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뭐야? 벌써 가려구?"
강혁이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팽개쳐있던 셔츠를 집어들자 혼미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자가 물었다. 그러나 강혁은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묵묵히 옷을 챙겨 입는 일에만 열중했다.
"같이 저녁 먹고 클럽에 데려다 주기로 했잖아?"
의아한 얼굴로 그런 강혁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다시 묻는다. 그러는 사이 옷을 모두 챙겨 입은 강혁이 침대로 돌아가 알몸의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앉아있는 여자 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 봐야 될 것 같다."
"당분간 한가할 것 같다며."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여자가 볼멘소리를 하자 격렬한 정사로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강혁이 달래듯 말했다.
"미안. 내가 다시 연락할게."
"수상해. 자기 혹시 다른 여자 생긴 거 아냐?" 여자가 강혁의 손길을 뿌리치며 물었다.
"그런 거 아냐."
"근데 아까 내 위에서 왜 딴 생각했는데?"
"뭐?"
"여지껏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자기 아까 날 안는 동안 머리 속으론 내내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잖아?"
"그런 적 없어."
여자의 앙칼진 다그침에 강혁은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로 단조롭게 대꾸를 해주곤 여자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언제 연락할 건데?"
"곧."
여자의 오피스텔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이 있는 지하층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코끝에서 여자의 진한 향수 냄새가 맴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지트를 향해 차를 달리는 동안 강혁은 운전석의 차창을 활짝 열어놓았다. 바람의 유린에 기분 좋게 머리칼을 내맡기고 그는 액셀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여름의 초입새로 접어들기 시작한 늦은 오후의 대기가 느긋한 안락감을 조장한 탓일까? 고급 유흥가 일대에서 한창 세를 떨치고 있는 조직의 중간 보스이자 무표정을 가면처럼 쓰고 다닌다는 평판의 그가 언제부터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태양이 서산을 향해 가속 없는 낙하를 아직 느리게 진행하고 있는 동안 강혁은 그와 그의 부하들 몇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건물에 당도했다. 호프집과 게임방, 당구장, 노래방이 있는 그 상가 건물은 그들의 주 활동 무대인 야간 업소 밀집 지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동네에 있었는데 조직간의 크고 작은 세력 다툼이 빈번한 지역을 적당히 벗어난 동네였다. 또 적당히 번화하고 적당히 유동인구가 많아 그와 수하들의 존재가 그닥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지역이기도 했다.
강혁은 다소 어두침침하고 좁다란 계단을 올라 맨 꼭대기 층인 5층에 다다르자 꽤 육중해 보이는 철문 옆으로 빠꼼히 튀어나온 초인종을 눌렀다.
"오셨습니까, 형님?"
함께 거주하는 부하들 중 가장 막내벌인(그러나 강혁보다 실제론 한 살 위인) 재준이 문을 열고 그를 맞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경직된 듯 보였다. 재준에 뒤이어 성택이 다가와 언제나 그렇듯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성택은 곰보자국이 있는 경수와 함께 강혁과는 꽤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또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는 부하였다. 헌데 어쩐 일인지 성택 역시 재준과 마찬가지로 석연치 않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강혁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부하들의 눈을 쏘아보며 물었다.
"저 그게 말입다, 형님. 아, 저기 그 아가씨가......"
"걔가 왜? 달아나기라도 했다는 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재준을 바라보며 강혁이 뜨끔한 심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게 아니구요. 우리가 계속 말리는 데도 그 아가씨가......"
"뭔 소리야? 성택아, 얘가 도대체 뭣 땜에 이렇게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 거냐?"
자꾸만 말끝을 흐리는 재준에게 답답함을 느낀 강혁이 막 성택을 채근하려 들 때였다.
"아가씨, 이건 우리 일이라니까요. 아아 이 것 참....."
"아저씨, 제가 일부러 아저씨 곤란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 아니고요 정말로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그냥 나한테 양보하세요. 부탁이예요."
"아, 조그만 아가씨가 고집은 항우장사구먼. 아깐 방이랑 욕실청소만 하겠다고 했잖아요? 이제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하겠... 아, 형님! 돌아오셨습니까."
공동으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욕실 겸 화장실을 나오면서 희원과 대걸레 하나를 맞붙잡은 채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경수가 재준과 성택 사이에 서있던 강혁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강혁의 시선은 재준이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리는 틈을 타 그의 가슴팍 근처밖에 오지 않는 조그만 여자가 슬쩍 대걸레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떠올린 다부진 표정에 붙잡혀 있었다.
"저희가 아무리 말려도 저 아가씨가 자꾸만 청소를 도맡겠다고 해서... 오후 내내 저렇게 실랑이를 벌이느라 애를 먹던 중입니다."
강혁의 뒤에서 성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강혁은 내내 여자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여자 또한 천연덕스럽게 그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번에도 이상스러울 만치 여자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것이 별스럽게도 강혁의 가슴속을 휘휘 저어대고 있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강혁이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이내 소파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굳이 말릴 이유도 없잖아?"
강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희원은 재준을 돌아보며 득의 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이곤 곧장 걸레질을 시작했다. 중간중간 욕실을 오가며 예닐곱 번은 족히 걸레를 빨았을 때쯤 바닥 걸레질이 끝났다. 대걸레질이라고 해서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면서 하는 손 걸레질보다 훨씬 수월한 것만도 아니었다. 구석구석 대강 치우며 살아온 흔적이 역력한 곳을 꼼꼼하게 청소해 나가자니 손도 더 가고 힘도 더 들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희원의 콧잔등에서 땀이 솟았다. 하지만 희원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였다.
희원의 모습을 내내 주시하고 있던 강혁은 희원이 손걸레를 들고나와 소파 주변 집기들과 탁자를 닦기 시작하자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후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희원이 탁자 다리를 닦고 있을 때 강혁은 탁자 위에다 두 발을 턱하니 올리곤 조금 전 희원이 열심히 닦았던 바닥에 아무렇게나 재를 털었다. 물론 탁자 위엔 아무리 못 본척하려 해도 절대 불가능한, 커다란 대접 만한 크리스탈 재떨이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묵직하게 앉아있었다.
희원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티슈통에서 얼른 티슈 한 장 뽑아 바닥에 떨어진 담배재를 집어내곤 강혁의 시야에서 좀 더 가까운 쪽으로 재떨이를 밀어다 놓았다. 그리곤 다시 탁자 다리를 닦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강혁은 계속해서 바닥에다 담배재를 떨구곤 떨구곤 했다. 희원은 곧 강혁의 행동이 의도적이란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가 재를 터는 대로 말없이 그것을 치워내곤 치워내곤 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강혁의 부하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재준은 사뭇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성택은 무표정을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은 호기심이 실린 눈빛으로, 경수는 다소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의도가 뭐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강혁이 희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어요." 여전히 걸레질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희원이 대꾸했다.
"그럴까?"
"네."
"......"
"......"
"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믿거나 말거나요."
"......"
"......"
"내게 잘 보이려는 속셈인가?"
"설마요."
"흐음."
사실 강혁의 눈에도 희원의 행동이 자신의 환심 따위를 사려는 어리석은 수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내심 그녀의 행동이 더더욱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뭐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 아저씨들을 방심하게 해서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거라면 그 역시 아니라고 미리 말씀드릴게요. 난 그냥 운동 삼아 하는 것 뿐 이니까요." 강혁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희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운동 삼아라......"
"가만히 있어봤자 심난하기만 하잖아요. 원래 난 기분이 심난할 때 열심히 청소를 한다거나 빨래를 하거나 하면서 시름을 잊곤 하거든요."
"훗. 그래 효과는 좋던가?" 희미하게 웃음이 떠오른 얼굴로 강혁이 물었다.
"네."
"얘들아, 뭐하고들 섰냐? 이 귀한 노하우를 빨랑들 받아 적지 않고."
강혁이 부하들을 향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희원은 순간 손놀림을 멈추고 강혁을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왠지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강혁이 빙글빙글 웃으며 희원을 향해 몸을 굽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런 단순한 방법 말고 탈출을 위해 따로 준비해둔 묘책도 있을 수 있겠군."
"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어요. 탈출 같은 건 하지 않아요. 만약 내가 탈출을 시도하게되면... 그래서 성공하게 된다해도 그걸로 끝인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우리 선우 오빠한테... 언제 어떻게 해코지를 할는지 모르니까."
강혁은 희원이 선우란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어떻게 표정이 달라지는 지를 보았다. 그녀는 말을 마치는 순간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강혁을 외면했다. 그리고 강혁은 그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맛보았다.
"혹시 날 어딘가에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이, 이상한... 그런 데 말고 청소나 주방 일이 필요한 데 잡부로 팔아줬으면 좋겠네요."
강혁은 문득 여자의 체념투의 말이 몹시도 마음에 거슬렸다. 일순 눈썹을 꿈틀하며 감정을 드러낼 뻔했던 그는 곧 냉정을 되찾은 후 희원의 손목을 끌어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좀 나가지."
다소 퉁명스럽게 느껴지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강혁은 희원을 이끌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놀라움으로 희원은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갑작스런 강혁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것은 세 명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강혁은 부하들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희원과 함께 문을 나섰다.
♧
엉겁결에 강혁의 손에 이끌려 갑작스레 밖으로 나오게 된 희원은 그저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강혁을 바삐 따라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벗어난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형 슈퍼마켓에 다다랐다. 슈퍼마켓 안에 들어섰을 때 강혁은 희원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의아함에 사로잡혀 희원은 강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탈출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면서."
비웃음인지 그저 단순한 웃음인지를 가늠키 어려운 미소를 띤 채 강혁이 말했다.
"날 시험하는 건가요?"
희원이 강혁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강혁은 어깨를 슬쩍 으쓱해 보이곤 이렇게 대꾸했다.
"청소 실력은 봤으니 주방일 실력도 좀 봐야지."
카터를 하나 끌고 와 앞장서 걷기 시작한 강혁이 다시 희원을 향해 물었다.
"요리할 줄 아나?"
"그럭저럭요."
"잘됐군."
그렇게 해서 희원은 현재 묘한 관계로 묶여있는 강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장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납치범과 납치된 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거의 없었다. 긍정은 하지 않았지만 강혁의 태도는 희원을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원은 강혁이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장을 보는 일.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굳이 별 생각을 하지않아도 그녀의 손은 기계처럼 잘도 알아서 야채를 고르고 고깃감을 집어든다. 그러는 중간 중간 희원은 주변 풍경을 돌아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이리도 활기차게 잘만 돌아가는 구나.'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희원도 강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희원은 번번히 그런 자신을 다독였다. 자신의 입으로 강혁에게 말했듯 그녀가 탈출에 성공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젠 미랑 하나뿐 아니라 그녀의 오빠까지 얽혀든 마당이어서 정면으로 맞서 응수하다간 자칫 양 편 모두가 평생을 안고 가야할 큰 상처를 입게될는지도 몰랐다. 뭔가 우회적인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희원은 곁눈질로 슬쩍 강혁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일 백 프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옳지 못한 일이라도 동생의 편을 들어주는 오빠라면 나름대로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만약 그렇다면 이 모든 갈등을 순리대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성품과 직결되어 있을 것이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지금 희원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그 것 밖에는 없는 듯 했다. 설혹 그가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성품의 소유자라면 그녀는 더더욱 그의 뜻을 거슬러선 안 될 것이었다. 미랑의 분노가 이렇게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야기 시킨 것을 생각하면 그가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선우에게 나쁜 짓을 하려들지 몰랐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럴 바엔 희원은 차라리 자신이 희생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선우의 안전을 두고 위험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탈출을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 보류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희원은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쁜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당장 닥치도 않은 불행을 생각하며 벌벌 떠느라 중요한 기회를 못 보고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슬기롭게도 희원은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용기와 냉정함이었다.
'우는 얼굴을 하지도, 우는 소리도 하지 마, 채희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난 지금 호랑이 굴에 들어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언제 어느 때든 냉정을 유지해야 해. 그게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거야.'
♧
수술 부작용으로 재수술 받은 코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기만 한 미랑은 틈만 나면 거울 앞에 붙어서 붓기가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은 코를 이쪽 저쪽으로 비춰보는 일로 그렇게 하루를 소일하고 있었다. 요샌 그녀답지 않게 외출하고 싶은 욕구도 나지 않아 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빈둥거리며 지내는 나날들이 며칠 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실엔 그녀가 먹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둔 과자봉지며 캔 음료 깡통들이 즐비했다. 격일제로 들르던 파출부도 형편상 일주일에 한 번만 오도록 했기 때문에 생전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 하나 집어 버릴 줄 모르는 그녀의 집안 꼴은 정말이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런 광경에 문득 문득 넌더리를 치며 오만인상을 찌푸리곤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소파 옆에 놓아둔 휴지통이 마구 쑤셔 넣은 쓰레기들로 오바이트를 하고 있어도 단 한 번이라도 제 손으로 갖다 비울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제 코를 비춰보는 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비디오를 보며 보냈다.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지도 모를 영화 출연의 기회가 왔을 때 누구보다 멋들어진 명연기를 펼치려면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비디오 테이프를 집어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며 풀썩 소파 위에 앉아있던 미랑이 채 일분도 되지 않아 비명을 지르며 펄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야, 이게 뭐야?"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의 허벅지 한 쪽이 자꾸 근질거린다 싶어 흘낏 내려다보았더니 까만 개미 두 마리가 우왕좌왕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손 등 역시 비슷한 간지러움이 느껴져 보니 거기에도 개미 한 마리가.....
"으악! 으악!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냅다 소리 소리를 질러대며 제자리에서 팔짝거리던 그녀는 곧 거실 탁자 주변이며 소파 주변을 부지런히 왔다갔다하고 있는 한 무리의 개미들을 발견하고는 더욱 기겁을 하고 말았다. 개미들은 거실 탁자 위에 놓아둔 빈 케익 상자를 공략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 분명했다.
"몰라, 몰라. 이걸 어떡하면 좋아."
거의 울먹거리다 시피하며 난감한 심정으로 개미 군단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현관으로부터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랑은 줄곧 개미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그 때 문 밖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로 인해 미랑은 거의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나야. 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