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피어스 남작령의 주도에 무사히 도착한 어스는 가족들이 묵고 있는 여관부터 찾았다.
그런데.
“예? 뭐라고 하셨어요. 방금.”
“떠났어.”
“그, 그게 말이 되냐고요? 내가 그 집 아들이라고요. 아저씨, 저 알죠?”
“알지.”
여관이 이 모양 이 꼴인 건 주인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이 한 객실에 묵는다고 괄시를 해대던지 그때 생각하면 남은 저 머리도 홀랑 태워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법이 있으니 저 머리털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지, 법이 없다면.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그럼 어째요?”
“그걸 왜 내게 물어. 떠난 가족에게 물어야지.”
“떠났다면서요?”
“어.”
“그런데 어떻게 물…… 혹시, 우리 가족이 아저씨에게 남겨 놓은 말 있는 건가요?”
“토머스로 간다고 전해달라더군.”
“아니, 이 양반이. 그 말을 왜 이제 하는 거야!”
그간 쌓인 게 한 번에 폭발해 버린 어스였다.
딴 것도 아니고 가족 문제로 자신을 놀리다니, 어스 입장에선 주인장의 태도가 그런 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땅콩 반쪽만 한 게 어디서 대들어! 뒤질래?”
주인이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리자 어스는 파이어 애로우로 맞대응했다.
그에 주인은 얌전한 강아지로 변신(?)했다.
가족들의 행선지를 알게 된 어스는 주인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고서 여관 문을 박차고 나왔다.
두 번 다신 이딴 여관 안 온다며 문 앞에 침까지 뱉었다.
‘하고 많은 마을 중에 왜 하필 토머스 마을이지?’
어스의 가족들이 이주한 토머스 마을은 갈색 자작나무 마을과 2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고블린은 모두 처리했으니 더는 놈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갈색 자작나무 마을 자리엔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가 들어 서 있었다.
‘음, 그리 생각하니깐 그만한 곳도 없긴 하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거너 용병대가 묵고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용병 길드 지부에서 도보로 1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관은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깨끗했다.
어머니와 여동이 잠시 머물렀던 그 여관과는 모든 면에서 월등한 곳이었다.
“어스!”
대장간에 무기 수선을 의뢰하고 돌아오던 니코와 마주쳤다.
“니코 형.”
“가족들은 만나 봤어? 뭐래?”
“못 봤어. 토머스 마을로 이주했대.”
“토머스 마을이면 네 고향 마을 가기 전에 그 샛길에 있던 그 마을 아냐?”
“기억력 좋네. 맞아.”
“음, 고향 근처에서 살고 싶으셨나 보네.”
“그것도 있고 아버지가 사냥꾼이잖아?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 좋으신가 봐.”
“당분간 숲이나 산엔 가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고블린을 퇴치했지만 박멸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랑 가까우니까 큰일이야 있겠어.”
“너 거기 가면 일정이 꼬이겠네.”
거너 용병대는 삼일 뒤 제이든 후작 영지의 주도로 출발하는 상단의 호위 임무를 수락한 상태다.
그렇다고 가족이 정착한 곳에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다면 출발 전에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일단 대장 만나서 이야기해야겠어. 참, 대장은?”
“너 나간 다음에 곧장 나갔어. 여관엔 깁스 형이랑 린다 누나만 있을 거야.”
어스는 니코랑 함께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던 거너는 해가 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가족들은 만났어?”
“아뇨. 실은…….”
어스는 가족들이 토머스 마을로 이주한 사실을 밝혔다.
“시간이 애매하겠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번 일에선 빠질게요. 아무래도 하루만 있다가 올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어쩐다. 너 혼자 제이든 후작 영지의 주도로 올 수 있겠어?”
“이틀에 한 번 여기서 출발하는 역마차가 있더라고요. 그걸 타고 갈 생각이에요.”
잠시 생각을 하던 거너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그쪽에서 괜찮은 일거리 있나 알아보고 있으마. 이번에 수입도 좋고 해서 그쪽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고. 다들 어때?”
다행히 다들 제이든 후작령의 주도에서 만나는 데 찬성했다.
“만약 네가 먼저 도착하면 중앙 광장 서쪽에 위치한 말리아 여관에서 기다려. 우리가 먼저 도착하면 우리가 널 기다리마.”
그렇게 만날 약속을 정한 일행은 모여 저녁을 먹은 뒤 각자의 객실로 올라갔다.
‘어떤 패가 나올까? 명색이 마법산데 좋은 패가 나오겠지.’
* * *
다음 날, 어스는 일행과 함께 용병 길드 지부에 들렀다.
예약을 잡아 놓았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곧장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어스는 은패 3등급, 혹은 2등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일행 모두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딸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했다.
용병 마법사 자체가 흔한 게 아니다 보니 그에 붙는 프리미엄도 상당했으니까.
어스는 파이어 애로우를 선보였다.
위력은 통과.
다음은 횟수였다.
동급의 마법사, 즉 2서클 마법사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그들이 2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3에서 4회가 일반적이다.
그 이상은 서클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위급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자신의 서클을 걸고 모험하지 않는다.
현재 어스는 파이어 애로우를 총 8회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수치만 놓고 보면 2서클 마법사의 두 배였다.
어스는 파이어 애로우 6회를 사용했다.
“경지가 2서클 중후반대쯤 되나 보군. 그 나이에 대단하네.”
마법사가 용병을 지원했기에 지부장이 직접 어스의 시험에 참관했다.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게 많은 남자였다.
“좋아, 은패 2급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용병은 실력으로 말한다.
그렇다고 제 실력만 믿고 고용인과의 거래를 무시할 경우에는 그에 따른 불이익이 따른다.
첫째 등급 하락.
둘째 길드 차원에서 현상금수배.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 백이면 백, 목숨을 보존하기 힘들다.
“어스, 축하한다.”
“시작부터 은패 2급이라니…… 역시, 마법사가 정답이네.”
동패 2급인 니코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스는 의기소침한 그를 위로했다.
“형도 조만간 승급 시험 볼 거면서.”
“그래 봐야 동패 1급이지. 내 실력으론 은패는 하늘나라 이야기야. 아무튼 축하해.”
좋은 자리였기에 니코도 이내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스는 등록비를 지불한 뒤 따끈따끈한 은패 2급 용병 패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더해 거너 용병대의 정식 대원으로 용병 길드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어스는 완전히 거너 용병대의 정식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어스는 일행에게 점심을 대접한 뒤 곧장 토머스 마을로 길을 재촉했다.
마차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으로 가는 마차는 구할 수 없었다.
쪄 죽지 않으려나.
어스는 어제 구입한 크고 튼튼한 배낭 가득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서 바리바리 채웠다.
그 무게만 20킬로그램이 넘었다.
인벤토리가 있어 다행이지 아님 심한 고생을 했으리라.
점심을 사줘서 그런지 아니면 얼마 동안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성문까지 나와 배웅했다.
다시 한 번 그들과 인사한 어스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어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거너 용병대는 하나둘 몸을 돌렸다.
“어스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몰라? 어린앤데.”
“린다 누나, 저 녀석 은패 2급이라고요. 그리고 오크 목에 창을 박던 모습 생각 안 나요?”
“대견했지. 누구처럼 질질 짜지 않고 말이야. 아! 벌써부터 우리 어스 안아보고 싶네. 쩝쩝.”
“내, 내가 정상이고 어스가 이상한 거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그리고 어스도 남자라고요. 그리고 저맘때의 남자애들이 성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왕성한지 알아요? 누나의 갑작스러운 덮침은 어스에겐 엄청난 고문입니다, 고문.”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린다가 야릇한 표정을 본 니코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악동에게 나쁜 장난을 알려준 기분이었다.
‘어스야 형을 용서해라.’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은근 뒤끝이 긴 녀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 * *
어스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토머스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긴 하절기 덕분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아는 얼굴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 자경단의 대장인 코틴이었다.
“엇, 어스구나.”
“안녕하세요. 코틴 아저씨.”
“하하, 나야 안녕하지. 집으로 가는 길이냐?”
“예. 혹시 저희 집이 어딘지 아세요?”
“아! 그렇지 넌 모르겠구나. 하하. 저쪽으로 쭉 가면 감나무 한 그루가 보일 거야. 그 집이 너희 집이다. 참, 행크 씨에게 들었는데, 너 용병 일을 한다며?”
갈색 자작나무 마을과 토머스 마을과는 피어스 남작령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두 마을 간의 왕래는 잦은 편이었다.
물론 남자들에 한해서다.
“예.”
“그렇구나, 그런데 어스야.”
“예.”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네가 마법사라며?”
코틴의 두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일반인들에게 있어 마법사는 기사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시각적으로 마법사가 기사보다 낫기 때문이다.
만약 실전에서 기사와 마법사가 일대일로 싸울 경우 근접전에선 기사, 원거리에선 마법사의 승산이 높다.
그러니 누가 낫고 못하고의 차이를 논하는 건 사실 그들 사이에선 의미가 없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예.”
어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가족들이 이 마을에서 홀대 받는 일이 없도록.
“이제 너희 가족도 여기 사니깐 너도 우리 마을 일원이라고 볼 수 있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럴까 싶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데.
성가신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정착한 마을에서 자경대 대장은 끗발이 있는 위치다.
“그렇죠.”
“그렇지, 그렇고말고.”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인지 코틴은 함박 웃었다.
그에 꾸벅 인사한 어스는 코틴에게 잡혀 있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달리듯 걸었다.
* * *
행크네가 이사한 집은 마을에서 감나무 집으로 불리었다.
원래 저 집에 살던 사람들은 젊은 부부로 그들은 이번 고블린 사태를 통해 주도에 정착했다.
가진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들이 주도에 정착하기로 하면서 저 집에 대해 알게 된 행크는 냉큼 그 집을 구입했다.
구입자금은 영지에서 나온 보상금과 가족들이 그간 모은 돈, 그리고 행크와 어스가 고블린 토벌에 참가하면서 받은 돈 전부가 들어갔다.
루시는 마당에 드리워진 낯선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루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오빠?”
“그래 나다.”
“어떻게 된 거야? 용병 한다고 했잖아?”
루시의 얼굴에선 반가움이 가득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빠가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용병이야. 그런데 부모님은?”
루시의 목소리가 꽤 컸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는 자작나무 요새에서 일하고 계셔. 일주일에 한 번만 와. 엄마는 마을 공동 방앗간에 가셨어. 곧 오실 거야.”
“자작나무 요새에서 일한다고?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데?”
“1년 계약직 병사로 근무하게 됐어. 아빠 말고 마을 사람들 몇몇이 그런 식으로 근무하게 됐나 봐.”
고블린을 퇴치했지만 다 죽일 수는 없었다.
물론 요새로 거듭난 마을이라 전처럼 맥없이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스는 이런 질문을 던졌지만 루시는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신다고?”
“응, 나흘 뒤에 오실 거야. 오빠 온 거 알면 아빠가 되게 기뻐할 텐데.”
“내일 아빠에게 들리면 되지. 참, 생활은 어때?”
“별다를 거 없어. 낮에는 엄마랑 약초 캐고 돌아와선 약초를 다듬고 말리는 일을 하지. 간간이 텃밭도 가꾸는 게 전부야.”
“어디 아파? 목소리에 왜 힘이 없네.”
어스의 물음에 루시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심심하니깐.”
주도에서 잠깐 생활한 루시는 그곳에서 살고싶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돈이 문제였다.
적당한 직업을 구한다면 못 살 것도 없지만, 사냥꾼으로 평생을 살아온 행크나, 간간이 약초를 캐서 내다 파는 일을 해온 엘이나가 주도에서 직업을 찾는 건 매우 어려웠다.
그곳에 뒷배가 있거나 혹은 여유자금이 넉넉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여유가 없다 보니 토머스 마을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더욱이 1년이라곤 하지만 병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행크 입장에선 토머스 마을로 올 수밖에 없었다.
“넌 주도에서 살고 싶어?”
“당연한 거 아냐? 아예 모르고 살았다면 모를까.”
“오빠가 돈 많이 벌면 그렇게 해줄게.”
“저, 정말? 언제?”
“당장은 나도 여유가 없어.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정말이지? 믿어도 되는 거지?”
“어허, 내가 누구냐? 마법사야, 마법사.”
어스는 큰소리 땅땅 칠 수 있는 지금의 자신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존경, 흠모, 동경 등등 그동안 받지 못한 여동생의 시선도 그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곧 남매의 어머니 엘이나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스를 본 엘이나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나 곧 떠나야 한다는 말엔 크게 실망했다.
엘이나는 집안의 식재료를 몽땅 털어 멋진 저녁상을 마련했다.
아버지가 빠져 허전했지만 어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과장을 섞어 떠들었다.
더해 주도에서 사온 선물을 어머니와 여동생의 품에 안겼다.
루시는 마냥 기뻐했고, 엘이나는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돈 무서운 줄 모른다며.
역시, 어머니.
“알았어, 알았다고. 앞으론 열심히 모을게. 그리고 엄마.”
“응?”
“얼마 안 되지만 이거 받아.”
“이건 뭐야?”
“뭐긴 뭐야 아들이 이번에 번 돈이지.”
“됐어. 그건 네가 써. 우리보다 밖에서 생활하는 네가 돈 쓸데가 많을 거잖아.”
“내가 쓸 건 당연히 따로 챙겼어. 그러니깐 이건 엄마가 비상금으로 갖고 있어. 얼마 안 돼.”
어스의 말과 달리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본 루시는 선물도 팽개치고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게 돈 좋은 줄은 알아서.
“엄마, 얼마야? 얼만데? 빨리 열어봐.”
“루시, 이건 오빠가 목숨을 걸고 번 돈이야. 그러니 이 돈은 절대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이야. 명심해.”
“칫, 누가 뭐래. 그냥 얼만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엄마, 그냥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그냥 써. 그러라고 준 거니까.”
큰소리 탕탕 치는 어스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역시, 돈은 이렇게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