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미랑으로부터가 아니라 마치 온 세상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한 듯한 심정으로 선우는 밤의 어둠 속으로 나와 섰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패배감이 성난 파도처럼 그의 전신을 덮쳐왔다. 선우는 당장이라도 꺾일 듯 무기력해진 두 다리에 간신히 힘을 실어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미랑의 아파트를 등지고 돌아서며 그는 갑자기 자신의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형언키 어려운 회의를 느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등뒤에서, 자신이 조금도 의심치 않는 동안 그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마저 일었다. 아니 그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적개심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내 선우는 홀로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품었던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보같은 자식.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그저 사과를 위한 순수한 의도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까지 꿇은 행위가 과연 네 진심이었느냔 말이다 은선우? 역겨운 쇼라고 했나? 맞아. 사실 넌 그녀의 목덜미라도 끄러 잡고 미친 듯이 희원을 찾아내라고 소리치고 싶어서 찾아왔을 거야. 누군가에게라도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녀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었겠지. 이 모든 상황이 결국 나의 책임이란 걸 넌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었던 거라구.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는 너무나 견디기 힘드니까. 그래, 결국 넌 역겨운 비겁자일 뿐이야.'
하지만 그 때 선우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전가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심정으로 그가 희미하게 품었던 의혹이 바로 진실이란 것을.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가 미랑의 관자놀이에서 마치 공포에 사로잡혀 날뛰는 짐승처럼 펄떡거리는 혈관을 목격하기만 했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진실을 말이다.
♧
일체의 도움을 사양한 후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주방 안을 어정대고 있던 사내들을 밖으로 내몰다시피 한 희원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다듬고 씻어 각각의 요리에 알맞게 썰고, 잘라 준비하는 일은 노련한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다. 능숙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반시간 남짓한 동안 준비를 모두 끝낸 그녀는 기껏해야 라면을 끓여먹는 데나 사용되었을 법한 법랑 냄비에 전골재료를 모양 좋게 담은 후 적당한 솥이 없어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서 끓이고 있던 육수를 전골재료 위에 부어 불 위에 앉혔다. 그나마 장을 다 보고 나오기 직전 희원이 강혁에게 물어 조리에 필요한 프라이팬이며 냄비 또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들을 새로이 몇 개 더 장만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손빠른 그녀라도 그처럼 빠른 시간 내에 사내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만큼의 여러 가지 요리를 준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형식상 겨우 붙어있다시피 한 주방이라 매우 협소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싸구려 목재로 만들어진 6인용 크기의 식탁에 그녀가 나름대로 구색을 맞추어 부지런히 마련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보니 꽤 그럴싸해 보였다.
"들어와 식사들 하세요."
희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들은 한결같이 주방으로 바람처럼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강혁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을 자제했다. 그동안 주방으로부터 솔솔 새어나오는 갖가지 음식 냄새들을 맡으며 군침을 삼키면서도 사내들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펼쳐들고 있는 강혁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행여 침 삼키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더랬다. 폭력조직의 보스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법 해 보이는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던 그들의 큰 형님은 역시나 사내들과는 격이 다르게 초연한(?) 얼굴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벽시계 속의 큰바늘이 한 바퀴를 다 돌도록 강혁이 단 한 장의 책장도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뭣들 해? 들어오라잖아."
강혁이 손에 들린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강혁이 앞서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앞장 선 강혁을 따라 주방 안에 들어선 사내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우와! 이게 왠 잔칫상이래요?" 재준의 입에서 제일 먼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 이건 버섯전골이네?" 평소 버섯전골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수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매운 낙지볶음이 있어서 국물요리는 순한 버섯전골을 준비해 봤는데 좋아들 하실는지 모르겠네요." 희원이 희미하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좋아하다 마다요."
"허, 정말 재주 있네. 그 새 이 음식을 어떻게 다 혼자......." 앞서 대꾸한 경수의 뒤를 이어 성택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식기 전에 어서들 앉으세요."
희원이 사내들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강혁은 남몰래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여기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군.'
희원을 포함해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희원은 사내들이 왠지 머뭇거리며 수저를 잡지 않는 까닭이 강혁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주방에 들어선 이 후로 줄곧 말문을 열지 않았는데 음식상을 마주하고 앉은 이 후로도 그저 묵묵히 눈으로만 상차림을 훑고 있었다.
"독약 같은 건 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제일 먼저 수저를 집어든 희원이 보란 듯이 이 음식 저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으로 가져가며 그렇게 말하자 강혁은 실소를 터뜨리며 졌다는 표시로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 보이곤 곧 수저를 들었다. 그러자 세 명의 부하들은 기다렸다는 듯 번개처럼 수저를 집어들고 각기 제일 먼저 구미가 당기는 음식을 입으로 실어다 나르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식사를 했지만 중간 중간 감탄사를 터뜨리며 희원의 요리솜씨를 칭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희원은 제일 먼저 수저를 들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떠 넣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실은 눈곱만큼의 식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티나지 않을 정도로만 대강 먹는 시늉을 하며 동기야 어떻든 간에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강혁의 부하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그들의 모습 위로 자연스럽게 레드비트의 세 멤버들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오빠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여기 붙잡혀있는 동안 오빠들 밥은 누가 해주지? 만약 내가 영영 오빠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래, 내가 만약 영영 돌아갈 수 없게되면... 오빠들도 결국 서서히 날 잊어가겠지? 선우오빠도 결국은 날 잊어버리게 될 거야. 어쩔 수 없이 결국엔......'
레드비트 하우스를 생각하면, 세 멤버들을 생각하면 복받쳐 오르는 그리움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의식적으로 그들에 대한 생각을 억누르고 있다시피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마련한 상차림에 더할 나위 없이 기꺼워하는 강혁의 부하들을 지켜보며 레드비트 멤버들을 떠올리지 않을 재간이 희원에게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복받치는 그리움을 억누를 재간도. 그리고 그녀 자신이 우려했던 대로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곧 속으로 이를 악물며 버티고 있는 그녀의 인내심과 의지를 여지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나약해져선 안 돼. 이대로 허물어져 서는 안 돼. 정신 바짝 차리는 거야, 채희원! 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
희원은 식탁 밑에서 남몰래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티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그녀는 그렇게 참아냈다. 담담함을 가장해야 했다. 약한 모습, 비굴한 모습 따위는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강혁에게는. 물론 그를 맞서 싸울 상대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희원은 최대한 그와 동등한 입장에 서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강혁은 그 동안 놀라우리 만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조그마한 여자의 눈빛이 어느 한 순간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어쩐 일인지 그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몇 십 초에 불과한 동안이었으나 혼란스러움에 갇혀있는 듯 보였던 그녀의 눈빛에 다시 담담함이 되돌아 올 때까지 강혁은 그녀가 남몰래 이를 악문 채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보았다. 그런 희원의 모습에 강혁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 자신의 여동생인 미랑을 포함해 그의 엄마, 그밖에도 여지껏 그가 보아왔던 어떤 여자들에게서도 그런 강인함은 느껴본 적이 없던 그였다. 때문에 여자들은 그저 걸핏하면 우는 소리를 하는 존재, 그저 분위기나 북돋아주는 꽃 같은 존재로만 여겨왔을 뿐이었다. 헌데 어지간한 사내라도 주눅이 들 법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 희원의 인내심과 용기에 강혁은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강혁이 평생토록 지울 수 없을 만큼 깊고 강렬한 인상으로 그의 가슴속에 각인되었다.
♧
"매니저 형, 어떻게 일주일만이라도 안될까? 예. 예, 저희도 물론 잘 알지요. 하지만... 예. 예. 아니예요, 형. 형이 우리한테 미안해 할 일은 아니죠. 예. 알겠습니다. 네."
매니저와의 통화를 끝낸 성진은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대형 콘서트가 몇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희원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로 인해 반쯤 폐인이 되다시피 한 선우를 데리고 콘서트 준비를 강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기에 부득불 매니저에게 콘서트 일자를 좀 연기해달라는 부탁을 넣어보았지만 결국 이러 저러한 형편상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기획사 측의 입장 역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성진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우는 계단을 내려오다 성진이 전화통을 붙들고 매니저에게 사정 사정하는 소릴 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성진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심난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명치끝이 뻐근해 올만큼 가책을 느꼈다. 세상 무엇보다 희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시급했지만 그룹에 속해있는 선우 자신에겐 또한 함부로 할 수 없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어, 선우 내려왔구나."
선우의 부름에 심난한 얼굴로 혼자 생각에 빠져있던 성진이 고개를 들고 돌아보며 대꾸했다. 채 수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미안해, 형."
"뭐가?"
"콘서트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네 생각만 하다니. 그게 어디... 너 만의 문제냐? 또 그 딴 소리하면 나 화낸다." 성진이 자못 굳은 얼굴로 꾸짖듯 말했다.
"형 마음 나도 알아. 아무튼 남은 몇 일간이라도 콘서트 준비... 최선을 다해보도록 노력할게."
"......."
성진은 대꾸 없이 그저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속이 오죽할까싶은 생각에 성진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형. 그런데 먼저 성진형이랑 그리고 준희한테 나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두 눈에 진지함을 가득 실은 선우가 말했다.
"부탁?"
"응. 형하고 준희한테 허락 받아야 할 일이 좀 있어."
♧
신인 발굴에서부터 톱 클래스급 연예인들 관리에 이르기까지 연예인 매니지먼트 사업으로 명성을 쌓아온 N.S 기획사 빌딩의 사장실 안에서 그룹 레드비트의 멤버들과 호형호제하며 그들의 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던 홍실장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N.S 기획 대표 유동진 사장의 기색을 살피며 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은선우는 지금 어디있나?"
꽤 오랜동안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서인지 남다른 패션감각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 또한 적잖이 범상치 않은 유 사장이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흐음."
"콘서트는 그렇다 쳐도 새 앨범 출시 시기가 맞물려 있어놔서...... 물론 선우 본인 말로는 이 일로 인해 회사에 재정적 손실이 발생하게 되면 어떻게든 자신이 보상하겠......."
"정신 나간 놈."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평소 제 고집대로만 하기로 유명한 놈이 저렇게 숙이고 들어와 통사정을 하니 오죽하면 저럴까 싶기도 하고......"
그 자신 역시 선우가 한 시간 전쯤 자신을 찾아와 심중에 두고 있는 계획을 밝혔을 때 그것은 선우 개인뿐 아니라 그룹 레드비트 전체의 이미지 실추를 초래할 수도 있는 미친 짓이라며 그를 힐책하고 고개를 가로 저었었으나 인간적으로 선우의 입장을 공감하는 바도 없지 않아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사장실을 찾은 홍 실장이었다.
"그러라고 해."
"예?"
홍 실장은 예상외로 너무도 쉽사리 유사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무리수이긴 하지만 꽤 배당률 높은 도박이 될 수도 있어."
"도박...요?."
"자, 자넨 가서 자네가 해야할 일을 하게."
유 사장은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멀뚱히 서서 쉬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는 홍 실장을 향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앉아있던 회전의자를 빙그르 돌린 후 창 밖 아래로 펼쳐진 도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세상사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고있는 듯 노련함이 번뜩이는 눈빛의 오너는 묘한 스릴감을 맛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도박이지 도박이고 말고. 흔하디 흔한 연애 스캔들하고는 차원이 다를 테니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오겠지. 그것이 선우 이미지에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는 패를 열어봐야 알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