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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로 성장하는 마법사-29화 (29/250)

029화

의식을 회복한 린다는 기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거대한 상실감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녀는 울었다.

그런 린다의 모습은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했기에 모두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우울한 이틀이 지나자 드디어 린다의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렸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살려줘서 더럽게 고맙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시원시원했던 린다는 이 자리에 없었다.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며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의 린다만 있을 뿐이었다.

린다와 한 방을 쓰고 있는 아그네스를 통해 린다의 변화를 전해 듣긴 했지만, 막상 지금의 린다를 보자 괴리감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어스는 자신만 그런가 싶어 거너와 니코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과 별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을 때 어스는 린다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켕기는 거라도 있어? 뭘 그렇게 놀라?”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소심한 녀석. 아무튼 중급 포션은 고마워 덕분에 지긋지긋한 세상 좀 더 살게 됐으니까.”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먹고 싶은 거라…… 음, 시원한 맥주? 됐어. 누가 지금이래. 일단 맥주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어스는 다시 몸을 돌려야만 했다.

부자연스러움 물씬 풍기는 어스의 모습에 린다는 픽 웃다 이내 정색했다.

“대장.”

“응.”

“대장이 그랬지. 용병은 온전한 몸으로 은퇴하는 게 최고라고?”

“어? 응, 그렇지.”

“아쉽게 최고의 마무리는 못 하게 됐네. 그렇다고 그런 표정으로 볼 필요는 없어. 그래도 난 살았잖아.”

“리, 린다.”

“됐어. 대장이 내 이름 부르지 않아도 내가 린다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스 너 자꾸 흘끔거리지 마. 신경 쓰이잖아.”

“신경 쓰여? 나갈까?”

“나가진 말고 보려면 당당히 봐. 그런 식으로 훔쳐보면 아무리 너라도 기분이 좋지 않아? 예민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거든. 그러니…… 부탁할게.”

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그에 린다는 혀를 찬 뒤 어스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가까이 오라고. 애가 눈치가 없어, 눈치가.”

그에 픽 웃은 어스는 린다의 곁으로 갔다.

“왜?”

“안아 줘.”

“어?”

“안아 달라고.”

“왜?”

“내가 너 열 번도 넘게 안아줬잖아. 그러니까 너도 한 번은 안아 줘야지.”

진담인지, 농담인지 당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멀뚱히 서 있는 것도 고역이라 어스는 린다를 안았다.

“나 잘 살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 린다야! 린다. 거너 용병대 선봉장이라고.”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받은 느낌이다.

그래도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엔 도망 못가서 안달이더니. 더워, 이젠 떨어져.”

“앗, 미안.”

“짜식. 그럼 이제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이 몸의 말씀에 경청해줘. 대장, 나 이 바닥 뜰 거야. 매달려도 남을 생각 없으니까 축하해줄 거 아니면 입 닫고 곧장 저 문으로 나가.”

입 밖엔 내지 않았지만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마음이 무거운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스가 나섰다.

“린다 누나.”

“축하해 줄 생각 아니면 말…….”

“축하한다고.”

“어?”

“은퇴 축하한다고. 그래도 서른 전에 은퇴하는 거니까 운 좋으면 서른 전에 시집갈 순 있겠네. 결혼하면 연락해. 내가 무슨 수를 쓰든 꼭 참석할게. 연락은 길드에 알지? 나 오줌 마려워서 이만 실례.”

숨 한 번 안 쉬고 다다다 말해버린 어스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온 어스는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며 벽에 이마를 댔다.

딱딱한 이물감에 혼란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돌아서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그렇게 서 있자 거너와 니코가 나왔다.

어스를 쳐다보던 니코는 씁쓸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래층을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니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어스가 입을 열었다.

“대장.”

“응.”

“린다 누나 말이에요. 모아 놓은 돈은 있어요?”

인생은 동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것도 아주 냉혹하다.

그런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금전은 필수.

“금전적인 문제는 개인의 자율이니까.”

“린다 누나 씀씀이를 생각하면 모아 놓은 돈은 없을 것 같은데.”

“씀씀이로 따지면 우리 중 네가 일등이지.”

거너의 눈이 마법 로브로 향한다.

“이, 이건 내 무기라고요. 용병이 무기에 돈 아끼면 죽은 목숨이라고 말한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말은 참... 린다가 걱정 돼?”

“원래 먼저 식당 가자고 하는 놈이 밥 사는 거 나도 알아요.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그 말에 책임질게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닳고 닳은 어른들이라면 결코 어스처럼 행동하지도,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순수하단 건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어스의 저런 따뜻한 마음씨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 곁에 달라붙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거너였다.

거너가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용병대를 해산할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게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은 나도 머리가 많이 복잡하거든.”

거너는 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곧장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어스는 자그맣게 한숨을 불어냈다.

‘역시, 해첸가?’

그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그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 * *

“안녕하십니까, 마법사님.”

“안녕하세요, 호론 씨. 그런데 촌장님은?”

호론은 제프니 촌장의 오른팔이자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자경대의 수장이다.

그러니 그의 위치는 이 마을에서 제법 중요하다.

하지만 마을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에게 포상금을 지급할 정도의 레벨이라기엔 처지는 위치인 건 확실하다.

‘뭐지? 안 주려는 건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 위기를 벗어나자 입을 싹 닦으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어 살짝 불안해진 어스였다.

만에 하나 촌장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주에게 고발해야 하나?

‘영주라니, 여긴 자유 마을이잖아.’

그건 불가.

하지만 이내 자신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인내심.

어스는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켰다.

호론은 어스의 그런 심정도 모르고 태연하게 말했다.

“식사 전이시죠? 포상금만 달랑 주기 그렇다며 촌장님께서 어스 마법사님을 위해 조촐하게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역시, 촌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제야 어스의 표정에 그늘 하나 없이 맑아졌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럼, 일행과 함께 가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혼자 오셨으면 합니다. 촌장님이 어스 마법사님께 따로 하실 말씀도 있답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어스의 동료들이 다녀오라며 손짓했다.

그에 어스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종종걸음으로 호론을 따라갔다.

속으로 포상금을 되뇌며.

히죽.

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동쪽에 치우친 작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개 마을 촌장이 소유하기에 넓은 집이었다.

내부도 꽤나 잘 꾸며져 있어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마을 촌장의 집이 아니라 영주의 저택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거기다.

‘저 사람들은 뭐지?’

저택을 지키는 자들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건물도 그리고 건물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니 자신의 고향 마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갈색 자작나무 마을의 촌장 집이 생각났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으로 한때 어스의 부러움을 샀던 집이었다.

물론 당시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오므렸던 어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쫙 펴며 자신을 쳐다보는 자들을 향해 마주 보며 씩 웃었다.

“가시죠.”

“아, 예.”

저택 경비들과 눈싸움을 하는 어스를 본 호른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어라? 방금 저 사람들의 눈치를 본 거 맞지?’

갑자기 기분이 나빠, 아니 이상해졌다.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포상금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어스는 배에 힘을 잔뜩 주며 들어갔다.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면 몽땅 다 날려버리면 된다.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

‘자기 보호니깐 괜찮겠지.’

정당방위다. 아무튼 개념은 알고 있으니 패스.

저택 내부로 들어선 어스는 식당으로 안내 받았다.

그곳엔 제프니 촌장 이외에 차가운 인상의 이십 대 초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상석이었다.

“자유 마을의 구세주께서 오셨군요. 제가 직접 모셔야 하는 데 결례가 많았습니다.”

걸레는 알아도 결례는 모르는 어스였다.

그래도 분명 좋은 의미이리라.

웃는 얼굴에 욕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니까.

“어차피 모두의 문제였는걸요.”

“어쩜 이리 아량도 넓으신지. 하하. 어스 마법사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제 복이 참 많네요, 많아. 하하.”

한마디도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여자가 검지로 식탁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그게 신호였을까? 촌장이 너스레를 거두었다.

“이런, 귀한 손님을 계속 서 있게 하다니. 이런, 실례가. 자자, 앉으세요. 어스 마법사님.”

식당에 들어오는 내내 자신을 대놓고 쳐다보던 여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이런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돈 줄 사람이 앉으라고 하니 일단 착석.

현명한 사람이 이르길 칼엔 눈이 없고, 돈엔 이름표가 없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포상금이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진 고분고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저자세일 필요는 없다.

자신은 마법사다, 그것도.

‘4서클이지.’

서클? 없어도 상관없다.

4서클 마법을 쓰면 그게 4서클 마법사지 마나 고리 따위가 대수일까.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귀한 분을 한 분 모셨습니다. 저분으로 말씀드리자면…….”

“됐어. 내 소개는 내가 하도록 하지. 촌장은 나가 있도록.”

여자의 태도에 어스의 눈에 순간 이채가 스친다.

촌장은 자신의 말이 끊겼음에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를 향해 공손한 모습으로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빠졌다.

‘저 여자…… 귀족이라도 되는 건가?’

아직 어스는 제대로 된 귀족은 만나 보질 못했다.

기사랑은 함께 밥도 먹고, 같이 적을 물리치기도 하고, 단둘이 대화도 나누었지만 사실 그들은 진짜 귀족이라고 할 수 없다.

반쪽이기에.

어쩌면 지금 자신은 진짜 귀족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도 젊고 예쁜 여자 귀족을.

“도리아 하우든이라고 합니다, 어스 마법사.”

하우든? 하우든!

‘헐, 백작 가문이 사람이라니.’

당연히 백작 본인은 아니겠지만 성이 하우든인 걸 보아 분명 백작의 혈족이리라.

꿀꺽.

또다시 마른 침을 삼키는 어스였다.

귀족에 대한 면역(?)이 전무한 탓에.

* * *

“어스는 좋겠어요. 포상금에다 사람들의 존경까지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말이죠. 참, 그런데 왜 어스만 데려간 걸까요? 그런 자리면 다 같이 가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거…… 혹시, 돈 안 주려는 수작을 부리려는 거 아닐까요?”

부러운 감정을 드러내다 결국엔 의심을 품게 된 니코였다.

그에 거너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을 안에서 수작을 부리긴 어려워. 여긴 자유 마을이니까.”

“예? 그럼 마을 밖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건가요?”

“내가 예언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어. 다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러니 마을을 나갈 땐 각별히 주의해야 해.”

생각 없이 툭 던진 내용이 날카로운 무게로 날아온 것에 놀란 니코는 벌써부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에 그 머리에 거너의 꿀밤이 떨어졌다.

“지금은 안이잖아.”

“그래도 모르잖아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참, 아그네스.”

“예.”

“린다와 이야기는 해봤어?”

린다는 열셋이란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이후 그녀는 수없이 많은 고초를 겪다 운 좋게 마음씨 좋은 용병을 만나 검술을 배운 뒤 지금까지 쭉 용병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과연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불구의 몸이다.

그래서 거너는 고민 끝에 은퇴 이후에 하고자 했던 사업을 앞당겨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아그네스를 통해 린다에게 전달했다.

물론 아그네스에게도 문은 열어뒀다.

아그네스 또한 이번 일로 마음에 변화가 생겼는지 거너의 제안을 수락했다.

“짐이 되긴 싫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린다 언니도 승낙하리라고 봐요.”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니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알면 안 돼요? 명색이 식군데.”

“별거 아냐. 용병대 해산하려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거너의 말에 니코는 뜨악했다.

“그, 그게 어째서 별 게 아니에요. 대장,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내가 대장을 얼마나 믿고 따랐는데.”

“용병대는 해산하지만 여전히 뭉쳐서 살 거야. 우리가 뭉치면 넌 안 올 거야?”

그제야 니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조건이죠. 무조건. 그런데 뭘 하려고요?”

“행상.”

“에? 떠돌이 상인을 하겠다고요? 설마, 이러려고 짐마차를 산 거예요?”

“계획을 앞당겼을 뿐이야. 린다도 그렇고 게이브와 깁스의 일도…… 하아. 아무튼 짐마차를 산 건 이 일과 관련 없어. 그래, 어떻게 할래?”

“전 무조건 좋아요. 용병이든 행상이든. 참, 그럼 어스는요? 어스는 이 사실 알아요?”

“어스와 우리와 노는 물이 달라. 그리고 어스라면 아마 이해해 줄 거야.”

“그건 그거고 그래도 섭섭해할 것 같은데.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정이 많이 들었잖아요.”

“말했지만 어차피 어스와 우린 오래 갈 수 없어. 너도 알다시피 어스가 보통 마법사냐? 몇 년 후면 아마 귀족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아이야.”

“어, 어스가 귀족이 된다고요?”

“어스 정도면 그쯤은 일도 아닐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거너의 확신에 아그네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니코는 그런 방향으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귀족이라니…….

‘어쩜, 어스라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그 시간 어스는 하우든 백작의 여식에게서 파격적인 내용의 등용 제안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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