌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게 영웅으로 불리는 자의 품격.
어스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자신의 품격을 위해 이를 억눌렀다.
루리아가 대답하기 전 벤슨이 갑자기 발작했다.
‘미친놈인가?’
벤슨의 발작엔 어스의 행동이 촉매제였다.
그런데 그걸 어스만 모르고 있었다.
벤슨이 저처럼 발작한 건 사실 어스가 미소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벤슨의 정면에서.
그러니 어스에게 맞아 코가 깨지고, 루리아에게 맞아 기절하여 수치를 겪은 벤슨 입장에선 화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벤슨에겐 어스는 천박하고 만만한 상대였으니 당연히 길길이 날뛸 수밖에.
“죽여 버리겠다! 천박한 어린놈!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 나 벤슨 할리가 원하노니 천박하고 지저분한 악을 멸할지어다! 매직 애로우!”
1서클 마법 하나 시전하는 데 뭔 말이 그리 긴지.
어스는 이번엔 이마가 아닌 마법으로 놈의 코를 납작하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때, 철제 장검이 매직 애로우를 가르는 걸 보며 멈췄다.
장검의 주인은 루리아였다.
루리아는 냉랭한 눈으로 당황한 벤슨을 쳐다보며.
“그대는 명예도 없는가?”
팩트 폭격을 날려 벤슨 할리를 크게 당황시켰다.
한편 어스는 검으로 마법을 자른 것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거, 검에 마나를 담은 거야?’
일반적인 검으로 마법을 가를 수 없다.
마법을 가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기에 마나를 담아야 한다.
무기에 마나를 담기 위해서는 최소 소드 유저 상급은 되어야 한다.
용병으로 비유하자면 최소 금패 2급은 되어야 가능하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건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고 봐야 한다.
벤슨도 이를 아는지 거푸 자신의 행동을 막아선 루리아에게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입일 뿐 벤슨의 두 눈은 원독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앞서는 어스 하나만 노린 원독이었지만, 이번엔 루리아까지 포함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리아는 특유의 무심한 눈길로 벤슨의 원독에 찬 눈을 직시했고, 그녀와 싸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벤슨은 어금니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어스는 그런 벤슨을 흘낏 쳐다본 뒤 태연한 태도로 루리아 앞으로 걸어갔다.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두 번이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어스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무시로 일관할까 싶어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 이번엔 그의 인사를 받아주는 루리아였다.
“루리아 글리시아라고 한다.”
이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루리아의 여동생이 나섰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
루리아는 제 여동생에게도 말이 별로 없었다.
미세한 끄덕임이 전부였고 소피아는 이에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제 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스라고 했지?”
어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반말에 반말로 응수할 것인지 아니면 존대할 것인지를 놓고서.
“어스라고 합니다.”
결과는 존대였다.
마법사가 준 귀족의 대우를 받는다곤 하지만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게 아닌 이상 결국은 평민이다.
반면 상대는 마법사이자, 귀족이기에 말을 놓을 수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을 위해 두 번이나 나서준 루리아의 여동생이었기에 이를 감안했다.
“그나저나 너도 참 대책이 없구나. 지금이야 우리 언니가 있어 화를 피했지만 다음에도 이런 행운은 없을 거야. 그러니 앞으론 행동에 신중을 기하길 바란다.”
소피는 어스를 얼른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벤슨 선배의 성격을 생각하면 반드시 보복할 것이기에.
물론 어스의 신변을 걱정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제 언니가 두 번이나 구해준 아이가 허무하게 죽는 게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소피는 이만하면 어스도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 갈 것이라고.
하지만 어스에겐 그럴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3개월 전이라면 힘도 백도 없는 처지라 그리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속으로 화를 삭이려고 노력하던 벤슨은 이에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그가 달아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벤슨은 스스로 흑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그건 바로.
“나 벤슨 할리, 일곱 불꽃 마탑의 마법사이자, 할리 자작 가문의 혈족으로서 네게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거부는 없다.”
마탑과 제 가문의 명예를 내세워 벤슨이 어스에게 결투 재판을 선포해버렸다.
이에 소피는 물론 다들 크게 놀랐다.
결투 재판이란 것도 레벨이 맞아야 하는 법인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스는 신분도 낮은 데다 어리기까지 했으니 소속 마탑과 가문의 이름까지 내세운 것은 과한 처사였다.
아니, 낯부끄러운 처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벤슨 선배가 저 아이를 죽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구나!’
벤슨이 마탑과 가문까지 거론한 이상 루리아가 나선다는 건 마탑과 할리 가문과 척을 지겠다는 의미가 되기에 이번엔 루리아도 더는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