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 (74/75)

  

# 74.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는 모양인지 오후 들어 유난히 후텁지근해 진 날씨 속에 빅토리아풍의 라이언 호텔 주차장은 놀라운 빅뉴스를 취재하기 위해 각 언론사에서 몰려든 취재진들의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톱스타 은선우의 요청에 따라 갑작스레 라이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리게 된 기자회견의 취지가 자못 쇼킹한 토픽 감이었던지라 회견장으로 발 빠르게 향하고 있는 취재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적잖은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트 중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온데 간데 없이 실종되어 버린 연인을 찾기 위해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도움을 구하고자하는 톱스타의 기자회견 이라니. 정말이지 사상 유래가 없는 초유의 기자회견 발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견장에 당도해 각자 자리를 잡은 기자단들은 직업적인 관심 이 전에 인간적인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이다 호소문 발표를 위해 단상 앞에 나타난 은선우의 모습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사건의 진위 여부도 잘 모르는 채 새 앨범 출시를 앞두고 기획사측에서 꾸민 쇼일 지도 모른다고 악담부터 지껄여대던 몇 몇 험구가들조차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질 만큼 초췌해진 만인의 우상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선우는 단상 뒤 대형 스크린에 확대 투사된 희원의 사진을 애써 외면하고자 노력했다. 호소문을 발표하는 동안 혹여 자신의 음성이 떨릴까봐, 혹여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게 될까 봐 신중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로써는 하루라도 빨리 희원을 찾아내기 위해 그의, 아니 그룹 전체의 명성을 담보로 걸고 강행하는 이 극단의 조처가 싸구려 신파극처럼 비춰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슬그머니 그의 무릎을 토닥여주던 성진이 아니었으면, 또한 다른 반대쪽 자리를 듬직하게 지켜주던 준희가 아니었으면 선우는 못내 자신의 감정을 억제치 못했을 지도 몰랐으리라.

  장내

에 모인 기자들을 향해 성진이 그룹을 대표해 간단한 인사말과 기자회견의 취지를 짧게 설명한 뒤 마이크를 선우에게 넘겼다. 선우가 막 입을 떼는 순간 초조감으로 인해 잔뜩 입안이 말라있었던 탓인지 심하게 마른기침부터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단상 위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실종자의 이름은 채희원 입니다."  

  자신의 구역을 한 바퀴 순시하기 위해 차를 몰고 나왔던 강혁은 교차로에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횡단보도 건너편 쪽에 서있던 초현대식 건물에 무심히 시선을 던지던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건물의 한 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던 대형 스크린 안에 다름 아닌 희원의 얼굴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이어지는 화면 속엔 확대한 희원의 사진을 등지고 앉아 무슨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듯한 은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예감 속에 강혁은 허겁지겁 차내에 비치된 소형 TV수상기를 켜고 부지런히 채널을 돌렸다. 그가 레드비트의 기자회견이 생중계 되고 있는 채널을 찾아 고정했을 때 카오디오 스피커를 통해 감정을 자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음이 역력한 선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이 방송을 시청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누구든 최근 몇 일 사이 여기 제 뒤편에 있는 사진 속의 사람을 보신 분이 계신다면 서슴치 말고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 피치 못한 사정에 의해 채희원양을 붙잡아 두고 계신 분이 이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희원이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절대로 책임 같은 건 묻지 않겠습니다. 약속 드립니다. 원하시는 만큼 보상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 희원이 아니 채희원양만 무사히 돌려보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정말... 부탁드립.."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주체치 못한 채 강혁은 수상기의 전원버튼을 거칠게 눌러 꺼버리곤 훅하고 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가 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배갑을 찾은 후 담배 한 개피를 막 입에 물었을 때 뒤편에 정차 중이던 차량에서 연거푸 클랙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강혁을 재촉하는 소리였다. 갑작스레 짜증이 치밀어 오름을 느낀 강혁은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 계속 클랙션을 눌러대고 있는 그 운전자의 멱살을 거머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사과의 뜻으로 오른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이곤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하릴없이 강남대로 주변을 맴돌았다. 

  강혁이 희원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혁에 의해 희원의 납치가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이 후 시작된 수면 장애 증세가 예기치 못했던 선우의 방문으로 더욱 심화된 미랑은 밤이고 낮이고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가 누적된 몸으로 TV 앞에 앉아있었다. 불면증에 더해 시시각각 가중되는 정서불안 증세가 비정상적인 폭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하루종일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찾는 그녀의 주변엔 파출부를 시켜 사온 간식거리가 즐비해 있었다. 그 날 저녁도 미디엄 사이즈 피자 한 판과 치킨 두 조각을 남김 없이 먹어치운 지 얼마 안 된 그녀의 앞에는 프링글스 감자칩 한 통과 전기구이 오징어 한 마리, 캔 맥주 두 개와 아몬드 한 봉지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계속되는 불면으로 붉게 핏대가 선 그러나 반쯤 풀린 듯한 눈으로 한 손에 맥주 캔을 든 채 다른 손으론 기계적인 동작으로 TV 리모콘을 눌러댔다. 하지만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곁눈으로 TV 화면을 줄곧 응시하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얼어붙기라도 한 듯 일시에 모든 동작을 정지했다. 그녀가 하루 대 여섯 편씩 비디오 테이프를 봐 제끼며 나름대로 모니터링을 한다는 명목 하에 일시정지 시켜 들여다보던 화면인 양 그녀의 움직임이 순간 멈춤을 했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의 정지동작이 풀렸을 때 그녀의 얼굴엔 걷잡을 수 없는 경악의 표정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잔뜩 확대된 동공의 크기가 그녀의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선우 오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피로감 때문인지 쉰 듯한 음성으로 미랑은 그렇게 혼자 소리치며 리모콘으로 TV의 볼륨을 높였다. 그리고 다시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TV화면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TV에서 선우가 실종된 희원을 찾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까지 나와 희원을 애타게 찾는 선우의 모습이 그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세태 속에서 저와 같은 기자회견은 실로 무모한 짓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 선우의 기자회견은 대중들의 동정을 사고도 남음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겉보기완 다르기가 십상이라는 것을 같은 바닥에 몸담고 있는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꼬투리 삼아 말도 안 되는 갖가지 추측성 유언비어가 난무할 것이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올릴 것이며 그런 상황을 틈타 그의 인기를 시기해 음해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에겐 호기를 제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연예가의 매니저들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이 관리하는 연예인의 사생활을 되도록 감추고 부터 보는 이유도 대부분 그런 때문이었다.

  선우의 기자회견 방송이 끝난 후 그러지 않아도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리느라 불면증까지 생겨버린 미랑은 탈진 상태에 가까운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진득이 한 자리에 앉아있을 수조차 없었다. 설마 선우가 그의 장래까지 희생시킬 각오로 그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미랑에게 그의 기자회견은 너무나도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홧김에 희원을 잡아다 어디 오지에라도 갖자 팔아버리라고 강혁에게 악다구니를 쓸 때만 해도 일이 정말로 이렇게 커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그녀로선 열 손가락의 손톱을 물어뜯어 피가 날 지경이 되어도 느끼지 못할 만큼 점점 더 가중되는 혼란스러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지옥에라도 빠진 기분이었다.     

  한동안을 가만히 앉아있지도 그렇다고 서있지도 못한 채 거실을 서성대던 미랑은 거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든 후 성급한 손놀림으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전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째질 듯한 음악소리와 간드러지는 여자들의 웃음  소리에 묻히다시피 한 강혁의 목소리를 겨우 확인한 미랑이 말했다. 

  [오, 이게 누구신가. 나의 귀여운 누이님이시군.]

  "뭐야, 또 술집이야?"

  술에 취했다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는 강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그의 누이였던 미랑은 금세 그가 술에 만취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또 술집이라니? 내가 노는 바닥이야 뻔하지. 나의 일터이자 놀이터가 바로 술집 아니냐.]

  "지금 한가하게 술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야? 남은 지금 속이 숯덩이가 다  되었는데."

  [저런 저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누이? 또 어떤 자식이 우리 누이를 열받게 만들은 거야?]

  "희원이. 희원이 걔 지금 오빠가 데리고 있는 거 맞지?" 미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누구? 희원이? 가만... 희원이라... 걔가 누구더라?]

  "지금 나 농담하고 싶은 기분 정말 아니거든? 걔 지금 오빠가 데리고 있는 거 맞지?"

  [아하! 희원이라. 이제 생각이 나는군. 그 비할 데 없이 촌스러운 외모에 사리분별, 앞 뒤 상황 판단 못하는 아둔한 여자애를 말하는 거지? 헌데 갑자기 그 애는 왜 찾지? 어디 오지에라도 갖다 팔아버리라면서.]

  "서, 설마 그 앨 어디다 팔아 넘긴 건 아니겠지, 이강혁?" 

  [아니긴. 벌써 팔아 넘겼지. 워낙 인물이 없어서 돈은 별로 안 됐지만.]

  상황이 점점 심각한 방향으로 치닫자 더 늦기 전에 한시 바삐 희원을 돌려보내라는 얘길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미랑은 그와 같은 강혁의 대답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길길이 뛰었다.      

  

  "뭐? 야, 이강혁 너 미쳤어? 누가 네 맘대로 그러랬어? 엉? 너 그거 정말야?"   

  [오래 못 데리고 있는다고 했었잖아.]

  "너 정말 나 죽는 꼴 보고싶어, 이강혁! 다, 당장 도로 찾아와! 알았어? 당장 도로 데려오란 말이야! 안 그럼 나 정말 죽어. 이 번에야 말로 정말 죽는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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