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 (66/75)

   

# 66.

  빨간 지붕의 레드비트 하우스에도 봄이 당도해 있었다. 하얀 울타리 밖으로 만개한 노란 개나리와 함께 말이다. 모처럼의 한가한 주말 오후 희원은 푸릇푸릇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작은 유실수들과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에 시선을 간간히 시선을 던지면서 마당에 놓여진 널찍한 평상 위에 앉아 따사로운 봄 햇살과 귀밑 머리칼을 간지르는 훈풍을 즐기며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콘서트 준비 안해요? 무지막지하게 대형 콘서트가 될 거라면서요."  

  희원이 자신의 무릎을 베게 삼아 베고 누운 채 잠이라도 든 듯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선우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선우가 눈을 감은 채 대꾸한다.

  "지금 준비하고 있잖아."

  "네?"

  "여기."

  선우가 가까스로 한 쪽 눈만을 슬쩍 뜨며 자신의 가슴 께에 얹어두고 있던 악보를 들어 보인다.

  "보지도 않는 악보만 가슴에 올려두고 무슨 콘서트 준비를 한다고 그래요?"

  "다 이렇게 누워서 심상으로 그려보고 있던 중이라고."

  "치."

  여전히 한 쪽 눈만 뜬 채로 희원을 올려다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선우를 곱게 흘기며 희원이 할 말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힘들지 않니?" 선우가 물었다.

  "안 그래도 다리가 저릴려구 해요." 희원이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네 다리 말고, 학교 생활 말야. 집안 일이랑 병행하느라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아뇨. 하나도 안 힘들어요. 학교 생활도 너무 재미있고요. 오빠들하고도 계속 한 집에서 살 수 있지요, 또 돈도 벌지요. 나 같이 운 좋은 애는 아마 드물 거예요. 근데 오빠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지금 내 다리가 좀 힘들어요."

  "그건 힘들어도 참아. 야, 근데 너도 참 무드 되게 없다. 이럴 땐 좀 힘들어도 내색 않고 괜찮다고 하는 거야." 

  선우가 마침내 두 눈을 번쩍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희원을 올려다보며 볼멘 소릴 했다.

  "아, 그래도 저린 데 어떡해요."

  "코에 침 발라. 그럼 괜찮아. 으흠......"

  "......."

  다리가 저리다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코에다 침이나 바르라고 하곤 선우는 몸을 돌려 희원의 무릎을 꽉 끌어안다시피 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세상 없이 태평한 얼굴로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선우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희원은 잠시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다간 이내 픽하고 웃음을 지었다. 봄날의 온화함과 화사함을 닮은 미소였다.

  "참 어제 엄마랑 통화했는데요 엄마가 지난 번 설 때 선우오빠가 떡갈비를 잘 먹는 것 같더라면서 생각나면 아무 때고 괜찮으니 놀러 오라 셨어요."

  두 사람이 언약식을 치룬 며칠 후 구정 연휴가 다가왔을 때 그들은 함께 희원의 집을 방문했다. 선우가 희원의 부모님 앞에서 정식으로 희원과의 교제를 허락해 달라고 청했을 때 그저 희원이 평범한 사람 만나 평범한 삶을 꾸리길 바랬던 두 어른들은 선뜻 허락을 꺼려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는 선우의 끈기에 결국 희원의 부모님들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생각보다 훨씬 진중하고 속 깊은 데가 있어 보이더라고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나도 같은 생각이고.'

  그 날 밤 희원의 엄마가 희원의 방으로 조용히 찾아와 슬쩍 건네고 간 얘기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역시 어머님이 날 생각해 주시는구나. 내가 떡갈비 좋아하시는 것까지 금방 눈치 채시고. 아, 감격스러운 걸." 

 뿌듯함에 겨운 선우의 목소리였다. 희원은 선우가 그녀의 엄마를 장모라고 호칭한 사실에 괜스리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엄마를 장모라 칭하는 것. 그것이 곧 간접 프로포즈가 아니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런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무슨?"

  "다 좋은데 얼굴이 너무 반반해서 걱정이라고."

  "그게 걱정거리가 아니고 자랑거리가 되게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려."

  "피이."

  "어머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걱정거리는 내가 아니고 바로 너라고."

  "어머, 내가 왜요?"

  "넌 아무한테나 너무 친절하기만 해서 모르는 남자들이 보면 자기한테 딴 맘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안단 말야. 혹 벌써 너한테 집적거리는 남자놈이라도 생긴 건 아닐 테지?"

  

  봄학기 개강에 맞추어 다시 복학한 희원에게 혹시라도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놈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불현듯 마음을 사로잡힌 선우가 퉁겨 오르듯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 앉는 바람에 희원은 다른 쪽 무릎 앞에 두었던 콩나물 바구니를 건드려 엎을 뻔하고 말았다.

  "아휴, 깜짝이야. 저리다고 할 땐 일어나지도 않다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캠퍼스의 낭만이니 뭐니 하면서 들뜬 분위기에 괜히 휩쓸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꼭 취조 당하는 기분이네. 칫. 네가 그런데 휩쓸리고 말고 할 시간이 어딨어요?"

  "뭐야. 시간이 안 돼서 그렇지 시간만 허락하면 너도 그러고 싶다 그 말이야." 선우의 표정이 짐짓 굳어지고 있었다.

  "아유, 오빠 그러고 있으니까 꼭 의부증 환자 같은 거 알아요?"

  "뭐, 의부증 환자?"

  "크크크. 뭐 그래도 귀엽고 예쁘니까 다 용서가 되긴 하지만."

  "야! 너 걸핏하면 이 오빠가 가지고 노는데 그거 나 상당히 기분 나쁘다."

  "그래서요?"

  "뭐? 그래서요 라니?"

  "그래서 나 미워요?"

  "......"

  

  희원이 선우의 얼굴 앞으로 슬쩍 그녀의 얼굴을 들이밀며 생글생글 웃어 보이자 갑자기 아무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선우였다.

  "응? 나 미워요?"

  점점 더 선우에게 바싹 다가 들고 있던 희원이 반달 모양의 눈을 한 채 시선만으로 선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의 눈, 코, 입을 천천히 훓어 내리기 시작하자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는 선우였다. 느릿한 동작으로 희원이 다 가드는 동안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근히 그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서서히 다가 들던 그녀가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움직임을 딱 멈추더니 나즈막히 속삭였다.

  "아직도 몰라요? 내 눈엔 선우 오빠 밖에 안 보여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선우에게 먼저 입맞춤을 해왔다. 아직까지 한 번도 희원이 먼저 입맞춤을 해온 적은 없었기에 선우가 느낀 짜릿한 흥분과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속에서 치솟는 뜨거운 열기를 주체할 길 없어 선우는 희원의 몸을 부서질 듯 끌어안으며 화산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이 온통 하얗게 사위어 가는 느낌 속에 희원과 선우가 서로의 입술과 혀를 탐닉하는 데만 여념이 없을 때였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휙 하고 현관문이 열리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성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아주 둘이만 붙어 있으면 사방 천지에 침이 튀어요, 침이 튀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지."

  갑작스런 성진의 출현에 희원은 자신 앞에 놓인 콩나물 바구니에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만 그에 반해 선우는 뻔뻔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성진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알면 좀 눈치껏 피할 일이지, 꼭 이렇게 훼방을 놓아야 겠수?"

  "야, 은선우. 이 집에 너희 둘만 사냐? 나도 마당에 나오고 싶을 땐 아무 때고 나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그럼 조용히 나왔다 볼 일 보고 조용히 들어갈 일이지 왜 남의 분위기는 깨고 그래." 

  선우가 이죽거리듯 대꾸하자 성진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짐짓 탄식조로 말했다.

  "어휴, 당장 보따리라도 싸서 내보내던지 해야지 이거야 원. 레드비트 하우스가 점점 풍기문란으로 오염돼가고 있구나."

  "당장 한 살림 장만해서 희원이 데리고 내가 나가던지 해야지. 눈치 보여서 애정표현도 맘대로 못하고 어디 살 수가 있나." 지지 않고 응수하는 선우였다.

  "우씨, 저게 정말!"

  내내 히죽거리는 얼굴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선우를 향해 크게 콧방귀를 뀌어주고 씩씩거리며 거실 안으로 들어서는 성진을 보고 준희가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것들 말야."

  "응? 누구? 선우형이랑 희원씨 말하는 거야?"

  "그래. 저것들을 당장 따로 나가 살라고 하던지 해야지 눈꼴 시여서. 쳇!"

  정말이지 눈꼴이 시여서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성진을 바라보던 준희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뜬다.

  "성진형. 우리 솔직해 지자구. 실은 나까지 내쫓고 빨리 나영 누나 들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냐?"

  준희가 툭 던지듯 내뱉은 얘기에 정색을 하던 성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대신에 당장 침이라도 뚝 떨어질 듯 입을 커다랗게 헤벌쭉 벌리고 웃기 시작한 성진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예리한 녀석."

  "아, 세상에나!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채린씨!"

  "왔군요, 희원씨. 고마와요."

  결혼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신부 대기실로 직행한 희원은 친구들과 가까운 여자 연예인들에게 둘러싸인 신부의 눈부신 모습에 절로 탄사를 연발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반색하는 얼굴로 희원의 도착을 기뻐하던 채린이 문득 자신이 입고 있던 순백의 웨딩드레스 허리춤을 손으로 가리키며 희원에게 물었다. 

  "어때요? 배 나온 거 티나지 않아요?"

  "아니요. 정말 하나도 몰라보겠어요."

  어느 덧 임신 6개월 째에 접어들기 시작한 채린의 배는 바스트 라인 바로 아래서 스커트 자락이 길게 떨어지는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지라 정말이지 겉으로 봐선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제가 본 어떤 신부들보다 아름다워요, 채린씨!"

  "정말요?"

  "네. 정말로요.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희원씨."

  "이런, 눈화장 지워지겠어요."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주는 희원을 살포시 끌어안던 채린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고이자 희원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찍어낸다.

  "이 쪽은 제 학교 동창들이고요, 이 쪽은 모델이랑 배우활동 하면서 친해진 친구들예요. 얘들아 인사들 해. 여긴 내가 전에 얘기했던 채희원씨야."

  "안녕하세요. 채린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특히나 요즘 보기 드문 천사표라는 얘길 가장 많이 들었던 같아요."

  "그래요, 채린이가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채린의 친구들이 한결같이 반가운 얼굴로 희원에게 인사를 건네오자 희원 역시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그녀들에게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채희원씨라면 은선우씨 애인 되신다는 그 분 맞죠? 만나 뵙게 되서 영광이예요."

  "아아...저도 반갑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선우의 애인이라 칭하는 소릴 듣자 희원은 불쑥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선우씨도 함께 왔죠?" 채린이 물었다.

  "네."

  "어머, 좋겠어요. 실은 나 은선우씨의 열렬한 팬인데. 아유, 부러워라." 

  단발머리에 안경을 낀 곱상한 얼굴의 여자 하나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는 시늉을 하며 부러움을 표했다.

  "은선우씨가 희원씨한테 폭 빠져서 꼼짝 못한다는 소문 나도 들었어요. 도대체 선우씨처럼 멋진 남자를 사로잡는 비결이 뭘까요? 나도 좀 가르쳐 줘요." 또 다른 친구 중 하나가 희원의 팔짱을 껴오며 물었다.

  "어머, 그런데 희원씨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요? 어쩌면 피부가 요렇게 곱고 야들야들할까? 혹 은선우씨가 희원씨의 이 아기 같은 얼굴에 홀딱 반한 것은 아닐까?"

  "애들아, 너무들 그러면 희원씨가 당황스럽겠다. 그리고 너희들도 봐서 알겠지만 희원씨는 외모만 소녀 같은 게 아니라 무엇보다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야. 선우씨뿐 아니라 사람 볼 줄 남자라면 희원씨 같은 여자한테 빠지지 않고는 못 뱃길걸."

  채린이 갑자기 자신의 친구들의 극성스런 질문 공세에 파묻힌 희원을 슬 쩍 자기 옆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어머 채린이 이 기집애,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니? 지 신랑 희원씨가 다리 놓아주었다고 아부가 넘 심한 것 같다 얘. 물론 희원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 맞아."

  아마도 채린의 친구들은 오늘 채린의 신랑이 될 수영이 희원의 소개로 만나게 된 사이로 알고 있는 듯 했다. 왠지 어색한 기분을 느끼던 희원이 시선이 채린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채린은 희원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고 희원 역시 그런 그녀를 향해 마주 미소 지었다.

  대기실을 나와 희원이 잠시 화장실에 들렀을 때였다. 그녀가 막 물내림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희원은 조금 전부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수다를 떨던 여자들의 입에서 미랑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말았다.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고 있긴 했지만 희원은 분명 그녀들의 입에서 미랑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왠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들의 속닥거림에 집중했다. 얼핏 얼핏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여자들은 연예인이거나 혹은 방송쪽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미랑이 성형 부작용 때문에 결국 배역을 놓쳤단 얘기야?"

  "그래. 윤PD한테 그렇고 그런 방법으로 따낸 배역이긴 했지만."

  "그렇고 그런 방법이라니?"

  "얘는. 있잖아, 왜."

  "어머,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야?"

  "쉬! 목소리 좀 낮춰."

  "걔가 질 안 좋게 논다는 얘긴 나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처지가 딱하게 됐네. 자작극일 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파다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은선우와의 결혼도 물 건너가고 신인에겐 더 없는 기회까지 놓치게 되다니."

  "난 솔직히 안 됐다는 생각은 안 들어. 걔네 기획사에서 신인 모집할 때 무조건 몸 사리지 않는다는 각서에 제일 먼저 사인한 애가 바로 걔란다. 아무리 출세가 좋아도 그렇지. 그런 애들 때문에 엄한 연예인까지 손가락질 당하는 거라고."

  "하긴 전부터......"

  "쉿!"

  "......."

  

  그녀들의 조심스러운 수다는 다른 누군가의 출현으로 중단되었고 발소리로 미루어 그녀들은 곧 화장실을 나간 듯 했다. 때문에 더 이상 미랑에 관한 얘기들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미랑이 현재 매우 불운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 싶었다. 희원은 왠지 착잡한 심정이 되어 화장실을 나섰다. 미랑이 그녀와 선우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은 분명했지만 이름 모를 이들을 통해 우연히 알게된 그녀의 처지를 듣고 고소하다거나 통쾌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선우에 대한 그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니?" 

  식장 입구에서 희원을 기다리고 있던 선우가 그녀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이제 곧 식이 시작하려나 봐요?"

  

  희원은 미랑에 대한 생각으로 잠시 어두워졌던 표정을 얼른 바꾸고 식장 안을 살피는 척하며 대꾸했다. 

  "그래. 곧 시작할 것 같아. 우리도 얼른 자리 잡고 앉자."

  유명 연예인의 결혼식엔 처음 참석하는 희원은 객석을 메운 하객들의 반 이상이 모두 TV를 통해 낯이 익은 연예인들이라는 사실에 색다른 감흥을 느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시작된 예식 역시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호화롭고 규모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의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두 주인공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남 선녀처럼 보였다. 비록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채린 못지 않은 외모의 수영 또한 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떤 남성보다 멋지게 보였다. 물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선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환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예식이 모두 끝나고 기념 촬영이 시작되면서 신부가 부케를 던지는 순서도 점점 가까워 왔다. 예상치 못했던 선우의 권유에 채린의 부케를 받기로 승낙한 희원은 자못 긴장감이 고조되는 느낌을 받았다. 신부의 부케를 받는 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흥분되는 경험이건만 아마도 부케를 받으러 나서는 순간 선우와도 친분이 있을 많은 연예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몇 배는 더 긴장이 되는 희원이었다.

  "자,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받으실 친구분 앞으로 나와 주세요."

  카메라기사의 부름을 받은 희원은 그냥 달아나 버리고만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채린 곁으로 나아갔다. 결혼 앨범 촬영을 위한 카메라 말고도 여기 저기에서 채린의 결혼 취재를 위해 나온 기자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에 희원은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채린이 던진 부케를 약간 기우뚱한 자세로 희원이 받아들었을 때 정신없이 작열 하는 카메라 플래시 불빛에 희원은 꼭 눈이 멀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휴우. 어쨌거나 실수 없이 잘 받아내서 다행이지 뭐야.'

  자신의 역할을 다한 희원이 남모르게 식은땀을 찍어내며 뒤로 물러 나와 선우 곁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희원은 또 한 번 작열하는 플래시 불빛 앞에서 넋빠진 사람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선우씨, 지금 동행하신 여자분이 채희원씨 맞죠?"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간 기자 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선우가 짤막하게 답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숨겨둔 애인을 정식으로 공개하시는 겁니까?" 이 번에는 은테 안경을 쓴 다른 남자가 물었다.

  "꼭 공개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한채린씨 부부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동행한 것뿐입니다."

  "한채린씨와 은선우씨 두 분은 원래 교제하던 사이가 아니셨습니까?" 이 번 질문 역시 또 다른 사내로부터 던져진 것이었다.

  "맞습니다."

  어찌 보면 선우에게나 선우 옆에 서있는 희원에게나 또 오늘 결혼식을 올린 채린 부부에게 대단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을 법한 질문이었지만 선우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짤막하게 대꾸한 후 옆에 서있던 희원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싸 안으며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희원은 그 질문을 던진 기자가 몹시 밉살스러워 보였다.

  "현재 애인께서 옆에 계신데도 당당하게 인정하시는 걸 보면 두 분 사이의 신뢰가 무척 단단하신가 봅니다." 

  밉살스러운 그 기자가 다시 던진 말이었다.

  

  "상황에 따라 상대를 바꾸어 교제하는 일이 젊은 남녀들에겐 자연스럽고 비일비재한 일 아닙니까. 그 과정에서 진짜 자신의 짝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거구요. 중요한 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충실한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 지금 제 옆에 있는 채희원양에게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기자님께선 무조건 처음 사귀던 분과 결혼하실 생각인 모양이로군요. 아주 특이한 사고 방식의 소유자십니다."

  선우의 재치있는 답변에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뒤이어 또 다른 기자 하나가 질문 아닌 요청을 해왔다.

  "괜찮으시다면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싶은데 좀 더 다정한 포즈를 좀 취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상관없지만 채희원양은 아직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사진촬영은 사양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우는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마치 희원을 경호라도 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줄곧 유지하며 부랴부랴 식장을 빠져 나왔다. 물론 더 이상의 사진촬영은 사양하겠노라 밝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식장을 빠져 나오는 내내 두 사람의 뒤에선 연신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그것은 두 사람이 채린 부부에게 간단히 덕담을 해주고 작별을 고한 뒤 선우의 차에 오를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휴우."

  차에 시동을 건 후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마자 선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곤 희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땀 좀 뺐지? 어때, 이쯤에서 나에 대해 좀 회의가 들기도 하고 그렇지는 않니?"

  "회의라뇨? 땀을 뺀 건 사실이지만 회의가 드냐는 말은 이해가 안 가는데요?" 희원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되물었다.

  "내가 가수 생활을 계속 하는 동안은 조금 전 보다 더 지독한 경우들과 부딪힐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 다소 근심 섞인 어조로 선우가 대꾸했다.

  "글...쎄요. 난 아무래도 원래가 연예인 체질이었나봐요. 질문의 내용을 떠나 플래시 세례를 받으니까 실은 좋기만 하던데요."

  "뭐?"

  희원이 입을 가리고 킥킥대는 모습에 그제야 저으기 마음이 놓은 듯한 얼굴로 선우가 희원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려 놓는다.

  "그런데 말예요."

  "응?"

  "아까 식장에서 봤는데 선우 오빠 연극배우 강민우씨랑도 잘 아는 사이인가 봐요?"

  "응. 그럭저럭. 근데 왜?"

  "인사 좀 시켜 달랠 걸."

  "인사?"

  "제가 강민우씨 팬이거든요."

  "뭐?"

  "아마도 그 분이 출연한 연극은 거의 다 봤을 걸요."

  "네 취향이 그런 느끼한 노땅 취향인지는 몰랐다."

  "느끼한 노땅 취향이라뇨. 강민우씨가 얼마나 지적이고 샤프한 배운데요."

  "쳇, 지적이고 샤프한 사람이 죄다 이민간 모양이다."

  "어머? 왜 그렇게 사람이 꼬였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야야, 그 사람이 지적이고 샤프하면 난 아라비아의 왕자다. 게다가 그 사람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 안 가는 이유가 뭔 줄 알아? 한 여자한테 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라구. 그런 남자가 무슨 샤프는......"

  "누가 그 사람하고 연애하겠대요. 배우로써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 뿐이지. 이제 보니 선우오빠 참 쪼잔하네. 남의 취향을 그렇게 대놓고 묵살하다니. 게다가 자기랑 친분있는 사람 뒷다마나 까고."

  "뭐, 쪼잔? 그리고 뒷... 뒷다마? 너 말 다했냐?"

  "다했다면요."

  "어쭈. 까불지 말고 사과해라 너 나한테."

  "못해요."

  "사과해라."

  "절대로 못해요. 사과 받고 싶으면 남의 개인적 취향을 함부로 깍아 내린 오빠부터 하세요. 그럼 나도 사과하죠."

  "난 틀린 소리 한 거 없어."

  "......"

  희원은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으로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꼭 다물고는 창 밖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동안 선우 역시 희원과 마찬가지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전념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채 오 분을 넘기지 못하고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너 삐졌냐?"

  "......"

  "희원아."

  "......"

  "......"

  "......"

  "뭘 그런 걸 가지고 삐지고 그러냐."

  "......"

  "뭐라고 말 좀 해 봐."

  "......"

  "야아!"

  가만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선우였다. 희원이 강민우란 배우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얘길 듣는 순간 갑자기 내장이 온통 뒤틀린 기분을 느끼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던 선우는 무조건 강민우란 남자를 깎아 내리는 데만 급급해 희원의 말처럼 그녀의 개인적인 취향을 묵살하고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결국 질투심에 눈이 멀어 희원의 기분 따윈 생각지 못했던 것이 그의 실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 자존심에 쉽사리 미안하단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선우는 희원의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우는 잠시 주차가 가능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너 정말 계속 말 안 할거야?"

  "......"

  "계속 그러면 내가 너 억지로 웃게 만든다."

  "......."

  "후회하지 마, 너."

  "......."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희원을 향해 선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서서히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물론 희원은 처음엔 아무런 미동도 않은 채 선우를 무시하는 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능글맞은 웃음까지 슬슬 흘리며 자꾸만 다가드는 선우를 무작정 모른 척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지금?"

  "뭘하긴. 우리 희원이가 다시 나를 보고 웃게 만들려고 하는 거지."

  "참 나. 내가 바보예요. 아무 때나 실실 거리고 웃게?"

  "그건 두고 보면 알테지. 흐흐."

  그렇게 슬금슬금 다가 들던 선우가 희원의 코 앞 까지 다가와서는 갑자기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이며 겨드랑이 그리고 옆구리를 오르내리며 마구 간지럼을 태웠다.

  "꺅!"

  "흐흐. 어때? 이래도 안 웃을거냐?"

  "아하, 아하하. 이... 이건... 꺅, 반칙 이예요. 끼아하하! 그, 그만 해욧!"

  "화푼다고 약속하면 관두지."

  "사, 사과부터 하라고 했... 아하하하! 그만! 아하하하!"

  "빨리 약속 안 하면 이 번엔 요기 찌를거다."

  

  느끼한 웃음이 걸린 눈을 가늘게 뜨고 선우가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인 곳은 다름 아닌 희원의 가슴이었다.

  "꺅! 그러기만... 아하하...아하... 해요! 끼아아아악!"

  

  희원 역시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며 선우의 손길을 밀어내 보려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의 왼 손이 정말로 그녀의 가슴 쪽으로 다가왔을 때 희원은 자동차가 떠내려가라 비명을 질러대다 항복을 외치고 말았다.

  "아, 알았어요. 항복! 항복!"

  "이런, 그냥 항복하지 말지. 지금 생각하니 난 이대로도 좋은 걸."

  "그만, 간지러워욧! 끼아하핫! 그만! 그만!"

  "쩝. 하는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으니."

  선우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다시 몸을 세우고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자 희원은 학학거리며 숨을 몰아 쉬곤 겨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비열한 방법이에요."

  "어쭈. 한 판 다시 붙을까?"

  "아, 아니에요."

  "그럼, 이제 웃어봐."

  "웃음이 나와야 웃죠?"

  "여지껏 그렇게 웃으면서 연습을 했는데도 안 나와? 그럼 연습을 좀 더 해야겟군."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 이제 됐죠?"

  희원이 입술을 가능한 양 옆으로 잡아당기며 웃는 표정을 만들어내자 선우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웃으니 얼마나 이뻐."

  "칫."

  "앞으로 내 앞에선 항상 웃어라, 채희원."

  "몰라요."

  "훗. 고집은 있어 가지고."

  "......" 

  "우리 나온 김에 데이트나 하고 들어가자."

  "데이...트?"

  "그래. 먼저 내가 우리 희원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부터 하나 사주지. 사과하는 뜻에서."

  "사과...하는 거예요?"

  "아니 사과하는 뜻에서 아이스크림 사준댔지 사과한다고는 안 했어."

  

  선우의 대답에 희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것 봐. 웃으니까 진짜로 이쁘잖아."

  "내가 선우 오빠 고집에 졌어요, 졌어, 정말."

  "그러니까 더 이쁘네. 이쁘다, 우리 희원이. 이리 와. 그런 의미에서 내가 뽀뽀해줄게."

  "됐어요, 누가 뽀뽀해 달랬어요."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리 와 봐라. 쪽! 쪽! 쪽!"

  마다하는 희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이마며 뺨이며 콧날이며 가벼운 입맞춤을 뿌리던 선우의 키스가 이내 농도 짙은 입맞춤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도 뿌루퉁했던 감정들은 모두 눈 녹듯 사라져버린 희원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선우의 키스에 열렬히 화답하기 시작했다. 

  "어때, 아이스크림 보다 더 맛있지?"

  잠시 입술을 떼고 선우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희원은 대답 대신 냉큼 선우의 목을 다시 끌어안으며 좀 전까지의 키스로 더욱 빨갛고 촉촉해진 그의 입술을 달콤한 꿀이라도 되는 양 핥고 또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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