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평민들에게 있어 여행은 굉장히 부담되는 일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신변의 안전이란 측면도 그렇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철들기 전부터 들어야만 했던 어른들의 경고까지 더해져 평민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하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이나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
간혹 이야기에 취해 외지로 나가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귀향하곤 했다.
왜? 꿈은 꿨지만 그 꿈을 이룰 능력이 그들에겐 없었으니까.
그러한 면에서 보자면 어스는 행운아였다.
그의 행운은 그 자신의 인생은 물로 그 가족들의 인생까지 바꾸어 놓았다.
일단 고블린의 마수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무사할 수 있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마법사의 가족이란 버프가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었으니까.
법이란 놈도 사람을 가려서 잘 대해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당시보다 어스의 실력과 명성이 올라간 지금은 말해 무엇 하랴.
“작위와 장원 그리고 그대의 연구와 수련에 필요한 것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약속하겠어요.”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하는 백작 가문의 아가씨 말에 어스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진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던 정상이 지금 이 자리에서 고갯짓 한 번이면 다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리아의 제안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과한 면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어스의 경지는 고작 3서클이기 때문이다.
물론 3서클의 경지가 무시 받을 만한 경지는 아니다.
분명.
‘허락만 하면 지금 내 꿈이 이뤄지는 거야? 포부가 무색해지네.’
어스는 얼떨떨한 심정을 털어낼 수 없었다.
오죽하면 몰래 제 허벅지까지 꼬집어 봤을까.
‘좋은 조건인데…… 이상하게 신나지가 않는 거지? 어째서?’
오히려 두둑한 포상금을 받는 게 더 신날 것 같았다.
한편 어스의 표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도리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도리아 입장에선 당연했다.
어스에게 제안 한 건 파격 그 자체였으니까.
과연 이런 제안을 누가 거절하랴.
머리가 장식이지 않은 이상.
“저, 저기 도리아 아가씨.”
그런데 마법사의 반응이 어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딴 판이 아닌가.
그에 도리아는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
“음,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이만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자신이 하고자 하려는 말을 떠올린 순간 만감이 교차한 어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고 쉬운 길을 외면하고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자신 같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질타? 비난? 대충 그 엇비슷한 감정이다.
아무튼 이건 어스의 감정이고 방금 그가 한 행동은 큰 실례였다.
작위도 없는 평민이 일반 귀족도 아니고 고위 귀족의 면전에서 한숨을 쉬는 건 명백한 무시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스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이 그에겐 낯섦 그 자체였으니까.
다행하게도 어스에게 제안을 넣은 도리아는 선민사상에 찌든 오만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었다.
외모는 북풍한설도 놀라 뒷걸음치게 도도하고 차갑게 생겼지만, 이는 생김이 그러할 뿐 실상 넓은 도량의 소유자였다.
“당신의 인생이 걸린 결정이니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요.”
어스의 반응에 잠시 흔들리긴 하였지만 여전히 도리아는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제안을 그가 거절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망설임은 동료들 때문인가?’
거너 용병대에 불행한 사건이 발생 한 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도리아는 곧장 그를 부르지 않고 기다리기 까지 했다.
물론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솔직히 아가씨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어요. 엄청 많이요. 실은 아가씨께서 제게 제안하신 내용은 제가 고향을 떠나면서 가졌던 목표였거든요. 그런데 그 목표가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싱숭생숭해졌어요.”
“그럼 시간이 필요한 가요? 그렇다면 기다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중 태반은 안 좋은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스의 눈엔 점점 도리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외모는 차갑고 도도하여 말붙이기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만, 실상은 외모와 달리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다보니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의 제안이 부족한 건 아니고, 아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냥 제 탓입니다. 제 탓.”
고위 귀족에 대한 적응력을 갖춘 것일까? 처음과 달리 눈빛과 목소리가 보다 또렷해지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리아는 어스의 그런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가면처럼 차갑던 도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를 본 어스는 그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아그네스 누나보다 살짝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웃으니까 더 예쁘네. 고위 귀족의 여자는 다 저렇게 예쁜 건가?’
더 많은 고위 귀족 여자를 봤으면 싶다.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예쁠 수 있는 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알겠어요. 더 이상은 부담스러울 테니 그만하도록 하죠. 대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주기 바랍니다.”
그냥 안주할까?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작위까지 다 주는…… 예쁜 누나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앞서 한 말도 있었기에 없던 것으로 하긴 싫었다.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마음이 생기면 그땐 반드시 도리아 아가씨를 찾겠습니다.”
각오와 박력이 만나자 흡사 사랑을 고백하는 저돌적인 남자처럼 보인다.
정작 이 말을 한 당사자인 어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도리아는 아니었다.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도리아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그 도도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말 믿겠습니다. 어스 마법사. 함께 식사하고 싶지만 어스 마법사가 불편할 테니 나는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불편한데, 단 둘이 먹으면 기분이 참 좋아질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선 도리아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탁.
도리아와의 만남은 어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의 기준에서도.
도리아가 사라지고 제프니 촌장이 나타났다.
묵직한 포상금을 쥐고서.
“감사합니다, 촌장님. 참, 부산물 매매 대금은 언제 받을 수 있죠?”
도리아가 떠나며 그의 가슴에 남긴 파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 * *
“아가씨, 어째서 그냥 물러나신 겁니까? 어스 마법사는 당장도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는 마법삽니다. 하물며 나이를 고려하면 차후의 경지는 예상조차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스를 대문까지 직접 배웅한 제프니 촌장은 일이 뜻대로 흐르지 않자 서둘러 도리아를 찾아가서 애타는 심정을 토로했다.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저러한 진심을 보인다는 건 도리아에 대한 제프니의 충성심이 매우 깊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끈질기게 나갔다면 오히려 반감만 샀을 거야. 특히 그 나이 때 소년은 유독 민감하잖아?”
“억지로 맺은 인연은 반드시 뒤탈이 있어. 귀한 인재일수록 사소한 불미스러움도 없어야지 않겠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지요. 아가씨께서 그런 마음이라면 저 또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응원만?”
“사람은 각자의 역할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군께선 주군의 길을 가십시오. 저는 주군께서 가시는 그 길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도록 밑거름만 돼 드리겠습니다.”
도리아를 향한 제프니의 저 맹목적인 충성심은 그녀에게서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에서 출발했다.
“그 말은 이제 그만해. 사람이 거름이 되겠다니? 마음에 들지 않아. 물론, 고맙긴 해.”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아니, 넘치지요.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뭐가?”
“어스 마법사의 활약을 지켜 본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지 않겠습니까? 큰 도련님이나 작은 도련님도 관심을 가질 테고요.”
제프니가 언급한 두 사람은 도리아와 백작의 작위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 이복 오빠들이었다.
“그는 내게 진심을 보여 줬어. 본인에게 직접 듣지 않았지만 눈빛이 그랬지. 내가 잘못 본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도리아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을 향한 도리아의 눈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검은 로브를 담고 있었다.
묵직한 돈 주머니에 기분이 한껏 고무된 어스였다.
팔랑팔랑.
그래서인지 제 자신이 나비라도 된 듯 팔랑거리며 걸었다.
도리아가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 * *
동료들이 기다리는 쌍도끼 여관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온 어스였지만, 용병대를 해산하겠다는 거너의 말에 들뜬 기분은 이내 가라앉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거너의 입에서 저와 같은 말을 들으니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
그런데 행상이라니, 이건 예상 밖이었다.
“대장이랑 행상은 어울리지 않는데. 더더욱 아그네스 누나도 함께한다니.”
“야! 난 왜 빼는 거야?”
“니코 형은 왠지 어울려.”
“뭐?”
잠시 니코와 투덕거리며 기분을 전환 시켰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가족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사회에서 만난 사이가 아닌가.
그래도 다들 서로가 서로에게 느낀 감정은 진실이었으니 좋은 인연으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쿨 하게 응원해주는 게 맞지 싶었다.
“린다 누나도 함께하는 거죠?”
“싫다고 하면 꽁꽁 묶어서라도 데려갈 거야.”
“전?”
“넌 네 길을 가.”
“냉정하시네. 우리 사이에.”
말의 내용과 달리 어스의 어투나 표정은 반대로 편안했다.
“음, 너 짐작하고 있었구나?”
“어깨 위에 달린 건 장식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제가 먹은 눈칫밥이 몇 그릇인데 그걸 모를까.”
“눈칫밥? 행크 씨가 그런 분은 아니지 싶은데.”
“당연히 울 아빠는 그런 분 아니죠. 이야기하면 신파니깐 그 이야긴 안 할래요. 아무튼 동료들이 흩어지지 않고 뭉친다니깐 제 기분도 좋네요.”
거너를 향한 시선을 그 옆에 앉은 아그네스에게 던졌다.
아그네스가 없으면 이젠 누구에게 글을 배워야 할까?
물론 꼭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아그네스는 어스에겐 첫사랑이었다.
아니, 짝사랑의 대상이랄까?
그러다 보니 거너나 니코랑은 느낌이 완전 달랐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첫사랑의 법칙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다.”
“그동안 감사했고, 또 즐거웠습니다.”
어스가 이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이자 이에 니코가 볼멘소리를 냈다.
“어스, 좀 더 아쉬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거 아냐? 나 대장에게서 용병대 해산 이야기를 들었을 땐 억장이 무너지고 막 그랬다고.”
“니코 형, 우린 용병이야. 일이 있으면 만나고, 일이 없으면 헤어지는 건 당연하잖아? 나도 아는 걸 2년씩이나 용병을 했다는 사람이 그걸 모르면 안 되지.”
“그래도 우리가 어떤 사인데.”
“됐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나 포상금 넉넉하게 받았으니까. 저녁은 내가 살게.”
“맥주도?”
“당연.”
“좋아, 오늘 배 터지게 먹어 보자.”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고 행동했지만 막상 저들과 헤어지고 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어스는 정하질 못했다.
몬스터를 사냥하려면 용병은 해야 하긴 하는 데……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있을 겪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멈칫거리고 있었다.
계속.
그렇다고 저들을 회유하여 다시 용병을 하자고는 할 수 없었다.
거너가 용병대를 해산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려는 이유엔 린다의 일도 적잖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는 쉬어 가는 타임일지도 몰라.’
몸이 아프면 드러나지만, 마음이 아프면 한계에 달해야 드러난다.
그래서 어스는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처럼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이왕 그렇게 마음먹자 문득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왕도가 떠올랐다.
헥터 왕국의 심장인 도시!
“나 왕도에 갈 거야”
뜬금없는 선포에 다들 멀뚱히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들이 아는 왕도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술과 음식에 이어 이야깃거리 역시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