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매니저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그러니까 내가 강감독 영화 출연 섭외에서 밀려났다는 거야? 엉? 그런 거야?"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에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자신의 매니저를 향해 따지듯 묻고 있는 미랑의 손등 위엔 새파랗게 혈관이 다 불거져 있었다.
-"그렇게 됐다. 사장님이 그러라는데 내가 별 수 있냐?"
"도대체 내가 왜 밀려난 건데? 도대체 왜?"
발을 동동 구르며 미랑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묻는다.
-"뭐 사장님 말로는 결혼 스캔들 때문에 손상 받은 네 이미지 문제도 있고 또... 야, 솔직히 지금은 좀 그렇잖아. 너 이 번에 재수술 받은 코 제대로 가라앉으려면 시간도 좀 걸린다면서. 그냥 핑계김에 재충전한다 생각하고 당분간은 좀 쉬도록 해."
"강감독 영화는 빨라야 5 개월 뒤에나 크랭크 인 하는 거라며? 코 수술 받은 거 그 때쯤이면 아무런 문제 될 거 없단 말야!"
조바심으로 인해 바싹 메마른 입술처럼 그녀의 마음도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강감독이 제일 싫어하는 배우가 어떤 배우인지 아니? 바로 스캔들 많은 배우야. 아무리 연기를 여우같이 잘해도 스캔들을 업고 다니는 배우는 절대 쓰지 않는 게 강감독 취향이라고. 그래서 다른 어떤 감독들보다 풋풋한 이미지의 신인 배우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고. 아마 사장님도 그래서 너 대신 손지혜를 밀어주기로 결정하신 것 같아."
"뭐? 그러니까 날 밀어내고 대신 손지혜를 추천중이란 소리야?"
새된 목소리를 높이는 미랑의 메마른 입술이 파랗게 질리면서 파들파들 떨리기까지 했다. 2주 남짓한 기간을 두고 마치 해프닝처럼 벌어졌던 은선우와의 결혼 발표와 다시 그것을 번복하는 취소 발표가 미랑에게 가져온 파장은 예상 이상으로 훨씬 컸다. 왜냐면 결혼 취소 발표가 나간 직후 목전에 서면상의 계약만을 남겨두고 있던 두 개의 CF가 날아간 데다 기획사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거의 출연이 확실시되던 청춘물 영화의 주조연급 배역 하나가 지금 물 건너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이미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어디 그 뿐인가. 설상가상이라고 심상치 않다 여기고 있던 그녀의 코가 결국은 성형 부작용을 일으키는 바람에 미랑은 그토록이나 기대하고 고대하던 윤PD의 대하드라마에서 막판 캐스팅 탈락이라는 불운까지 겪어야 하지 않았던가!
'뿌드득.'
미랑은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이 모든 불행의 책임을 선우와 희원의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성형 부작용의 책임까지 덧붙여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불행한 상황들을 모두 두 사람의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자업자득 혹은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옛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두 사람을 향해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고 또 퍼부었다.
매니저와의 통화를 끝낸 미랑은 마치 갓 잡혀와 우리에 갇히게 된 야생동물처럼 초조한 눈빛으로 실내를 어슬렁거리며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뭐? 핑계 김에 재충전한다 생각하고 당분간 쉬라고? 당분간? 날 바보로 알고들 있는 게 틀림없어. 겨우 그 딴 스캔들 하나 가지고 날 사장시킬 생각인가 본데 어림없지! 은선우. 채희원. 너희 두 사람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너희들은 이런 내 꼴을 고소해 하며 매일 희희낙락 거리고들 있겠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마음보를 곱게 썼더라면 현재와 같이 사면초가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보지 않은 그녀였다.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자신은 억울한 희생자라는 생각만이 그녀의 분노와 복수심을 부채질 할 뿐이었다.
문득 TV수상기로 고개를 돌린 미랑의 눈빛에 표독스러움이 떠올랐다. 매니저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야간 연예정보 프로에 선우와 희원이 모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탤런트 한채린의 결혼식에 동반 참석했을 때 찍힌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너무나 다정해 보이는 연인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두 사람이었다.
"아아아아아악!"
미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가슴속에서 불덩이 같은 울분 치솟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나만 당할 수는 없어. 은선우! 채희원! 날 이렇게 만든 대가를 반드시 너희 두 사람도 치루게 해주고야 말겠어! 반드시!'
그녀의 시기심과 빗나간 분노는 이미 이성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치닫고 있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에게 처절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만들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미랑은 앞 뒤 잴 겨를도 없이 충동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랑은 그 때까지 자신의 손에 쥐어 있던 핸드폰을 열고 익숙한 단축 번호 하나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곧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미랑이. 부탁 한 가지 들어줘야겠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말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해. 정말이야. 당장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면 나 이 길로 곧장 죽어버릴 거야."
오후 강의가 끝나자 희원은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마트에 들러 필요한 몇 가지 품목들을 구입했다.
샴푸, 치약, 두루마리 휴지, 설거지용 수세미, 과일 약간... 아! 그리고 비엔나 소시지. 비엔나 소시지는 아직 어린애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는 성진이 즐겨 먹는 간식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그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한 나영의 성화로 현재 성진은 그 좋아하는 간식을 끊어야 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성진오빠 그거 알아? 30대가 되면 무엇보다 신진대사율이 20대랑은 확연이 달라진다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양을 먹어도 30대가 20대 보다 살이 찔 확률이 더 높은 거구. 성진오빤 전보다 식사량을 조금 줄여야 될 판국에 어린애처럼 간식이다 야식이다 찾으면 결국 그게 다 오빠 복부에서 배둘래햄이 되고 말거야. 성인병으로 이어지는 초석이 될 거란 얘기라고. 그리고 그런 이유를 다 떠나서 배 나온 남자 어유, 매력 꽝이야."
어느 날 통을 껴안다시피 하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던 성진을 향해 나영이 가자미눈을 뜨고 한 얘기였다. 그 날 나영의 핀잔에 곧장 숟가락을 떨구던 성진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자니 희원은 입가에 절로 웃음이 걸렸다.
"어쩐다 이걸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비엔나 소시지 봉지를 들고 잠시 동안 망설이던 희원은 결국 봉지를 카터 속에 집어넣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반찬으로라도 쓰면 되겠지."
마트에서 장을 보고 희원이 집 앞에 당도했을 무렵 레드비트 하우스는 온통 저물어 가는 석양의 붉디붉은 빛에 물들어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안마당 역시 그 날 따라 유난히도 붉고 강렬한 석양빛에 점령당해 있었다.
"이제 왔니?"
"선우오빠!"
노을 빛을 비스듬히 받으며 선우가 현관 앞 계단에 앉아있었다.
"오늘 좀 늦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
선우를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희원이 잰걸음으로 안마당을 가로지르며 물었다. 모 쇼핑센터에서 새 앨범 출시기념으로 간단한 팬 사인회를 가진 후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빅 콘서트의 사전 준비 작업 문제로 다시 기획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귀가가 늦어질 거라던 그가 자신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자 희원은 반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인가. 긴 다리가 강조되는 블랙진 바지에 블랙진 쟈켓을 타이트하게 입은 그가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환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놀빛을 측면으로 받고 있던 탓에 윤곽의 높낮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음영을 이루고 있는, 분위기가 풍부한 얼굴로 줄곧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 희원은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가슴 떨렸다. 저렇듯 멋진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획사에 들어가기로 했던 스케줄이 내일로 미뤄졌거든."
선우가 금세 자기 곁으로 다가든 희원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성진 오빠랑 준희 오빠는요? 안에들 있나요?"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볼일이 있다고들 해서 나만 먼저 들어왔지."
"그랬군요."
"그나저나 오늘 노을 색깔 죽인다. 그치?"
선우가 서쪽 하늘을 돌아보며 감탄 어린 투로 말했다.
"정말 환상적이예요. 저 하늘빛이며 구름이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요. 예술 작품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그의 시선을 따라간 희원 역시 감탄조로 대꾸했다.
"그래, 자연 그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일 지도 몰라."
"그래요."
희원은 자기도 선우가 앉아있던 계단에 살짝 걸터앉아 잠시 동안 그와 함께 일몰의 한 때를,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자연현상의 일부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참, 이거......"
문득 선우가 쟈켓 안주머니에 무엇인가를 꺼내 희원에게 건네주었다.
"어머, 머리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진 물건을 내려보며 희원이 외쳤다.
"와아, 예쁘다."
"맘에 드니?"
선우의 물음에 희원은 함빡 웃음 띤 얼굴로 대답 대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여 보였다. 선우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오늘이 선영씨 생일이라고 팬 사인회 끝나자마자 준희가 악세사리 매장으로 총알처럼 튀어가기에 나도 한 번 뒤따라가 봤지. 어슬렁어슬렁 구경 삼아 돌아다니는데 이 머리핀이 눈에 띄더라.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보이더라고."
"맘에 들다 마다요. 너무 예뻐요!"
사실 여자들 물건 파는 데서 기웃거리는 일만큼 낯간지러운 일도 없다고 생각하던 선우였지만 희원을 위해 머리핀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면서 그는 예전엔 미처 몰랐던 종류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맛보았다. 또 그가 사다 준 작은 물건을 맘에 들어하고 기뻐하는 희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남자들이 그저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선우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기쁨, 작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선물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받아드는 그녀를 바라볼 때의 기쁨. 꽤 근사한 느낌이었다.
"이리와, 내가 꽂아 줄게."
선우가 희원의 손에 들린 머리핀을 다시 가져가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놀빛에 물들어 발그레한 희원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면서 살그머니 선우를 등지고 돌아앉았다.
희원은 선우가 건넨 머리핀을 받아들고 그가 자신을 위해 악세사리 매장에서 손수 머리핀을 골랐을 모습을 상상하자 행복감으로 가슴이 먹먹해 질 지경이었다. 헌데 손수 그 머리핀을 꽂아주겠다면서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선우의 손길에 희원은 조금 과장하면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일 만큼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디 보자. 야아, 예쁘네. 우리 희원이한테 딱이다." 머리핀을 다 꽂은 후 선우가 희원을 요리 조리 돌아보면서 말했다.
"예,예뻐요?" 한결 더 얼굴이 붉어진 희원이 수줍게 물었다.
"야아, 이 핀이 임자를 제대로 만나니까 아까 보다 훨씬 더 예뻐 보이네. 아마 다른 여자가 사갔으면 이렇게까지 예뻐 보이진 않았을 거야."
"큭큭. 선우오빠도 그런 소릴 다 할 줄 아네?"
"빈소리 아니다, 이거. 싸나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지."
선우의 너스레에 여전히 그를 등지고 앉은 채로 잠시동안 쿡쿡 거리고 웃던 희원이 문득 그녀의 어깨에 놓여있던 선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손등과 손바닥에 살포시 입을 맞춘 다음 다시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요, 선우오빠. 사랑해요."
"뭐?"
그를 등지고 앉아있었기에 생겨난 용기었을까? 그토록 오랫동안 선우를 향한 사랑을 품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녀의 입 밖에 내보지 못했던 말이 처음으로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선우오빠를 너무 많이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서 때로는 겁이 날만큼 그렇게 오빠를 사랑해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렇게 몽환적인 어느 봄날의 황혼 녘에 희원은 마음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말을 속삭이듯 그러나 거침없이 내놓고 또 내놓았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선우의 다정한 손길이 혹은 그의 다감한 마음이 아니 어쩌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감추어 줄 놀빛이 그녀에게 용기를 내라고 부축인 것인지도 모른다.
"희원...아."
그의 닫혀진 마음을 두드리고 열도록 만든 그런 한결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향한 희원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선우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녀의 입으로 직접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진실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매일 매일 어김없이 뜨고 지는 태양처럼, 무수한 별들과 달처럼 보일 때나 보이지 않을 때나 그의 곁에 존재했다. 그가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도록 존재하는 공기처럼 언제나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을 때 선우는 왈칵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감동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 오르고 목이 메어왔다. 그녀의 수줍은 듯 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그의 영혼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그를 전율케 했다.
"고맙다, 희원아. 나 같은 놈을 사랑해 줘서 정말... 고맙다."
선우가 등뒤에서 희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숨막힐 듯 강렬한 그의 포옹 속에서 희원은 행복감에 도취된 얼굴로 두 사람의 심장처럼 붉디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랜 동안 제 짝을 찾아 헤매던 두 개의 분신이 만나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모습을 이룬 것처럼 그들의 가슴속에선 붉디붉은 두 개의 노을이 마치 하나인양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살며시 눈을 감고 서로의 호흡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중함에 대하여. 기다림에 대하여. 또 감사함에 대하여.
"하긴... 나 같아도 많이 고맙긴 하겠다. 머리핀 한 개 사다주고 사랑한다는 소릴 열 번도 넘게 들었으니까."
문득 희원이 그의 팔을 슬쩍 풀고 돌아앉으며 너무 많이 믿진 것 같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선우가 고개를 갸웃해 보이는 시늉을 하며 대꾸한다.
"열 번도 넘게? 에이 솔직히 열 번도 넘게는 아닌 것 같은데."
"암튼요.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믿진 거 같아. 그냥 한 번만 해주는 건데."
"그럼, 내가 다른 걸로 다시 갚아주면 되지?"
"다른 걸로 갚아줘요?"
"그래. 희원이가 좋아하는 걸로."
"?"
"바로 내 입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우의 입술이 희원의 입술로 부딪쳐 왔다. 지긋이 눌러오는 그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이어지는 말캉하고 촉촉한 혀의 느낌이 그녀의 의식을 순식간에 몽롱함 속으로 빠뜨렸다. 어느 새 희원의 한 손은 그의 목에 감겨들어 있었고 다른 손은 그의 실크 같은 머리칼 사이를 파고 들었다. 키스로 인한 희열로 그녀의 목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갑자기 선우가 그녀로부터 입술을 떼고는 아쉬운 듯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희원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다시 말해 봐. 그럼 키스해 줄게."
실로 애간장을 녹이는 목소리란 방금 선우의 목젖을 울리고 흘러나온 소리일 것이라 생각하며 희원은 아직도 달콤하고 황홀한 그와의 키스에 도취된 몽롱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선우오빠. 사랑해요."
선우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녀의 입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무엇처럼 내려다보다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삼키듯 희원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어디선가 아스라한 라일락한 향기가 그들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어, 은선우. 한창 바쁠 텐데 어인 행차냐? 아니 이게 누구야? 희원씨도 오셨군요. 이렇게 반가울 때가."
라이브 바(Bar) '에이프릴'의 주인이자 수석 바텐더이기도 한 콧수염의 사내가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반기며 다가왔다.
"안녕하셨어요?"
희원이 콧수염 사장을 향해 공손히 목례를 하자 그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시 찾아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희원씨."
"아하하... 아, 예에......"
그의 장난기 섞인 제스츄어였음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그가 내민 손을 무시할 수 없어 희원이 잠시 머뭇대다 그의 손을 맞잡으려 하자 선우가 재빨리 그녀를 제지하며 끼어 들었다.
"어허, 은근슬쩍 남의 애인 손은 왜 잡아 보려구 그러는데?"
"뭡니까, 뭡니까? 야, 은선우. 너 원래 이렇게 쪼잔한 놈이였냐?"
콧수염 사장이 선우를 향해 짐짓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래. 몰랐으면 이제부터 잘 알아 둬."
"뭐야?"
선우가 희원의 어깨에 보란 듯이 팔을 두르며 히죽 웃어 보이자 콧수염 사장은 잠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우 네가 이렇게 닭살과 일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이구, 징글 징글해라. 야, 임마! 입 찢어지겠다. 고만 히죽거려! 어디 나같이 연애 한 번 못해본 사람은 열 받아 살 수나 있겠냐?"
"형이 연애 박사라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인데 무슨 말씀을."
"이런, 희원씨 앞이라고 이제 날 바람둥이로까지 매도하기냐. 희원씨, 선우녀석이 하는 말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저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록 아직 솔로 탈출도 못하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랍니다."
콧수염 사장이 과장되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희원에게 동의를 구하듯 얘기하자 선우가 희원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겨 귓속말 하듯 말했다.
"희원아, 저 형이 하는 말 다 믿지마. 저 형 별명이 뭔 줄 아니? 현존하는 마지막 늑대인간이야."
"네에? 푸흐흡!" 선우에게 들은 별명이 너무 우스워 희원은 곧장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선우 너 희원씨 사수하느라 애쓰는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점점 너무 치사하게 나온다. 물론 내가 좀 인물이 되서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나한테 본능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같는 건 이해한다만 너랑 나 사이엔 이러면 안되지."
"미안해, 형. 지금 내 눈엔 형뿐만 아니고 세상 모든 남자들이 늑대인간으로 보이거든. 그러니까 속 넓은 형이 이해해라."
"쳇. 모든 연인들이 다 닭살이지만 선우 너 특별히 닭살이다. 좋아, 암튼 자리부터 잡고 앉아라."
선우와 희원은 콧수염 사장이 안내해 준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밤마다 라이브가 있는 스테이지 주변의 좌석들 보다 비교적 사람들이 덜 몰려있는 자리였다. 아마도 두 연인을 위해 사장이 배려해서 안내한 좌석인 듯 싶었다. 사장이 두 사람으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은 뒤 총총히 바로 돌아가고 난 후 선우는 희원의 옆으로 바싹 다가와 앉아 아까처럼 다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거의 껴안다 시피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론 싫지 않은 희원이었지만 실내가 어두운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너편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그들 쪽을 힐긋거리는 모습에 신경이 쓰였던 그녀는 몸을 곧추 세우고 선우와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다.
"뭐가 겁나는데?"
그런 희원의 속내를 눈치챈 선우가 그렇게 말한 후 이 번엔 아예 끌어 안 듯 그녀를 당겨 안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채희원이는 내 여자라는 사실을 모두 알아야만 해."
희원은 마치 악동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짝 끌어당기는 선우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번져 가는 웃음보다 한 발 빠르게 그녀의 마음속엔 비할 데 없는 행복감이 번져나갔다.
레드비트의 4집 앨범 발표 이후 방송출연이다 뭐다 해서 가뜩이나 스케줄이 빠듯해진 가운데 외자 투자의 대형 조인트콘서트까지 목전에 두고 있자 두 사람은 수영과 채린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이 후 줄곧 데이트다운 데이트는커녕 아침저녁으로 잠시 잠깐 얼굴 부딪히기도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중이라 그 날 오후 생각지도 않게 생긴 여가 시간을 오롯이 함께 보내게 된 그들은 정말이지 꿀맛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평범한 연인들처럼 영화관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엔 갈 수 없었지만 정말이지 멋들어진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내 한 바퀴를 드라이브 한 뒤 역시 분위기 근사한 라이브 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희원은 공공장소인 곳 아닌 곳 가리지 않는 선우의 거침없는 애정표현-예를 들면 식사시간 내내 그녀의 한 쪽 손을 붙잡고 놓지 않은 채 이 것 저 것 음식을 포크로 찍어 먹여준다거나 주차요원 앞에서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고 그녀의 머리 위에 사랑스러움에 겨운 입맞춤을 연거푸 뿌린다든지 하는 식의. 하다못해 그는 운전 중에도 내내 자동차 기어 위에 희원의 손을 올려놓고 그녀의 손을 감싸 잡고 있을 정도였다.-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빨갛게 붉히기 일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만족감에 휩싸이곤 했다.
선우의 경우엔 희원과 다니는 내내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에 내내 사로 잡혀 있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을 확실히 공개해 마구 자랑하고픈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로 누구 한 사람 희원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도록 그녀를 꽁꽁 감쳐두고 그 혼자만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그 것이었다. 둘
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욕구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내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욕구이기도 했다. 게다가 같이 있으면서도 애가 타는 심정이기도 하고 보고 또 봐도 이해 불가결한 그리움이 불쑥 치솟는 정말이지 정서적으로 요상한 불안감을 경험하는 그였다.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도 스케줄에 쫓겨 마음처럼 희원과 오붓이 지낼 여유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에겐 더더욱 그러한 갈증이 당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콘서트만 끝나면......'
선우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자꾸만 조바심치게 되는 자신을 달랬다. 사실 선우는 희원 몰래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놓고 있는 중이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콘서트 날 만인 앞에서 희원에게 공개 프로포즈를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프로포즈할 때 희원에게 건넬 반지도 준비했다. 커플링을 사러 갔을 때 다짐했던 바대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로 말이다. 희원이 그의 청혼을 승낙만 해준다면 그는 아무리 스케줄이 바빠도 결혼식 준비를 서두를 생각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완전한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그녀를 곁에 두고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그녀에게 쏟아 부어 주리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끼며 선우는 희원의 어깨를 감싸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눈치껏 중간에 합석한 콧수염 사장에게 닭살과 복통 세례를 잔뜩 안겨주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때 희원은 선우와 콧수염 사장이 막상막하로 주고받던 너스레와 농담 때문에 하도 웃어서 목이 다 아플 정도였는데 바를 나오는 순간까지도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의 너스레에 희원은 키득거림을 멈추지 못한 채로 출입문을 나서야 했다.
"정말 너무 재미있는 분인 것 같아요." 선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희원이 웃음 낀 어투로 말했다.
"한 때 저 형 꿈이 개그맨이 되는 거 였어." 희원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 팔짱을 끼도록 만들며 선우가 대꾸했다.
"어머, 정말요? 아깝다. 개그맨이 되셨어도 성공하셨을 것 같은데."
"콘테스트에도 한 번 참가했었는데 떨어졌대. 형 말로는 심사위원들이 형 외모에 심한 열등감을 느껴서 형의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떨어뜨렸다는군. 믿거나 말거나."
"하하하. 정말 아쉽네요."
"후후. 그러게 말야. 앗, 이런......."
"왜요?"
선우의 차 앞에서 거의 당도했을 때 선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난색을 표했다.
"차 키를 흘린 모양이야. 쟈켓 주머니에 있었는데 아까 의자 위에 잠깐 벗어놨을 때 빠졌나 봐. 분명 의자 위나 그 근처에 있을 거야. 내 얼른 찾아올게 잠깐만 기다려."
"예."
희원이 50미터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에이프릴의 입구를 향해 바삐 달려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막 선우의 모습이 입구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세명의 남자가 돌연 희원의 주위를 에워쌌다.
"아가씨, 우리랑 좀 같이 가주셔야 겠어."
반듯하게 깍두기 머리를 한 두 명의 사내와 달리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사내가 어눌한 말투로 제일 먼저 말문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느닷없는 사내들의 출현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희원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그건 알 거 없고. 그냥 순순히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안 그랬다간 저 잘난 은선우 낯짝에 칼침이 날아갈텐데 그걸 바라진 않겠지?"
세 명의 사내들 중 유독 야비한 인상을 가진 파마머리의 사내가 입 끝을 말아 올리며 섬찟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라구요?" 희원이 경악에 휩싸인 채 되물었다.
"자, 가자구."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깍두기 머리를 한 두 사내 중 덩치가 좀 더 큰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뇌까리더니 다짜고짜 희원의 팔을 거칠게 끌어 잡고는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기려했다. 희원이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해보았지만 허사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반항으로 남은 쪽 팔마저 다른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붙잡히는 꼴만 되고 말았다.
"아가씨가 이러면 피를 보는 사람은 아가씨 혼자만이 아니야. 말했지? 은선우가 칼침 맞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그런 거야?"
망을 보듯 한 걸음 뒤쳐서 따르던 파마머리의 사내가 서늘한 시선으로 희원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사내들의 분위기로 보아 그의 말이 단순한 협박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희원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옴을 느끼면서 간신히 대꾸했다.
"따라...갈게요. 내가 순순히 따라가면 선우오빠, 선우오빠는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죠?."
"아가씨만 순순히 따라가 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알...알겠어요. 그렇게 하겠어요."
순순히 그들을 따르지 않으면 선우를 해치겠다는 으름짱에 결국 큰 소리로 구조 요청 한 번조차 해보지 못한 채 희원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덩치 큰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않아 그녀를 비롯한 세 남자가 주차장에서 가장 어둑한 위치에 서있던 은회색 밴 앞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차문이 열렸다. 희원은 사내들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뒤이어 세 남자들이 재빠르게 차에 오르자 그 즉시 밴은 주차장을 출발했다. 주차장을 거의 빠져나갈 무렵 에이프릴 입구를 나서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차 유리창을 두드리며 선우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 부르고 말았다.
"선우오빠! 선우오빠!"
그 때 밴의 맨 뒤 좌석 쪽에서 나즈막하지만 어딘가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 차를 세워 아가씨를 내려줄 수도 있어. 대신 아가씨가 사랑해 마지않는 은선우의 목숨을 대신 접수해 가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