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불편한 기분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이런 어스의 마음을 다독이려는 것인지 때마침 마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함은 아니고 야간 운행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야영할 장소에 마차가 멈추자 승객들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고급 마차라도 장시간 이용하는 건 힘들다.
하물며 저 마차는 승차감의 보정이 아예 되어 있지 않았다.
승차권이 싼 이유였다.
‘노숙은 지겨운데.’
결리던 몸을 가벼운 스트레칭을 풀어낸 어스는 공터를 둘러보며 속으로 한숨을 불어내고 있었다.
해가 지면 그나마 무더위는 한풀 꺾이지만 대신 습도가 올라가서 짜증을 유발시킨다.
어디 이뿐이랴.
각종 벌레도 노숙의 걸림돌이다.
“마부 아저씨. 근처에 개울 없습니까?”
“개울? 목이 마르면 마차 옆에 붙박이 물통 있습니다. 식수니까 마셔도 됩니다.”
“아, 네. 그렇군요. 저녁 잘 부탁합니다.”
딴소릴 하는 걸 보아 근처에 개울이 없는 게 확실했다.
강이나 개울을 낀 야영장에서 멈출 것이지.
1시간 전에 지나친 강변이 떠오른 어스는 마부를 쏘아보았다.
승객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이런 장소를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부와 마부 보조가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저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거야 뻔하지.’
승객들의 범상치 않은 인상들 때문인지 마부와 그의 보조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저들이 진짜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자신이지 싶은데.
역시나 석식은 별로였다.
곡불 가루와 육포를 넣어 팔팔 끓인 걸쭉한 스튜에 흑빵 한 덩이가 전부였다.
흑빵은 그냥 씹으면 이가 약한 사람의 경우 이가 빠질 수 있다.
그래서 흑빵은 무조건 뜨거운 스튜나 묽은 스프에 푹 찍어 녹여야 한다.
한겨울 고드름 빨아 먹던 시절이 뇌리에 스친 어스의 입가로 미소가 스친다.
배식판을 든 어스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두리번두리번.
혼자 조용히, 인벤토리에 있는 음식이랑 같이 먹을 참이다.
“거기서 멀뚱거리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사내가 그리 숫기가 없어서야. 쯧쯧.”
그는 맞은편에 앉아 싫든 좋든 얼굴을 봐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혼자 먹는 게 편해요. 많이 드세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양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남자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승객들이 돌연 웃기 시작했다.
웃는 건 자유다.
하지만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기에 어스는 그들의 자유(?)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스는 눈에 힘을 주었다.
고개는 비스듬하게 세웠다.
니코가 알려준 방법이다.
기.선.제.압!
여기에 목소리까지 살짝 내리깔았다.
“왜 웃는 거죠?”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미성이라 그리 깔아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더해 외모까지 앳됐으니 승객들이 보기엔 어른 행세를 하려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푸하하.”
저들도 한땐 어스만 할 때가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시절, 그래서 각도 나오지 않으면서 어른 인척 굴었던 풋풋함이 흑역사로 기억되는 그 시절이.
승객들은 바로 그 시절을 떠올리고 웃은 것이다.
그를 자극하기 위함도, 비웃기 위함도 아닌.
이를 알 리 없는 어스는 더더욱 화가 치밀 수밖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는 데 누가 신경 쓰이지 않을까.
아닌 척 의복을 살펴봤지만 딱히 이상한 건 없었다.
흔해 빠진 그렇고 그런 옷이다.
무난한.
“요 녀석아 혼자 먹는 게 안쓰러워서 어른이 배려했으면 넙죽 고맙습니다 해야지. 그러지 말고 여기서 먹어. 혼자 먹는 것보단 그래도 여럿이 먹는 게 낫지.”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린애 취급이라니.
‘내가 누군지 알면 저러지 않을 텐데.’
한숨과 함께 자신의 의복을 재차 내려다본 어스는 돈이 좀 들어가더라도 마법사와 사제들이 즐겨 입는 로브를 필히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참에 돈이 좀 들어가더라도 마법 로브를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변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마법 로브의 기능은 풍차노숙이 일상일 용병 생활의 질을 한층 높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꼭 사고 만다.’
어스는 승객의 제안을 거절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승객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요즘 애새끼들은 어른 무서운 줄 모르네.”
이 대목에서 왜 요즘 애새끼들이란 대사가 나오는 건지.
가뜩이나 우중충한 분위기에다, 마차의 승차감도 최악이라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하다.
여기에 오늘 밤 잠을 설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스러운데 여기에 기름을 부어 버린 승객이었다.
“아저씨는 요즘 애들 겁 안 나요? 그러다 봉변당하면 쪽팔려서 밤에 이불이나 덮고 잘 수 있겠어요?”
괜히 나대다 인생에 흑역사를 남기지 말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인 것이다.
어스가 대거리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다른 승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몇몇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었는지 염장을 지르는 말로 남자를 자극했다.
남자는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어쩌려고 저러나 싶어 빤히 쳐다보고 있는 데 그 신발이 어스를 향해 날아왔다.
전력을 다해 던진 것도, 그를 맞추려고 한 것도 아닌 듯 신발은 어스를 지나쳐 바닥에 떨어졌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신발을 왜 던지는 건지.
“갖고 와.”
저 남자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어스를 짓밟으려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스는 천천히 돌아서서 남자의 신발을 향해 걸어갔다.
그에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몇몇 승객은 그런 남자를 한심한 표정으로 보았다.
몇몇은 어스를 위해 나서려는 기미도 살짝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나서기 전에 어스의 발이 더 빨랐다.
어스는 남자의 신발을 공 차듯 차 버렸다.
신발은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미친 새끼!”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남자, 그러나 남자는 곧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다른 이들도 그 남자와 별다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 모여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 불의 힘이 응축된 파이어 볼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중이었다.
화르, 화르륵.
제 주인의 기분을 공유하는 것인지 파이어 볼이 평소보다 더 붉은 느낌이 든다.
“마, 마법사?”
어스는 콧방귀를 시원하게 뀐 다음 좀 전 통하지 않았던 니코의 기선제압용 몸짓을 해보였다.
이번엔 확실히 통하였다.
그 몸짓에 남자는 물론 다른 승객들도 흠칫 몸을 떨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이제 좀 겁나? 요즘 애들?”
무력시위 덕분에 어스는 남은 일정 내내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푸르른 숲과 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강을 마음껏.
물론 승차감은 여전히 별로였지만.
* * *
“어스는 지금쯤 출발했겠지?”
린다가 적당히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잔디밭에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그 말을 니코가 냉큼 받았다.
“당연히 출발했겠죠.”
“혼자서 잘 찾아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린다 누님, 어스가 보통 아이가 아니잖아요. 명색이 마법산데 별일 있겠어요.”
니코의 말에 린다를 제외한 거너 용병대 대원 모두가 인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법사라고 이마에 써 놓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운동 신경이 벼룩 눈곱만큼도 없긴 하지만 대신 똘똘하잖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 그게 걱정이야. 벼룩 눈곱만큼도 없는 운동신경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마법사란 게 마법 빼면 샌드백이잖아?”
“에이, 다른 마법사면 몰라도 어스는 아니죠. 어스의 마법은 엄청 빠르잖아요.”
“하긴, 그렇기도 하네. 아, 우리 어스 보고 싶네.”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장난치고 싶은 거겠죠.”
니코의 말에 린다는 킥킥거리며 눈을 감았다.
오수를 즐기기 위해.
* * *
제이든 후작령 주도.
4박 5일 동안 역마차를 타고 이동한 어스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역 근방에 위치한 용병 길드 지부에 방문했다.
거너 용병대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대기표를 뽑고 나서 한참 후에야 어스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거너 용병대의 의뢰는 진행 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확인한 어스는 이왕 온 김에 등급 시험을 치기로 했다.
3서클이면 금패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시험 일자를 받고 돌아서려는 데.
“그냥 가시면 안 되죠.”
“예?”
“요금을 내셔야죠.”
“심사비는 당일 주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고요. 지금 내실 금액은 정보 열람료입니다.”
세상에 말 몇 마디 물었을 뿐인데 돈을 요구하다니,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강도와 뭐가 다른가.
그래서 따지려고 했는데 옆 창구에서 자신과 비슷한 용무를 본 용병이 돈을 지불하는 것을 보곤 어스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죠?”
* * *
요금을 지불한 어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지부를 나섰다.
그냥 가려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돌아선 어스는 용병 지부를 보며 속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욕설을 퍼부었다.
지불한 5테스만큼.
그런데 느닷없이 뒤에서.
“꼬맹이 엄마 젖이나 더 먹고 나서 와라. 그 몸에 무슨 용병을 하겠다고 얼쩡거리는 거야? 아서라, 아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엔 뒤통수가 묵직했다.
천천히 돌아선 어스는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근육질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꼬맹이란 말이 거슬렸지만 매번 마법을 보이는 것도 귀찮았던 어스는 별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확실히 자신의 용모로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긴 어려울 듯싶다.
‘비싸도 무조건 산다. 로브.’
용병 패를 목에 걸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파이어 볼을 머리 위에 띄우고 다닐 수도 없으니 이게 가장 나은 선택지이리라.
그 전에 거너가 말했던 여관부터 찾아야 한다.
마침 그의 앞에서 선한 인상의 평범한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잠시 시간…….”
“없다.”
이게 아닌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남녀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어스는 잰걸음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게 아니고요.”
“안 사.”
뭐지? 왜지? 자신의 어디가 호객꾼으로 보인단 말인가? 어스는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새로 샀을 때에 비하면 말끔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새 옷 축에 들어가는 옷이다.
땀에 살짝 변색되고, 장거리 여행을 하느라 먼지와 구김이 없진 않지만 이만하면 피어스 남작령에선 말끔한 축에 속한다.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제가 역마차를 타고 오늘 막 여기에 도착했거든요.”
오해를 풀었다.
그래서 말리아 여관이 위치를 물으려는 데.
갑자기 남자가 지갑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던지곤 여자 친구와 가버렸다.
바닥에 떨어져서 빙글빙글 도는 동전을 쳐다보던 어스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자신을 어찌 보고.
그래도 돈이란 액수에 상관없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에 어스는 허리를 숙여 동전을 집었다.
‘5테스?’
생각보다 손이 큰 남자였다.
부잣집 아들쯤 되나?
‘도시가 커서 그런가? 이런 식이면 거지가 울 아빠보다 돈을 더 잘 벌겠네.’
픽 웃으며 어스는 또 다른 사람을 물색했다.
동냥이 아니라 길을 묻기 위해서였다.
“안 사.”
“그, 그게 아니…….”
이번엔 동전도 안 주고 간다.
나쁜 새끼.
그렇게 몇 번 고생하던 어스는 건물 그늘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던 노인들에게 겨우 말리아 여관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