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어스는 힘의 균형이 점차 대형 표범에게로 기우는 걸 느끼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했다.
여기서 손을 쓰지 않는다면 찰슨 기사가 질 것만 같았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 뒤는 보나 마나 자신들 차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수를 내야 한다.
머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린다.
좀처럼.
꿀꺽.
생간 나지 않았다, 찰슨과 보조를 맞춰서 놈을 처리할 방법이.
‘젠장, 파이어 볼을 괜히 배웠어.’
공격 스킬이 아닌 보조 스킬을 배울 것 그랬다.
만약 그랬다면 찰슨 기사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러니 이미 구입한 파이어 볼이다.
반품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지금 가진 재주로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지끈.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어스는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시뮬레이션도 돌려 본다.
가능성이 보인다.
문제는.
‘제길! 굳이 저렇게 달라붙어 저리 정신없이 싸워야만 하는 건가? 틈이 없네, 틈이. 조금의.’
공격의 틈을 찾을 수 없어 어스는 애가 탔지만 이는 그의 안목이 부족한 탓에서 나온 불평이다.
만약 그가 안목이 있었다면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찰슨이 대형 표범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기에 지금 대형 표범은 딴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틈만 난다면 바로 찰슨이 지키려는 사람들을 공격할 것이다.
영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찰슨은 놈과 격돌하면서 놈의 의중을 파악한 상태였다.
경험과 눈썰미를 통해.
그러니 찰슨 입장에선 억울한 오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어스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자신의 결단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찰슨의 마나 소드 유지시간은 줄어드는 반면 대형 표범은 그딴 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다.
“찰슨 기사님, 놈의 이목을 끌어 보겠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마시고 집중해 주세요!”
그리 경고를 날린 어스는 파이어 볼을 날렸다.
직경 30센티미터의 파이어 볼은 주변의 열기를 한층 올리며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선 어스가 지목한 표적과 충돌했다.
콰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단숨에 살을 녹여 버릴 것 같은 불길이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이에 대형 표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놈이 고개를 돌렸다.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파이어 볼은 대형 표범은 물론, 어스가 미리 경고했음에도 찰슨의 집중력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의 실수로 찰슨은 놈의 목에 깊은 자상을 입힐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대신 놈의 코를 벴다.
서걱.
“크아아앙!”
그것도 애매한 깊이였다.
하나 놈에겐 애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놈은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찰슨이 놈을 쫓아가 끝장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어스의 파이어 볼이 한발 앞섰다.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파이어 볼에 찰슨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파이어 볼이 곁을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혹시 저 어린 마법사는 자신의 원수일까? 순간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파이어 볼처럼 민감한 마법은 절대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찰슨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어스의 간절한 마음이 가득 담긴 파이어 볼이 폭발했다.
대형 표범의 몸에 맞은 것이 아니라, 저 미친 표범이 파이어 볼을 제 앞발로 후려친 것이다.
‘이게 화살인 줄 아나?’
그 순간 화염의 기운이 응축된 파이어 볼이 폭발하며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불길이 폭우와 같은 기세로 대형 표범의 거대한 몸을 뒤덮었다.
“케-엥!”
전신에 불이 붙은 대형 표범은 이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죽여 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어스의 눈에.
그렇다면 정성을 다해 죽여줘야지.
‘난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이제 살았다, 그리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스는 온 인정을 담아 파이어 볼을 떠나 보냈다.
‘죽어라 이 새끼야!’
슈웅, 콰아-앙!
* * *
천만다행하게도 대형 표범은 두 번째 파이어 볼에 의해 숨통이 끊어졌다.
그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기쁨의 함성이 터졌다.
반면 승리를 이끈 당사자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가 저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레벨업⨉3.
-업적 포인트 6을 획득합니다.
-200코인을 습득합니다.
‘미, 미친! 짐승이 아니라 진짜 몬스터였어.’
그것도 놀랍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놈이 레벨 3개를 주고 떠난 것이다.
자신의 생일도 아닌데.
“어스가 놈을 잡았다!”
“괴물을 죽였어!”
“와아.”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선 헹가래를 선물했다.
위로, 아래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가뜩이나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몹쓸(?) 짓까지 당하니 멀미가 나는 듯했다.
“이, 이 미친 양반들아 그만해! 나 지금 멀미할 것 같아!”
절규했다.
언제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있나 싶을 만큼 절박하게.
그제야 어스는 헹가래의 마수에서 벗어나 땅이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낀 뒤 흙투성이의 몸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자신을 헹가래친 사람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아…… 아빠.’
자신의 눈빛에 움찔하는 아버지를 본 어스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하다, 장해. 역시. 내 아들! 네가 아빠를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한 거야!”
그건 아니다.
기사 찰슨이 놈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환호성이 아니라 비명이 이 자리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러니 칭송은 골고루 돌아가는 게 이치에 맞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걸 따졌다고.’
조금은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남을 배려하고 돌볼 줄 아는 그런…… 부모님과 같은 어른 말이다.
어스가 그런 뜻을 내비치자 행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 범과 같은 기세로 어스를 덮쳤다.
와락.
“수, 숨 막혀!”
“앗, 실수.”
사실 숨까진 막히진 않았다.
아버지를 감동시킨 자신이 대견했고, 한편으론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 된 것인지 병사들이 하나둘 그에게 인사했다.
저들에 대한 악감정은 이미 버리기로 하였기에 어스는 사내답게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우리 아버지에게 잘해요.”
“무, 물론이지. 행크 조장님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얼마든지 불사를 수 있어.”
어스가 자신들을 어떻게 여기는 지 다들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까지 지어주며 그가 이리 말하자 다들 감동했다.
어스는 그들이 눈길을 뒤로하고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찰슨 기사에게로 걸어갔다.
이제야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게 된 찰슨.
“3서클이었나?”
찰슨은 자신의 존재감이 어스에게 가려 잊힌 것 따윈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단 하나, 바로 이것이었다.
어스는 말없이 방긋 웃기만 했다.
“그렇군…… 역시.”
“……?”
“천재였군. 희대의 천재.”
아닌 데,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에 이번에도 방긋 웃으며 돌아서서 아버지에게로 걸어갔다.
이후 어스는 돌아가는 내내 찰슨의 뜨거운 눈길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씨, 뒤통수 뚫어지겠네.’
일반인도 아닌 기사가 자신을 저리 보아준다는 건 장차 가족들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쳐다보는 거 아냐?’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름다운 여기사도 많던데, 왜 이 영지엔 그런 멋지고 아름다운 여기사는 없는 건지.
여기사와 마법사!
‘아름다운 스토리잖아.’
투덜투덜.
“어스야.”
“응, 아빠.”
“장하다.”
“알아.”
“멋져.”
“당연.”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하늘만 보고 걷다간 자빠져 이 녀석아. 아빠가 걷는 법을 또 가르쳐 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었나? 몰랐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구름만 많이 보이더라니.
“아빠.”
“어?”
“아빠,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아. 내가 아빠 하고 싶은 건 다 밀어준다. 단, 이거 두 가지는 하면 안 돼. 도박이랑 바람. 그거 말곤 다 해도 돼.”
끝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아들의 마음씨에 행크는 몹시 즐거웠다.
물론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아버지가 될 생각은 행크에겐 단 1도 없었다.
* * *
불에 탄 거대 표범의 사체를 요새에 인계한 어스는 요새 사령관의 서신을 들고서 피어스 남작령의 주도로 곧장 향했다.
가족과 하루를 보낸 뒤였다.
주도에 도착한 어스는 곧장 허든 상회주를 찾아갔다.
허든은 그를 잃어버린 아들 반기듯 반겼다.
“오! 어스 마법사.”
“안녕하세요. 상회주님. 참, 여기 요새 사령관님의 서신입니다.”
“서신? 이리 줘보게.”
서신에 적힌 내용은 알지 못했다.
밀봉 상태이기도 했지만 애초 글을 모르니 봐도 알 도리가 없었다.
‘여유가 되면 나도 글을 배워야겠어.’
글을 모르는 마법사라니 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가.
“그놈을 잡았군! 잡았어.”
“예.”
“자네에 대한 사령관님의 칭찬이 대단하군.”
“모두가 합심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어스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양반이 의뢰주다.
다시 말해 돈주머니를 안겨줄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서 거만을 떨겠는가.
자고로 용병이란 의뢰인에겐 항상 겸손하고 친절해야 하는 법이다.
어스의 이와 같은 모습은 당연히 허든 상회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이라도 딸 하나 낳아 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집안에 괜찮은 여아가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탐나, 정말 탐나.
“부모님이 참 좋아하겠군. 하하. 그럼 이제 합당한 보상을 해야지.”
책상 서랍을 열던 허든은 갑자기 위에 것은 닫고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그의 태도가 허든의 마음을 제대로 저격한 결과 돈주머니의 무게가 확 달라졌다.
물론 미래에 대한 포석도 없진 않았다.
서신에 적힌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면.
두근두근.
비대한 돈주머니를 본 어스의 심장은 약물이라도 투여 받은 듯 세차게 뛰었다.
표정 관리에 들어갔지만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굴어 내심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받게. 자네에 대한 수고와 내 감사를 조금 담았네.”
주는 건 거절 안 된다, 그러다 안 주면 자신만 손해니까.
“허든 상회주님과의 인연은 제가 꼭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하하.”
“하하.”
어스는 허든 상회주를 따라 웃었다.
‘내 말이 흡족했나?’
종종 써먹어야 할 듯싶었다.
힘든 것도 아닌데.
상회 입구까지 허든의 배웅을 받은 어스는 그 길로 곧장 역으로 향했다.
마침 오늘은 제이든 후작령의 주도로 떠나는 역마차가 있는 날이었기에 그걸 탈 생각이었다.
‘뭐가 이렇게 비싸?’
표 값은 비쌌지만 다행히 주머니가 든든하다 보니 쿨하게 구입했다.
출발까지 1시간이나 남아 있었기에 어스는 역 인근 상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잔뜩 사서 인벤토리에 입고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도 시간이 남아 10분을 더 기다린 끝에 어스는 생애 처음으로 역마차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뭐, 뭐지? 이 삭막한 분위긴?’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16인승으로 포장을 둘러친 마차였다.
여름이라 양쪽 포장은 지붕 근처까지 둘둘 말려 고정되어 있었다.
팔걸이가 있는 길쭉한 좌석은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어 보고 싶지 않아도 맞은편 사람을 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조금은 불편한 구조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 구조 때문에 삭막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어스가 그리 느낀 원인은 승객들 때문이었다.
승객의 절반이 흉터가 뒤덮인 살벌한 인상의 용병, 남은 절반은 아무리 봐도 일반인으로 보기 힘든…… 현직 산도적을 연상시켰다.
‘와. 이렇게 4박 5일을 가야 한다고?’
장거리 역마차에서 이뤄지는 로맨스(?)를 기대했던 어스는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두 번 다신 니코 형 말을 믿나 봐라. 다시 믿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개뿔, 역마차의 로맨스?
‘비싼 승차권을 사면 달랐을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보다 업그레이드된 역마차를 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로맨스가 없다면 그땐 니코를 불로 지져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사나이의 로망에 재를 뿌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