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달칵.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다 선잠이 들었던 희원은 돌연 방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어 문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녀가 문가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벌컥 하고 방문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안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그녀를 협박하던 야비한 인상의 파마머리 사내였다.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서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희원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강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희원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앉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입가에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가 번져나갔다.
"네가 그 유명한 인기스타 은선우 여자라 이거지? 흐흐. 그런 대스타가 데리고 노는 여자는 과연 어떤 맛인지 나도 좀 볼까? 흐흐흐......"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들고 있던 소주병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드는 사내를 올려다보며 원피스 위에 걸치고 있던 니트 가디건의 앞섶을 여며 쥐는 희원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다뤄줄게 너무 앙탈부리지 말라고."
"우읏!"
희원 앞으로 바싹 다가든 사내가 억센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감싸쥐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역겹기 짝이 없는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구토증을 느끼며 희원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순간 사내의 손길이 돌연 거칠어진다 싶더니 그 때까지 바닥에 앉아있던 그녀를 냅다 끌어올려 내던지 듯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비명을 올리는 희원의 몸 위로 사내가 덮쳐들었다. 희원은 그의 몸을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그 때까지 졸고 있느라 방에서 벌어진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깍두기 머리의 사내들이 그때서야 허둥지둥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작, 작은 형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맞습니다, 작은 형님. 나중에 큰 형님께서 아시게 되면 저희까지 경을 친다고요."
방으로 뛰어든 세 명의 사내들 모두 침대 위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그 들 중 둘이 파마머리의 사내를 향해 정중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깍두기머리 사내들에게 작은 형님으로 불리우던 파마머리의 사내는 그 동안에도 내내 그의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희원을 다잡기 위해 씩씩거리며 수하들을 향해 꺼지라고만 쏘아붙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은 형님......"
"문이나 닫고 꺼지란 소리 못 들었어? 늬들 정말 내 성질 돋굴래?"
파마머리의 일갈에도 불구하고 문가에서 주춤거리던 세 명의 사내들은 결국 뱁새눈을 치켜 뜬 그의 사나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는 마지못한 얼굴로 하나 둘 돌아서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저씨!"
세 사내들의 만류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던 희원이 걸음을 돌리는 그들을 향해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 이내 방을 나갔다.
"흐흐흐. 반항해 봐야 서로 기운만 빠질 뿐이야, 예쁜이. 고분고분 하고 있으면 나도 살살 다뤄주지."
깍두기 머리 사내들이 물러가자 회심의 미소를 띠운 파마머리 사내가 역겹디 역겨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혓바닥으로 희원의 귀바퀴를 훑어 내렸다. 그녀는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며 더욱 거세게 몸부림을 쳐댔다. 하지만 시시각각 그녀의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대로라면 희원은 그 끔찍한 사내에게 소중히 지켜온 그녀의 순결을 빼앗기고 말리라.
'그럴 수는 없어. 정말로 여기서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럴 수는 없어!'
사내가 제법 술에 얼큰히 취해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일찌감치 그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불행한 사태를 맞았으리라. 하지만 술기운 탓으로 다소 무기력해 있는 그를 상대로 필사적인 그녀의 반항이 계속되자 사내는 급기야 손찌검까지 하기 시작했다.
'쫘악'
사내가 희원의 뺨을 세게 때리면서 소리쳤다.
"살살 다뤄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예상보다 훨씬 저항이 거센 그녀에게 짜증이 난 듯 게슴츠레 하기만 했던 그의 눈빛에 노기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술기운도 어느 정도 깬 모양인지 좀 전보다 손놀림에 훨씬 힘이 실린 듯했다.
'투둑. 투두둑.'
그의 무자비한 손길에 희원의 원피스 앞섶을 여미고 있던 단추들이 힘없이 뜯겨 나갔다.
"안 돼! 안 돼요!"
경악에 사로잡힌 희원이 몸을 뒤치며 울부짖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랑곳 않는 사내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수치심과 혐오감,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과 분노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이 질끈 감긴 순간이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방문이 열렸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희원의 시야에 곱상한 얼굴을 가진 보스가 문가에 우뚝 서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혀, 형니......"
보스의 출현에 파마머리의 사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희원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호명하려 했지만 사내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번개처럼 날아든 그의 발길질에 얼굴을 맞은 후 침대 밑으로 고꾸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 잘못 했습......"
퍼억!
빡!
파마머리의 사내가 얼른 몸을 곧추 세우고 무릎을 꿇은 뒤 죄를 빌고자 했으나 나이로 따지면 사내의 동생뻘로 밖에 보이지 않는 보스는 그럴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는 듯 해 보였다.
뻐억!
"푸흑."
팍!
"커헉."
옷매무새부터 부랴부랴 가다듬은 희원이 방의 한 쪽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후에도 그의 발길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보스는 주먹은 쓰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끊임없이 발길질만 퍼붓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파마머리의 사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희원은 문득 올려다 본 젊은 보스의 무표정한 눈, 무표정한 얼굴에서 이루 형언키 어려운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을 덮쳐들었던 파마머리의 사내에게 느꼈던 두려움과는 또 다른, 마치 뼈 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섬찟한 공포심이었다.
"혀어......"
이미 만신창이로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가 된 파마머리의 사내가 살려달라는 듯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그의 형님을 부르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보스의 출현에 뒤 이어 문가에 다가와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깍두기 머리의 사내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를 말릴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덩치로 치자면 보스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미 퉁퉁 부어오른 눈매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기는 힘들었지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파마머리 사내의 몸짓에도 불구하고 천사같이 해맑은 얼굴을 한 젊은 보스는 그러나 발길질을 멈추기는커녕 주춤하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저 남자... 저러다 정말 사람 죽이겠어!'
파마머리의 사내가 그녀에게 어떤 짓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잊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결코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그녀였다.
"자, 잠깐만요! 그러다 사람 죽이겠어요!"
희원의 절박한 외침소리에 젊은 보스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살기 등등한 시선을 그녀 쪽으로 돌렸다. 마주 보는 이로 하여금 순식간에 몸 속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을 경험케 하는 시선이었다. 단지 몇 초 동안 그의 시선을 마주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희원은 파마머리의 사내와 몸싸움을 벌이던 때보다 훨씬 강력한 무력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동안 방안에는 폭발할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배했다. 누구도 숨소리조차 함부로 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다 죽어가게 생긴 파마머리의 사내까지도.
희원은 새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의 보스를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이긴 했지만 수하인 사내들에 비하면 가장 왜소한 편에 여려 보이기까지 하는 인상의 주먹만한 얼굴을 가진 젊은 보스를 말이다.
"주제넘게 끼어 들지 마라."
잠시동안 희원을 쏘아보던 그가 메마른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곤 다시 발길질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그 때까지 구석에서 웅크리고만 있던 희원이 냉큼 그의 발치로 달려와 발길질을 위해 막 다시 들어올려진 그의 다리를 양팔로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안 돼요!"
"뭐.....?"
뜻하지 않게 한 쪽 다리를 붙들린 그는 순간 휘청하는 듯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우뚝 서서는 잔뜩 눈쌀을 찌푸리며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사내의 다리를 두 팔로 껴안다시피 하고 있던 희원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간절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그만 하세요. 이러다 이 아저씨가 죽기라도 하면 아저씬 살인범이 되는 거라구요! 살인범이요! 아시잖아요, 살인범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렇게되면 아저씬 사형을 언도 받거나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야 해요. 혹 운이 좋아 붙잡히지 않는다 쳐요. 그래도 평생동안 기 한 번 못 펴고 도망자 신세로 숨어살아야 하잖아요. 아저씨한테 맞아 죽은 사람도 불쌍하지만 그런 아저씨 인생은 또 얼마나 불쌍해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방관만 하고 있는 저기 세 아저씨들한테도 죽는 날까지 마음의 짐이 될 거예요. 분명히요. 그러니까 제발 진정하시고 그만 참으세요. 네?"
사실 희원 자신도 무슨 정신으로 사내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릴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긴박감이 그녀를 움직인 듯 하였다. 다시 한 번 방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문가에 서서 그저 묵묵히 그들의 보스가 하는 모양을 지켜보고 서있던 깍두기 머리 사내들의 시선은 이제 모두 희원을 향해 있었다. 헌데 그들 모두는 묘하게도 숙연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존경심 섞인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엉겁결에 한 쪽 다리를 그녀에게 붙들린 채 서 있던 보스는 처음엔 황당한 시선으로 그러다 이내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다 갑자기 터질 듯한 공기를 가르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아주 소설을 쓰는군. 하하. 하하하하!"
무엇이 그리도 유쾌한지 사내는 한 번 터진 실소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희원의 눈엔 아무래도 지독한 정서불안으로 보였지만 숨막힐 듯한 살기를 내뿜는 것보다는 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봐."
사내가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희원과 눈높이를 맞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놈은 힘없는 아가씨를 덮치려던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 지금 그런 놈을 위해 아가씨가 대신 용서라도 구하는 건가?"
"......" 희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사내의 시선을 마주 볼 뿐이었다.
"아가씨는 저 놈을 그렇게 금방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천사 같은 마음의 소유자인지는 몰라도 난 달라. 내 수하가 내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구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거든."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보세요. 죽일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때릴 수가 있죠?"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말야 아가씨가 속해 있는 세계하고는 좀 달라."
사내가 한 손으로 희원의 턱끝을 가볍게 잡은 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선을 살짝 쓸어 내리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빈정거림 섞인 미소가 걸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희원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되물었다.
"하지만 맞아서 아픈 건 다 똑같을 거 아니에요?"
"쿡쿡. 그건 그래. 맞아서 아픈 건 다 똑같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즈막히 웃음을 터뜨린 그의 표정은 너무도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곧 폭력집단의 무자비하고 냉혹한 보스의 얼굴로 돌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간에 지금까지의 아가씨 행동들... 그게 모두 내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알고 있나? 그것도 내 부하들이 이렇게 뻔히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야."
"......" 희원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저 놈이 내게 죽도록 깨진 건 내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이지."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 질 정도로 섬뜩한 사내의 말투와 표정에 질겁하여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점점 공포심에 사로잡혀 희원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 가는 모습을 묘하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희원을 쏘아보았다.
"아가씨는 뭘로 대가를 치룰텐가?" 어눌한 어조로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댓가...라뇨?"
"흐음......"
자신의 권위에 맞선 대가를 뭘로 치루겠냐는 사내의 말에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희원을 몸을 훑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의식한 희원이 화들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얼른 옷매무새를 추스리자 사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몸을 피고 일어서며 혀 차는 소릴 했다.
"쯧쯧. 은선우란 놈 취향이 무척이나 독특한 모양이로군."
몸을 돌려 방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이 번엔 매우 사무적인 어투로 다시 말했다.
"회장님 호출이다. 따라 나서라."
그것은 마치 처단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파마머리 사내를 향해 한 말 같았다. 피투성이의 사내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보스를 뒤따라 방을 나서는 모습을 눈을 쫓으며 희원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호출이 길래 저 지경이 된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걸까?'
희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사고방식으로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리고 얼마 안 있어 깍두기 머리 사내 세 사람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섰다. 희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세 사람 모두는 왠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곧 양쪽 뺨에 곰보 자국이 있는, 그리고 셋 중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하나가 자신의 양복 상의를 벗어서 희원이 양팔로 다부지게 끌어안고 있는 무릎 위에 슬쩍 얹어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라도 걸치고 있어요."
희원은 처음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가 어째서 그의 상의를 벗어서 자신에게 주었는지를 깨달았다. 파마머리 사내의 무자비한 손길에 그녀의 원피스 앞섶을 채우고 있던 단추 몇 개가 뜯어져 나가 버린 때문인 듯 싶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호의에 희원은 고마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선뜻 그의 상의를 걸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나질 않았다.
"안 믿기겠지만 사실 우리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에요. 할 줄 아는 게 주먹질, 싸움질 밖에 없어서 이 바닥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아깐... 미안하게 됐어요. 우리 세계에선 서열간에 규율이 무지 엄격하거든요. 그래서...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작은 형님을 말릴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 몸을 도사리고 앉아있는 희원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곰보 자국의 사내가 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 보다 좀 더 나이가 적어 보이는 다른 사내-그 때 발견한 사실이지만 짤막한 머리칼을 닭 벼슬처럼 가운데로 빗어 모으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한-하나가 다소 격앙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큰 형님은 대체 왜 작은 형님을 안 내치시는지 모르겠어. 걸핏하면 우리 조직 얼굴에 먹칠하는 짓만 일삼는 데 말이야, 젠장."
그러자 셋 들 중 가장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내가 나무라는 투로 그를 향해 말했다.
"함부로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했지. 큰 형님은 한 번 자기 사람으로 인정한 사람은 그 쪽에서 먼저 배신하기 전엔 잘났거나 못났거나 절대로 내치지 않아. 세상에서 의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니까."
희원은 세 번째 사내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가 큰 형님으로 모시는 젊은 보스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말에 동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첫 번째 사내와 다소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세 번째 사내의 말을 수긍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두 번째 사내 역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무튼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놓아도 괜찮아요. 우리 큰 형님은 절대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진 않아요."
희원을 안심시키려는 듯 세 번째 사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희원은 반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날 납치한 거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면서 왜 죄도 없는 날 납치해서 이렇게 가두어두는 거예요? 아저씨들 나쁜 사람들 아니 라면서요. 그럼 나같이 무고한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사내들 모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에게 상의를 벗어준 사내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사내가 나머지 사내들과 주고받는 눈빛으로 보아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오히려 그들 역시 평소답지 않은 보스의 명령에 내심 의아해하고 있는 중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 자 본인은 이유를 알고 있을 테지.' 희원이 보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 명의 사내들이 방을 나가자 희원은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나 얼른 방문부터 잠갔다. 그리곤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전신이 얼얼한 기분을 느끼며 내키지는 않았지만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피로감이 엄습해왔지만 눕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처한 상황를 천천히 되짚어 볼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우선 자신이 납치 당한 이유부터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왠지 자신이 납치 당한 이유, 바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용기를 잃어선 안 돼, 채희원.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희원은 그녀의 왼 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은색 커플링을 만지작거리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려 노력했다.
강혁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을 꺼내들고 버튼을 누른 후 귀로 가져가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에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강혁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애. 지금 내가 데리고 있다."
-"뭐? 정말?"
전화기너머로 그의 누이가 땍땍한 음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쩔 거냐. 정말 네가 처음에 부탁했던 대로 해주길 바라는 거냐?"
-"......"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이 벌써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래는 못 데리고 있는다. 2,3일 안으로 확실히 결정 내려서 연락해라. 그럼, 바빠서 이만 끊는다."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는 강혁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죽어 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누이의 말을 그가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그녀의 목소리에서 예리한 칼날을 맨발로 딛고 서있는 듯한 위기감을 읽어낸 강혁은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협박을 평소처럼 코웃음 치며 내칠 수가 없었다.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이 최후의 발악을 해대는 것처럼 왠지 모를 절박감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 여동생의 성격이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혁은 그녀가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릴 때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그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떼를 피우기 시작하면 말로는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는 그녀에게 먼저 사탕 하나를 손에 쥐어준 다음 슬슬 뒤에서 구슬리곤 했던 대로 그는 우선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터를 잡은 바닥에서야 하루가 멀다 하고 험한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절대 무고한 사람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일 따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그가 잠시 예외를 두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계획한 납치극이 오래 가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론 독한 척 오기를 부리고 말도 안 되는 생떼를 피우곤 하는 그녀였지만 실은 작은 일에도 곧잘 겁을 집어먹곤 하는 소심한 성격인지라 머지 않아 제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의 극단적인 행동을 크게 후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누이에게 호된 맛을 보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차창 유리로 시선을 돌린 강혁은 검게 코팅이 되어 한결 더 어둑어둑해 보이는 밤 풍경을 배경으로 자신이 부득이하게 납치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잔뜩 겁에 질려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은 채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을 늘어놓던 그녀를 생각하며 그는 또 한 번 소리 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여동생의 말로는 그녀가 순진해 보이는 겉 모습과는 달리 실은 꼬리가 아홉 개쯤 달린 여우와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었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횡설수설 지껄여댄 얘기를 대강 종합해 보면 그녀가 가정부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은선우를 홀려 자신과 그의 사이를 훼방 놓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자기 인생을 통째로 망가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혁은 자신의 누이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십 분지 일 정도밖에는 믿지 않았다. 남매지간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무튼 그것이 그들 남매지간의 현실이었다.
어느 사이 차는 종합병원 응급실 앞에 당도해 있었다. 강혁은 그의 발길질로 인해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신음소리를 참고 앉아있는 옆자리의 사내를 말없이 그곳에 내려주곤 곧장 차를 돌리도록 했다.
강혁과의 통화를 끝낸 미랑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질끈 깨물어 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그녀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학창시절부터 줄곧 희원에게 품고 있던 뒤틀린 시기심으로 인해 어찌 어찌하다 어두운 조직의 보스가 된 자신의 오빠에게 자살을 거들먹거리며 거의 협박조나 다름없이 희원을 납치토록 종용한 그녀였으나 막상 그로부터 희원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미랑은 이내 안절부절키 어려운 심경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리 반성 따위와는 무관한 성격의 소유자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조차 할 줄 모르는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랑은 방금 전 강혁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극단적인 오기에 사로잡힌 채 희원의 납치를 종용한 자신의 행동을 눈곱만치도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지시한 납치가 현실로 닥치자 미랑은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궁지에 빠뜨린 희원과 선우에게 그녀가 겪은 만큼의 고통을 되돌려주고야 말겠다는 복수심에만 오로지 몰두하느라 앞 뒤 분간할 겨를이 없었던 그녀의 의식에 강혁의 전화는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충격을 안겨주며 그녀로 하여금 현재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짓이 무얼 의미하는 지를 인식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하에서도 미랑의 양심은 모든 탓을 두 사람에게만 돌릴 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지금에 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차피 저질러진 일일 바엔 어떻게든 후환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나 강구해야 할거야. 아아, 몰라. 몰라. 이건 다 그들 탓이야. 자업자득이라고! 희원이 그 계집애가 주제넘게 잘난 척만 하지 않았어도, 선우 오빠가 그렇게까지 날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이제는 입술 대신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미랑은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의 핸드폰을 응시한 채 그녀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