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이, 이보게.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내게도 그 깨들을 나눠 줄 수 없겠나? 물론, 사람마다 깨달음이 다른 건 아네만 그래도 평생 2서클의 울타리에서 고통 받는 내 사정을 고려해서 딱 한 마디만이라도 부탁하겠네.”
부탁을 하러 왔는데 오히려 부탁을 받게 되자 어스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갑인데 지가 갑인 줄 모르고 을처럼 행동하면 그건 상병신이다.
적어도 어스는 그런 상병신은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간절하게 요청하시니……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죠.”
“고, 고맙네. 진정 고마우이.”
대화의 장이 어스의 주도하에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어스는 일반인이 떠드는 말이 아닌 진짜 마법사에게서 그들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노골적으로 묻지 않았다.
적당히 맞장구치며 자신의 무지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삐걱거릴 경우엔 있지도 않은 깨달음을 투척했다.
덕분에 어스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노인은.
“그렇군,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도 나쁘지 않겠어. 허허.”
자신이 막 지어낸 말에 반응하는 노인이 크게 반응했고, 그에 어스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참고로 어스가 노인에게 해준 말은 스킬을 쓸 때의 느낌과 필요 마나 값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고작 그것이 노인에겐 어떤 영감을 준 듯했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걸어가는 길과 자신이 걸어가는 길엔 접점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능력은 무조건 비밀이야.’
아무튼 결과적으론 양쪽 다 이득인 대화의 장이었다.
“이런 이런.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이 나이 먹고도 여전히 3서클의 벽 앞에서 헤매고 있는 지드라고 하네.”
“어스라고 합니다.”
* * *
‘다들 힘들게 마법을 배우는구나.’
지드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쪽 세계의 민낯까지 파헤칠 순 없었다.
마탑 소속도 아닌 자유 2서클 마법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나 어스에게 있어서만큼은 그와의 시간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지의 끝은 제 자신은 물론 주변에게까지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에.
‘이 좋은 생명력도 없고.’
상태창에 나와 있는 자신이 직업이 마법사가 아닌 기사였다면 생명력이 톡톡히 제 몫을 다했을 것이다.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부상이나 그에 따른 자극(?)으로 인해 멈칫거리는 사이 이슬처럼 날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얼마 전 어스가 호미 한 자루로 고블린의 찍어 댔던 것도 다 생명력이 가진 신비한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었다.
맞아도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으니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는, 극단적이나 효과 하나는 확실한 그 방식을 고민 없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마법산걸.’
마법사였기에 지력과 정신 스탯에 업적 포인트를 분배해야 보정이 되지, 직업과 연관이 없는 힘과 민첩 스탯의 경우에는 그러한 보정이 없었다.
레벨 하나당 1업적 포인트를 받는 처지에서 업적 포인트 10개를 줘야 겨우 제 몫을 해내는 두 스탯에 어찌 이 귀한 걸 먹이랴.
그래도 체력 스탯은 신경 써야 한다.
다행히 체력은 힘과 민첩 스탯과 달리 아무런 제한이 걸려 있지 않았다.
만약 그런 제한이 걸려 있다면 복장이 터져 버렸을 것이다.
참고로 관청과 지드가 운영하는 마법 물품 상점 이외에도 어스는 용병 길드 지부에 들렀다.
등록 신청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 앞에서 좌절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영주에게 천 테스를 얻었지만 그 돈은 어머니가 보관하고 있었다.
달라고 하면 주긴 하시겠지만 고블린으로 인해 전 재산이 날아간 상황에서 그 돈은 가족의 미래와 직결된 생명줄이기에 한 푼도 소홀히 쓸 수 없었다.
‘아니, 그건 투잔데.’
당장은 투자를 받더라도 수익은 내기 힘들다.
마나가 무한하여 스킬을 숨 쉬듯 난사할 수 있다면 모를까, 총량과 회복 시간에 제한이 있다 보니 그 공백을 메워줄 동료가 필요하다.
그것도 믿을 수 있는 동료여야 한다.
당장은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서 용병 등록을 하더라도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일단 아버지와의 합류가 우선이다.
* * *
“모레라고?”
“응.”
“그럼 네 아버지도 그때 오시겠네. 걱정했는데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네.”
오늘 관청에 서가 알아온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활짝 핀 표정을 보자 아들의 한계가 보였다.
티격태격해도 역시 끝까지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건 자식보단 부부인 듯했다.
“난 여기 쭉 살았으면 좋겠다. 볼 것도 많고, 안전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루시가 그리 말하였다.
형편이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몬스터라곤 모르고 살았던 고향 마을을 보니 더더욱 안전한 터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도의 미친 물가로는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론 2달이 한계였다.
여관에서 생활하는데 음식도 사서 먹어야 하다 보니 지출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집을 얻어 사는 것도 그 역시 문제였다.
집을 살 수 없는 형편이니 월세로 구해야 하는데, 거기엔 상당한 액수의 보증금이 있어야 한다.
지난 며칠 어스는 물론 엘이나와 루시와 나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녔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종착지는 역시 돈이었다.
“내게 뭘 기대하는 거야?”
“마법사잖아?”
“닭으로 치면 난 병아리라고, 갓 걷기 시작했어.”
“칫, 마법사도 별거 아니네.”
“응, 넌 그런 별거 아닌 마법사도 못 되지.”
이런 말장난도 할 수 있는 건 오늘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이런 말장난도 서로 하지 않았다.
어스는 어스대로, 루시는 루시대로 집안을 걱정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걱정을 크게 덜 수 있었다.
진정한 가장이 귀환 중이었으니까.
“참, 엄마.”
“응.”
“나 고블린 토벌에 참가할 생각이야.”
“뭐? 그 위험한 일을 왜? 안 돼.”
“안 위험해. 토벌대 따라서 가는 건데 위험할 리 없어.”
“벌써 잊었어?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그런데 다시 그런 고생을 하겠다는 거니? 엄마는 반대다. 알았지? 엄마 반대했어. 분명히.”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다니까. 영지 차원에서 인원을 꾸려서 출전하는 거라고. 난 거기에 동승해서 힘을 보태는 거라고. 전처럼 놈들과 뒹구는 일은 결코 없어. 그리고 잊었어? 나 마법사잖아.”
당장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갈색 자작나무 탈환이다.
마을 사람 모두 죽었으니 탈환해 봐야 거기 누가 살겠냐마는 마을이 자리한 위치를 생각하면 그냥 놀려두지 않을 것이다.
‘뭐라도 짓겠지.’
그게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번 기회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용병을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첫째요, 둘째는 금전,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바로 자기 자신의 성장이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야.’
어머니가 싫어해도 어스는 강행하기로 이미 단단히 마음먹은 상태다.
문제는 아버지.
‘이건 타협이 여지가 없어.’
엘리아는 아들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들이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마법사니까.
“모르겠다. 아빠 오시면 아빠랑 이야기해 봐. 엄마보단 아무래도 아빠가 더 많이 아실 테니까.”
“고마워. 엄마.”
“아빠가 반대하면 나도 반대야. 알았어?”
“봐서.”
“엄마, 엄마. 나도 오빠 따라갈게.”
어스에 이어 루시까지 엘이나의 속을 긁었다.
어스까진 참을 수 있었다.
이치에 맞으니까.
하지만 루시는 아니었다.
또래보다 힘도 세고 활도 제법 잘 쏘지만 거기가 어디라고 어린 계집아이가 따라간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이 받쳤는지 끝내 루시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여주는 엘이나였다.
딱!
“악! 아파, 아프다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동생을 쿨하게 외면하는 어스였다.
그러게 주제를 알아야지.
‘어린애들 앞에선 냉수도 마음대로 못 마신다더니.’
그래 봐야 어스와 루시의 나이는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저맘때의 두 살은 서른, 마흔 넘어서와 의미가 남다른 법.
“엄만, 오빠만 챙기지! 나는 주워온 자식이지!”
막내의 생떼가 터졌다.
아버지는 마냥 오냐오냐하겠지만 상대는 어머니다.
그럼에도 저러다니.
‘닭대가리.’
이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 * *
피어스 남작의 연락을 받은 토벌대 일부가 드디어 도착했다.
갈색 자작나무 마을 출신은 한 명도 빠짐없이 왔다.
“어, 어스야!”
“아빠!”
그리 오래 떨어진 것도 아니었음에도 워낙 다난한 일을 겪다 보니 부자의 상봉은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깊었다.
매초 피를 말리는 불안감에 시달렸던 행크의 얼굴은 그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어, 엄마와 루시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자.”
주위의 시선이 모두 부자를 향하고 있었다.
특히, 갈색 자작나무 마을 출신들이 경우에는 우르르 몰려오는 중이었다.
어스는 그들을 보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의 더 빨랐다.
행크와 어스는 그들에 의해 포위됐다.
가까이서 본 그들의 얼굴도 말이 아니게 상해 있었다.
가족의 안위가 원인이리라.
“뭐죠?”
어스는 아버지의 뒤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향해 말하였고, 이를 본 행크는 깜짝 놀랐다.
아들이 동향인들을 냉랭하게 대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의 당당한 행동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아들의 심정에 큰 변화가 생긴 건가?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 행크였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됐어?”
“다른 사람들도 여기 있어?”
“우리 아들은?”
“딸은?”
사람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어스에게 물었다.
어떤 이는 그를 잡으려고까지 했다.
어스는 뒤로 몸을 스윽 빼며 그 손을 피했다.
그에 행크가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그 손을 탁 쳤다.
“질문은 괜찮지만 내 아들은 건들지 마라. 그랬다간 손모가지를 꺾어 버릴 테니까.”
“야! 지금 내가 네 아들 어떻게 하겠다는 거 아니잖아?”
다른 것도 아닌 가족의 생사다.
그러다 보니 남자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대거리했다.
그에 행크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한 발을 내디뎠다.
“대답만, 대답만 듣겠다는 거 아냐! 우리 모두.”
행크는 미친 황소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처음부터 이런 별명을 가진 건 아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얻게 된 별명이었다.
이로 인해 행크는 언제나 혼자서 사냥에 나가곤 했다.
그것은 극히 위험한 일로 작은 사고도 대형 사고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여 누구도 혼자서 사냥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행크는 몇 년을 그렇게 혼자서 사냥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려왔다.
가족들 앞에선 단 한 번도 이를 티 내지 않았다.
집에선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였고, 믿음직한 남편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왔다.
어스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묻는다면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기에 질문한 인간의 주둥이를 걷어찰 것이다.
개도 아닌 게 개소릴 지껄이니 당연한 결과 아닌가?
‘참, 아빠도 그랬었지.’
다 좋은 데 가끔 생각 없이 말하는 게…….
행크의 대응에도 사람들은 필사적이었다.
여차하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기세였다.
저들이 좀 더 마음고생 했으면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아빠, 잠깐만.”
돌아서 어스를 바라본 행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떠나기 얼마 전부터 바뀐 느낌이 들었다.
긍정적인 변화라 참 기뻐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행크는 아들을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행크가 한발 물러서자 장내의 흉흉했던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
사람들의 입이 다시 벌어지기 전 어스가 먼저 입을 뗐다.
단호하게.
“주도에 머물고 있는 건 우리 가족밖에 없어. 당신들의 가족들은 보지 못했어. 그러니 당신들이 우물을 파. 목마른 사람이 그러는 거잖아.”
받은 그대로 돌려줬다.
저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저들은 그래야 된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긴 그런 양심이 있었다면 열 살도 안 된 꼬맹이를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또 열불이 터지는 어스였다.
하지만 더는 전진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마음이 더 소중하였기에.
“아빠, 이제 가요.”
사람들은 더 이상 어스를 막지 않았다.
미진한 감이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마음이고 상대는 이미 모든 걸 다 말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몇몇 말귀가 어두운 자들이 큰 소리를 냈지만 고개를 홱 돌린 행크의 사나운 눈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에서 멀어지자 행크이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스야.”
“응.”
“마을 사람들 소식은 알지 못하는 거니?”
어스에게 갈색 자작나무 마을은 거지 같은 곳이다. 좋았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인지, 애초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반면 행크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싫었던 기억도 있었겠지만 그 못지않은 좋은 추억도 있었다.
그래서 행크는 어스처럼 마을 사람들을 완벽하게 미워할 수 없었다.
“신경 쓰여?”
“아니라곤 말 못 하겠다. 그래도…… 고향 사람들이잖니.”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음. 그렇구나.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냐?”
여관으로 가는 동안 어스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자신의 활약상은 서프라이즈를 위해 일부러 제외했다.
때문에 이야기에 허점이 생겨 버렸지만 화자도 청자도 누구 하나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 *
“여보!”
“아빠!”
엘이나와 루시가 달려와서 행크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을 안고도 행크의 품은 넉넉했다.
남은 그 품이 아까웠을까?
“너도 안겨, 우리 가족 모두 안아보자. 허허.”
“남사스럽게.”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를 안아주는 어스였다.
환하게 웃으며.
그리고 기쁨도 잠시 한숨을 돌릴 때쯤, 어스는 아버지에게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아빠, 나 마법사야.”
“하하, 축하한다.”
믿지 않았다.
다들 그러니깐 상처 받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된다.
‘파이어 애로우.’
행크의 입과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 새끼 고양이처럼 움츠린다.
“너, 너…….”
“역시, 기대했던 반응이네. 후훗.”
그 이후로 행크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