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아니, 갑자기 선우오빠가 여긴 웬일이지? 혹 뭔가 낌새를 차리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설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미랑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선우의 느닷없는 방문이 마치 무슨 저승사자의 방문쯤이라도 되는 양 오금이 저리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에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와의 대면을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침착해야돼. 침착. 침착. 희원이 일은 난 모르는 거야. 그래. 난 까맣게 모르고 있는 거야.'
우선은 아니 시종일관 시치미를 떼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다잡은 미랑은 자못 당당한 태도로 현관문을 열었다.
"여긴 웬일이예요?" 미랑이 성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집에... 있었구나."
감정을 가늠키 어려운 선우의 음성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던 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다행히 저승사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랑의 눈엔 그가 방금 저승길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핏기 하나 없어 보이는 낯빛, 거뭇한 그늘 한 가운데 퀭하게 가라앉은 두 눈. 그리고 안쓰러울 지경으로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에 미랑의 시선이 미쳤을 때 그녀는 아예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립글로스를 바른 것처럼 늘 촉촉함이 감돌던 입술이었는데.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다."
미랑은 그의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소릴 내는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정신이 난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코방귀를 뀌었다.
"하!"
왠지 미랑은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늘 오만해 보였던 그. 어쩌면 그런 그의 모습에 도취되어 그의 광팬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들기만 해도 고꾸라질 듯 위태로와 보이는 그의 몰골이라니.
'그 정도였어? 희원이가 정말 당신한테 그 정도의 존재였어?'
어쩌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건만 미랑은 입 안 가득 쓴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요. 나, 선우오빠 얼굴 보는 거 많이 불편해요. 그러니 돌아가 줘요."
그건 백 프로 단언하건대 난처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연극이 아닌 그녀의 진심이었다. 희원의 행방과 관련해 자신이 의심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는 무관한 묘한 압박감이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것은 갑작스런 선우의 방문 못지 않게 그녀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의 와중에서 그녀는 더더욱 예상치 못했던 선우의 행동에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가 갑자기 복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그녀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다, 미랑아. 진심이다. 너한테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어. 이제야...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나 오늘 네게 사과하러 찾아온 거야. 내 사과... 받아주라."
미랑은 숨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굳은 모습으로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그 곳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사죄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놀라움에 휩싸인 그녀가 말을 잊은 채 그저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그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선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용서하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날 욕하고 원망하고 싶은 만큼 욕하고 원망해라. 대신 희원이... 희원이는 건들지 말아주기 바란다. 부탁이다, 미랑아. 진심으로 이렇게 부탁할게. 희원인 제발 건들지 말아 줘."
순간 미랑은 몸 속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치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선우로 인해,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매달리듯 사정하고 있는 그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미랑의 얼굴에서도 일시에 핏기가 가셨다.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솟아오르고 숨이 막혔다. 하지만 미랑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선우를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대체 이게 무슨 행동이에요? 정말 어이가 없네. 지금 이걸 사과라고 하는 거예요? 희원이는 건들지 말아달라니. 내가 희원이한테 뭘 어쩌기라도 할까봐 이러는 거예요? 사람을 뭘로 보고. 하, 나원 참 기가 막혀서!"
"......"
"진심 어린 사과를 해도 받아줄까 말까 인데 뭐가 어쩌고 저째요? 당장 돌아가요! 나야말로 은선우, 채희원이란 인간들하고는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구요! 뭐하고 있어요? 돌아가란 말 안 들려요!"
자신의 계략이 들통날까 두려운 심리만큼 미랑은 더욱 가시 돋힌 태도로 선우를 내몰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선우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앉아있었다.
"좋아요. 맘대로 해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찾아와 이런 쇼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역겹기 짝이 없군요. 흥!"
말을 마침과 동시에 미랑은 가차없이 돌아서 집안으로 들어와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냉장고 안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는 그대로 입안에 들어부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대여섯 번 정도 물을 들이킨 후에야 미랑은 비로소 생수 병을 입에서 떼어내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미랑은 손에 들린 생수 병을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곤 식탁 의자 하나를 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보기 흉할 만큼 붉게 충혈 된 그녀의 두 눈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린 선우의 모습도 경악스러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초췌한 모습이 그녀의 머리 속과 가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로선 마땅히 통쾌해야만 하는 모습이었다. 선우와 희원을 향해 분노와 적개심을 키워 가는 동안 아마도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는 미랑은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사춘기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으로 막연한 애정을 품어왔던 은선우란 존재. 하지만 그런 그의 사랑을 정말이지 가당치도 않은 상대라고 여기던 희원이 냉큼 독차지 해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 일 수 없었던 미랑은 오늘 날 까지 비뚤어지고 맹목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미랑은 어쩌면 처음으로 선우에게 진실된 사랑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도 몰랐다. 더할 나위 없이 고통받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 역시 가슴 저미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니가 뭔데? 니까짓 게 대체 뭔데!"
허공을 향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후 무너지듯 식탁 위에 엎드려버린 미랑의 어깨가 잠시 후 가늘게 들썩거렸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소리 없는 흐느낌은 밤이 이슥한 시각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