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 (65/75)

   

# 65.

  "꼭 이렇게 양복까지 입고 가야 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길래." 슈트 상의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선우가 영 마땅치 않은 얼굴로 자꾸만 성진에게 되묻는다.

  "나도 몰라. 매니저형이 그냥 무지 중요한 자리니까 꼭 정장차림으로 나와야 된다고만 하더라고. 양복은 너보다 더 싫어하는 준희도 어쩔 수 없이 입었잖아. 아무튼 그만 툴툴거리고 준비 다 됐으면 어서 나가자."  

  성진의 손에 등을 떠밀리다 시피 자신의 방을 나온 선우는 앞장 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실로 내려오자 성진의 말처럼 양복은 죽어라고 입기 싫어하는 준희가 거의 단벌에 가까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자리길래 이 난리래냐?"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준희를 향해 선우가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역시 거실에 내려와 있던 희원과 눈이 마주친 선우는 준희와 마친가지로 슬쩍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가 정장 차림을 한 모습을 처음 보는 희원은 다소 생소하기는 했지만 칼라가 큰 흰색 드레스셔츠에 은회색 스트라이프가 잔잔하게 들어간 검은 색 슈트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여지껏 그녀가 보았던 어떤 모델보다 최고로 멋지고 근사해 보여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콩닥거릴 지경이었다.

  "자자, 어서들 출발하자." 성진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두에 발을 끼워 넣으며 두 남자들을 채근했다.

  "나영아, 놀러왔는데 우리가 나가게 돼서 어떡하냐?" 

  선우가 거실 소파 앉아 희원이 내다 준 과일을 아삭거리고 있는 나영을 향해 미안해하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연락도 않고 불쑥 찾아온 내 불찰도 있지 뭐. 그리고 뭐가 걱정야 여기 이렇게 희원씨가 있는데. 안 그래요, 희원씨? 나랑 놀아줄 거죠?"

  "아, 네. 네에 그럼요."

  나영에게 웃는 얼굴로 대꾸를 하고 난 후 희원은 이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선우를 바라보며 아무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아주 잠시 잠깐 선우의 눈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선우가 몸을 돌려 신발을 신자 아까부터 별나게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성진이 선우와 준희의 등을 툭툭 치며 현관문 밖으로 몰아대고는 거실에 남아있는 두 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여 보였다.

  "그럼, 우리 나간다."

  "잘 다녀와요." 희원이 미소 띤 얼굴로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알았어."

  뒤이어 대꾸하는 나영. 그런 나영을 향하는 성진의 시선에 뭔가 묘한빛이 서려있다는 것을 희원은 그 때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뒤편에 앉아있던 나영이 성진을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는 사실도.

  "우리도 이럴 게 아니라 같이 외출이나 해요, 희원씨. 내가 근사한 데서 저녁 살게요." 

  세 남자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나영이 갑자기 손가락을 탁 튕기며 불쑥 희원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외출이요?" 갑작스런 제의에 희원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는다.

  "아참참, 내 정신 좀 봐. 먼저 희원씨한테 줄 게 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희원씨 이거 내가 주는 선물!"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두 손바닥을 짝하고 마주쳐 보이던 나영이 소파 옆에 내려두었던 커다란 쇼핑백을 집어 희원에게 건넸다.

  "예? 선물... 이요?" 얼떨결에 나영이 건넨 쇼핑백을 받아든 희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 지난번에 희원씨가 식사 대접을 하도 잘 해줘서 며칠 전에 쇼핑 나갔다가 샀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내 성의 무시하지 않을 거죠?"

  당장 그녀가 내민 선물을 받아주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아 몇 날 몇 일간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릴 지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듯한 나영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희원은 오빠나 동생이나 두 남매가 똑같이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드는 재주가 있는 모양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사이즈가 맞을 지 모르겠네. 한 번 입어봐요, 희원씨.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도 한 번 보고 싶어요."

  아마도 쇼핑백에 든 선물은 옷인 듯 싶었다. 희원은 나영의 채근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쇼핑백을 들고 가까운 성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쇼핑백을 열어본 희원은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 옷을 넣은 쇼핑백치곤 다소 묵직하다고 여겼었는데 정말이지 놀랍게도 그 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희원이 제일 먼저 꺼내든 것은 하얀 기름 종이에 쌓인 원피스 드레스였는데 포장 종이를 벗기고 보니 탄성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운 옷이었다. 누가 입는다 해도 요정 아니면 천사처럼 보일 것만 같은 옷이었다. 다음 번에 손에 잡힌 것은 방금 전의 원피스와 너무도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은회색의 하늘거리는 스카프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꺼낸 것은 잘 모르는 희원이 봐도 무척 고가품일 듯 보이는 고급스러운 정장용 핸드백이었다. 쉬이 볼 수 없는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가죽이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희원이었다. 가방 안쪽은 또 얼마나 잘 만들어졌을까하는 맘으로 살짝 백을 열었더니 아니 이게 또 웬일인가. 그 안에는 그녀의 눈을 꼭 사로잡는 모양의 귀고리와 목걸이가 세트로 들어있었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선물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파고들 짬 없이 저으기 흥분감을 느끼던 희원이 쇼핑백 밑바닥에서 마지막으로 집어든 것은 하얀 상자였자. 그리고 그 안엔 아까워서 어떻게 신을 수 있을까 싶게 새하얀 구두가 한 켤레 들어있었다. 희원은 마치 도깨비 방망이라도 휘둘러 갖고 싶은 것 나와라 뚝딱하니까 순식간에 눈앞에 툭하고 떨어져 내린 물건들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무튼 워낙 메이커다 명품이다 하는 쪽엔 문외한 인 희원이었기에 망정이기 그녀가 대강이라도 그 물건들의 가격을 추측할 수 있었다면 까무러치기 일보직전까지 갔을는지도 모를 일일 것이다. 아니 분명 까무러쳤을 것이다. 

  하여간에 하나 같이 너무도 마음에 드는 물건들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희원은 도저히 그것들을 선물이란 명목으로 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부담스러웠기에 요정 드레스 같은 원피스 하나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원피스 사이즈는 맞춘 듯 그녀에게 꼭 맞았다. 희원은 성진의 방에 있던 전신에 거울 앞으로 냉큼 달려갔다. 

  "와아! 와아아!"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희원은 자꾸만 입이 벌이지는 것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똑똑'

  "희원씨, 다 갈아입었어요?"

  방문 밖에서 노크 소리에 이어 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에!"

  "나 들어가 되죠?"

  "네에, 들어오셔요."

  희원의 대답이 떨어지자 곧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나영이 거울 앞에 서있던 희원의 모습을 보곤 감탄사부터 터뜨렸다.

  "오! 너무 잘 어울리네요. 요정 같아요!"

  "고, 고맙습니다." 희원이 얼굴을 붉혔다.

  "참, 구두는 신어봤나요? 사이즈가 잘 맞던가요? 그냥 눈대중으로 사온 거라."

  "아니요, 나영씨. 선물은 이 옷 하나만으로도 과분해요. 마음은 고맙지만 다른 건 받을 수 없어요." 

  혹여라도 나영의 진심에 상처를 주게 될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나 확실하게 희원은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갑자기 나영의 표정이 진지해 지더니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희원씨, 이 선물들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선물들 이예요. 아니 아주 많이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지금 당장은 그 의미를 말해줄 수 없지만 희원씨도 곧 그 의미를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만 조금 궁금하더라도 참고 이 선물 받아줘요. 내가... 부탁할게요."

  희원은 너무도 진지한 나영의 태도와 눈빛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줄곧 그녀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하지만 당장으로선 희원이 이해하기 힘든 의미가 담긴 선물이라니. 

  뭐라 대꾸는 않고 있지만 이미 희원의 눈빛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을 읽어낸 나영이 희원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이왕 내친 김에 하나 더 부탁할게요, 희원씨. 오늘 나랑 외출할 때 내가 선물해 준 옷 입고 나가줄래요? 구두랑 악세사리랑 백도. 그래 줄 수 있죠?"

  왠지 그녀의 뜻을 거슬러선 안 될 것 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굳이 나영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설혹 그것보다 더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일 지라도 나영이 원한다면 어떻게든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을 희원이었기에 그녀는 뜸들이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나영의 얼굴 가득 예의 그 환하고 매력적인 웃음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도대체 무슨 중대한 미팅이 있기에 정장 차림까지 하면서 불려 나왔는 지 그 때 까지도 알 수가 없었던 선우는 소규모 모임을 위해 적당한 크기의 룸을 대강 둘러보다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식당측에서 오늘 이 룸에서 예약된 모임의 취지를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군. 아니면 웨이터가 방을 잘못 안내한 것인지도 모르지. 이건 완전 약혼식장이나 결혼 피로연 장소같은 분위기잖아.'

  "그나저나 성진형. 약속 시간은 제대로 알고나 온 거야? 왜 다른 인간들은 그림자도 안 비치는 거지?" 

  매니저가 알려줬다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 벌써 삼 십분이 넘어가는 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자 어떤 의미의 회합자리인지 아직 정확한 성격은 모르지만 정장을 입고 나오라 마라 하는 것 자체부터가 처음부터 마땅치 않게 느껴졌던 선우가 조바심을 내며 성진을 향해 물었다. 

  "뭐, 기다리다 보면 들 오겠지.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보자고."

  조바심 잘 치기로 따지자면 선수급인 성진의 의외로 느긋한 대답이었다. 그러고보니 선우 자신을 제외한 성진과 준희 두 사람은 조금도 지루한 기색들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벼운 몸싸움들까지 곁들이며 희희낙락 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매니저형한테 전화라도 해봐야겠군."

  한동안 개구쟁이들의 장난질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다른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던 선우가 룸에 걸린 벽시계를 힐끗 돌아보곤 곧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성진이 정색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좀 전에 해봤어. 길이 막혀서 이 삼 십 분 정도 더 있어야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더라."

  "형이 매니저형이랑 통화했었다고?"

  "그래, 아까 화장실 다녀오다 전화 해봤어."

  내내 룸에서 준희와 함께 투덕거리고 장난질만 치던 성진이 도대체 어느 틈에 전화를 했단 말인가 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선우에게 성진은 턱 밑을 긁적거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결국 선우는 도리 없지 하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다 팔을 괴고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성진과 준희가 서로를 향해 가슴을 쓸어내려 보이는 시늉을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몇 십 분 더 흘려보낸 뒤였다.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다른 손님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 들어온 웨이터의 초록색 조끼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서 세 사람을 한 시간 가까이나 기다리게 만든 장본인들이 룸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의 얼굴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놀라움의 빛이 가득 차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웨이터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선 두 인물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아니 마치 겨울 숲에 살고 있는 눈의 요정 같은 모습의 희원과 그런 희원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 들어온 나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때 너무도 뜻밖이라는 얼굴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은 비단 선우뿐이 아니었다. 룸 안에 들어선 희원 역시 선우와 성진, 준희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곤 눈이 있는 대로 휘둥그레 졌다.

  "야,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선우가 물었다.

  "왜? 우리가 못 올 데라도 온 거야?" 

  나영이 발랄한 목소리로 대꾸한 후 성진과 준희를 돌아보며 뭔가 의미심장해 보이는 웃음을 보냈을 즈음에야 선우는 자신의 등 뒤 쪽에 서있던 두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그 들은 하나도 놀라워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삼 십 분 이 후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더니." 성진이 나영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전혀 핀잔을 주고 있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좀 늦어졌네. 많이 기다렸지?"

  "우리야 뭐 괜찮았는데 선우형이 몸을 꼬고 난리도 아니더라구. 크크크." 

  준희까지 합세해 선우와 희원을 뺀 세 사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으로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선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매니저형은? 꼭 정장차림이 필요하단 그 약속은?"

  "매니저형은 그냥 내가 둘러대느라 이름만 팔은 거구. 여기서 나영이랑 만나기로 잡은 약속은 꼭 정장차림이 필요한 약속 맞구." 성진의 대답이었다.

  "사실 꼭 정장을 입어야 될 필요는 없지 않겠냐구,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내가 그랬는데 나영이 누나가 도끼눈을 뜨면서 어찌나 무섭게 째려보던지."준희가 히죽이 웃는 얼굴로 나영을 쳐다보며 한 말이었다.

  "오늘 같이 특별한 날 부득이한 상황도 아니고 격식 갖춰 정장 입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아무튼 준희 넌 그래서 내가 아직도 어린애라고 하는 거야."

  "쳇, 그런 걸로 애어른을 가르다니. 누난 너무 보수적이고 편파적이야."

  "나영이가 어때서? 내가 보기에 편파적인 경향을 가진 건 바로 준희 너 같은데." 성진이 정색을 하고 나영의 편을 들고 나선다.

  "우쒸, 성진이형은 나영이 누나한테 뒤로 뭐라도 받아먹은 사람처럼 맨날 나영이 누나 편만 들지. 치사하게 정말. 이럴 땐 한 집에 사는 사람편을 들어줘야 되는 거 아냐?"

  "너 방금 나한테 치사하다고 했냐? 이씨, 쪼끄만게."

  "쪼그맣긴. 형보다 십 센티는 더 크다."

  "어허, 요즘 군기가 단단히 빠졌군. 마음 같아선 얼차례 한 번 빡시게 돌리고 싶다만 날이 날이니 만큼 장소가 장소니 만큼 내가 봐준다. 황준희,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성진을 향해 입을 삐죽이 내밀어 보이는 준희를 보고 키득거리던 나영이 이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멀뚱히 서서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선우와 희원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두 사람 놀란 얼굴들을 보니까 우리들이 계획한 깜짝한 쇼가 성공인 모양이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들한테 미리 알려주고 하는 깜짝쇼는 깜짝쇼가 아니잖아?"

  "깜짝쇼라니... 무슨......"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선우가 나영을 향해 좀 더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을 구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을 때 룸 밖에서 다시 가벼운 노크가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나영의 대답소리에 뒤이어 문이 열리고 웨이터 두 사람이 룸 안으로 케익을 받친 커다란 쟁반을 마주 들고 들어왔다. 화사한 핑크색이 너무도 고와도 보이는 5단 짜리 케익이었다.

  "확실히 우리끼리 다 먹어치우기엔 크긴 하네. 하지만 뭐 이쯤은 되야 폼 나지. 안 그래?" 

  나영이 다시 성진과 준희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투로 묻자 두 사람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나영은 이어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 때까지 룸 안에서 다음 지시사항을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들을 향해 물었다.

  "테이블 세팅은 다 되어있고... 음식들은 다 준비됐나요?"

  "예. 지금 올릴 까요?"

  "아뇨. 음식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올려주시고요, 그 보다 예약할 때 부탁드렸던 TV수상기는....."

  "그것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웨이터가 자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빨리 그것부터 가져와 주시겠어요. 어머,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TV 수상기 좀 빨리 부탁드려요."

  "예.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바람처럼 그러나 조용히 룸 밖으로 사라졌을 때 상황을 지켜보면 볼수록 점점 더 의아스러워질 뿐이었던 희원이 선우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혹... 오늘 선우오빠 생일이었어요?"

  "아니."

  '휴우, 다행이다. 선물은커녕 꽃 한송이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혹여라도 그 날이 선우의 생일 축하를 위한 깜짝 파티 자리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희원은 일단은 한 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선우의 생일파티도 아닌 이 자리가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마련된 자리인지 더욱 궁금증이 짙어진 그녀였다. 

  '도대체 저 커다란 케익은 뭐고 TV 수상기는 왜 필요한 거지?'

  잠시 희원과 의아한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선우가 테이블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핑크색 5단 짜리 케익을 바라보며 슬쩍 눈쌀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금 전의 웨이터 두 사람이 TV 수상기를 들고 룸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적당한 자리에 TV 수상기를 내려놓고 코드를 꼽은 후 돌아가자 나영이 웨이터가 건네주고 간 리모콘을 이용해 얼른 TV를 켰다. 그녀는 몇 개의 채널을 거쳐 토요일 저녁 시간대에 방영하는 연예가 정보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했는데 그 때 선우와 희원 두 사람은 또 한 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화면에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미랑의 모습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걸고 있는 나영이 리모콘으로 TV의 볼륨을 높였다.

  [결혼발표 2주만에 여러분들께 이런 발표를 하게 되어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 두 사람은 결혼 준비를 계기로 양가의 가풍이나 개인적인 성격차이에서 오는 문제들을 극복키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결혼 취소라는 유감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자 여러분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바입니다.]

  분장인 지 실제인 지 모르겠지만 화면에 비치는 미랑의 모습은 매우 피로하고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TV 화면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 입을 뗄 때마다 선우와 희원의 얼굴은 놀라움과 의혹으로 시시각각 굳어져 갔다. 두 사람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랑 스스로가 대중들 앞에 결혼 취소를 공표하고 있다니! 선우는 그것이 그녀가 마치 더 지독한 계략을 위장하기 위한 속임수의 일환으로 자행하는 쇼는 아닐까하는 의혹까지 품을 지경이었다.

  [제 개인적으로도 마음의 상처가 깊지만 공인된 입장으로 인륜지 대사인 결혼을 두고 대중들께 이와 같은 경솔한 처신으로 물의를 빚게되어 사죄말씀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오늘 참석해 주신 기자분 여러분들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발표를 끝으로 질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화면 속의 미랑은 실지로 큰 상심을 한 사람인 양 창백한 얼굴에 눈물까지 살짝 글썽이는 모습으로 재빨리 좌석에서 일어나 뒤쪽 출입구로 향했다. 물론 그녀의 등뒤로는 수 없이 터져 대는 플래시라이트와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빗발치는 질문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은선우씨는 그럼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결혼발표 때와 마찬가지로 은선우씨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어째서 매번 기자회견 때마다 이미랑씨만 참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에 대해 한 마디만 해주고 가시죠!]

  [결혼발표가 나간 후 은선우씨가 두문불출 매스컴과의 접촉을 피하기만 했었다는 사실은 무슨 이유때문이죠?]

  [지난번의 결혼발표가 정말 은선우씨와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발표가 확실한 겁니까?]

  순서 없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기자들의 질문이 겹치자 그것이 마치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의 무서운 다그침처럼 들린다고 희원은 생각했다. 그들의 질문은 거의가 이 모든 상황이 처음부터 미랑의 자작극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혹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어땠어? 내가 오빠랑 희원씨,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어."

  그 즈음에서 TV 전원을 끈 나영이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서며 의견을 묻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지?" 

  선우가 다소 경직된 얼굴로 나영을 마주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나영이 선우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바보 같은 오빠야. 내가 끝까지 모를 줄 알았어? 오빤 오빠 동생 은나영을 아직도 그렇게 몰라?"

  "나영아." 차츰 안색이 당혹한 빛으로 변해 가는 선우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리석은 희생 따위 내가 달가워 할 줄 알았어? 눈물나게 감동적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느냐고. 천만에 틀렸어. 내가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그 즉시 오빠한테 달려가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왜 인줄 알아? 그나마 내가 그 사실을 빨리 알았기에 망정이지 좀 더 늦게 알았다면 오빠랑 나 우리 두 사람 모두 회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인생을 살아야 했을 테니까. 오빠야 그래도 나름대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위한 희생이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난 뭐야? 내가 죽는 날까지 오빠의 희생을 갚지 못할 빚으로 평생을 지고 살길 바랬던 거야?"

  "나, 나영아..." 

  "오빠. 오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굳이 그런 바보같은 희생 따위 하지 않아도 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관련된 일을 그런 식으로 나한테 일언반구 한 마디 없이 오빠 혼자 결정하려 들려했다는 건 월권행위라고. 아무리 오빠라도 내 인생이 관련된 일을 그렇게 함부로 판단해서 오빠 맘대로 좌우하려 했던 건 정말 옳지 않다고 봐."

  "미안...하구나.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미안해하라고 한 얘긴 아니었어. 오빠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지금 오빠 옆에 서있는 희원씨야."

  나영이 선우의 한 쪽 손을 끌어다 희원의 손에 쥐어주며 다시 말을 잇는다.

  "희원씨, 나도 사과할게요. 내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찌됐든 나만 아니었으면 희원씨한테 그런 마음 고생 안 시켜도 되었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희원씨. 그리고 바보 같은 오빠를 둔 것도 미안하구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나영이 희원을 향해 그녀의 진심을 전했다. 

  "나영씨, 그런 말씀... 마세요. 나영씨가 제게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요." 희원은 그런 나영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무튼 적어도 우리 오빠 사과는 꼭 받아야 해요. 선우 오빠 뭐해? 얼른 희원씨한테 사과하지 않고."

  나영의 채근을 받은 선우가 어색한 표정으로 희원을 돌아본다. 그런 선우를 희원은 괜스레 붉어진 얼굴로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선우 역시 애꿎은 헛기침만 몇 번 해 보이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다시 나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아니 그 쪽 집안에선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그냥 널 받아주겠대?"

  "누가 누굴 받아준다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 짐짓 딴소리를 하는 나영을 바라보는 선우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오빠 정말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거 알아?"

  "착각?"

  "그래, 착각. 내가 분명 대한 그룹 최회장님의 막내 아들 최재섭과 사랑에 빠졌던 것은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결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결혼 해서 가정과 직장 뭐 하나 제대로 꾸려가지 못해 자괴감에 빠지는 여자 역할 눈곱만치도 욕심나지 않는단 말씀이에요."

  

  나영의 말은 액면 그대로 였다. 재섭쪽에서 혼자 결혼을 서두르는 눈치였지만 나영은 내내 결혼에 대해선 회의적인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모가 나연희라는 얘기를 접하자마자 재섭이 그토록 조르고 서두르던 혼사문제에 대해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를 보이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나영이었다. 재섭에 대해 품고 있던 신뢰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믿음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녀는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깊고 얕음과는 상관없이 믿음이 선행되지 않은 사랑은 일찌감치 접는 게 상책이라는 현명을 판단을 내렸고 상실감의 빠른 치유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에 더욱 정진하리라 마음먹고 있는 중이었다.

  "오빠, 아까도 말했지만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 나도 이제 성인이라고. 그러니까 내 걱정은 이제 그만하고 오빠는 오빠 인생만 생각해. 오빠의 행복만 생각하라고. 그게 진짜 날 위해주는 길일 거야. 알았지?"

  "......" 

  선우는 왠지 목이 탁 메이는 기분을 느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그런 오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원 또한 눈시울이 후끈후끈 해지는 것 같았다.

  "자자, 이제 식을 시작해야지!" 불쑥 성진의 굵직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식?"

  "식이라니?"

  선우와 희원이 성진을 돌아보며 거의 동시에 의아함을 표시했다.

  "내가 오늘 왜 양복을 입었는데. 두 사람 언약식 자리만 아니었어도 절대로 안 입었을 거야." 투덜 거림조로 얘기는 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 준희였다.

  "언약식?" 또 다시 선우와 희원이 동시에 목청을 높였다.

  "두 사람 그 동안 마음 고생들 많았잖아. 오늘 우리가 준비한 언약식으로 아팠던 기억들, 슬펐던 기억들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들 되면 좋겠어."

  나영을 비롯 성진과 준희 모두 한결같은 바램이 담긴 표정으로 선우와 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와 희원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감격에 겨워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다들... 정말 고마워." 

 가까스로 입을 뗀 선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고맙다는 몇 마디의 말이 다 였지만 잠시동안 룸 안엔 왠지 숙연한 기분이 감돌았다.

  "자자, 뭐 언약식이라고 별로 거창할 건 없고 두 사람이 반지 정도나 서로 나눠 끼워주고 케익 자르고, 참석객 서비스차원에서 찐하게 뽀뽀나 한 번 하면 되는 거지 뭐. 참, 반지는 나영이 네가 가지고 온댔지?" 

  분위기 메이커인 성진이 금세 호들갑 목소리로 바꾸어 지저귀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응, 내가 가지고 있어. 선우 오빠 여기 희원씨에게 끼워줄 반지 내가 준비해왔어. 아무래도 오빠가 직접 준비했디면 좋았겠지만 오늘은 그냥 내가 준비해 온 걸로 만족하길 바래. 내가 두 사람에게 주는 두 번 째 선물이기도 하니까. 오케이?"

  언약식 따위 꿈도 꾸지 않았을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한 반지 따위를 준비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때문에 나영이 두 사람을 위한 선물 차원에서 준비한 반지 상자를 꺼내 들었을 때 문득 선우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을 제지하자 나영을 비롯 언약식을 몰래 계획하고 있었던 성진과 준희는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맙다, 나영아. 하지만 네가 준비한 그 반지는 그냥 축하선물로 따로 받을게. 대신....."

  나영의 손을 제지해서 잠시 룸 내에 있던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선우가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목에서 목걸이 하나를 풀러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 그의 행동에 주목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선우가 풀러낸 목걸이에 두 개의 반지가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좀 전과는 다른 의아함이 떠올랐다.

  선우가 목걸이에서 빼낸 두 개의 반지를 쥐고 희원에게 돌아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날...수료전시회가 있던 날 네게 주려고 샀던 거였어. 하지만... 결국 그 날 난 네게 이걸 줄 수가 없었지. 아주 비싼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이 담긴 반지였는데. 대신 난 그 날부터 이 반지를 목에 걸고 다녔어. 죽을 때까지 내 몸에서 떼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헌데 이렇게 이 반지를 네 손에 끼워줄 수 있게될 줄은......"

  말을 맺지 못한 채 그저 그윽한 시선으로 희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선우의 눈빛은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고 있는 듯 해 보였다. 그 눈빛을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희원은 행복감보단 슬픈 느낌이 먼저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떠올라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내 선우가 희원의 손을 들어올리고 한 쌍의 반지 중 작은 것을 먼저 그녀의 약지 손가락에 끼워 주웠다. 놀랄 만치 크기가 잘 맞았다. 선우의 입가에 매우 만족한 미소가 번졌다.

  "꼭 맞네. 정말 다행이다. 그럼 내 건...희원이 네가 끼워 줘."

  선우가 건넨 좀 더 큰 반지 하나. 그가 희원에게 끼워준 반지와 같은 모양의 커플링이었다. 선우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희원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반지가 끼워진 손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여전히 떨림이 멈추지 않는 희원의 손을 꼬옥 붙잡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희원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희원아.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지 않을게. 왜냐면 너를 향한 내 마음은 늘 변함없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야. 하지만 네게 정말 부끄러웠단 말은 하고 싶구나. 우리 사이를 홀로 지켜낸 건 바로 너였으니까. "

 "아니에요, 선우오빠. 우리 사이를 지켜준 건 서로를 향한 마음과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혼자 지켜낸 게 아니고요."

  "희원아." 

  "선우 오빠."

  왠지 울먹하고 감동스러운 기분에 휩싸인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얽혀들어 있던 가운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샴페인이 터졌다.

  "야, 닭살 돋아서 도저히 더는 못 보고 있겠다. 빨리 케익 자르고 밥이나 먹자구!"

  "그러게 말야. 아무리 우리가 깔아준 멍석이지만 정말 너무들 하네. 우리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나 봐."

  너스레를 떠는 성진과 준희의 모습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선우와 희원, 성진과 준희. 다들 정말 오랜만에 티없이 맑게 갠 마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들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던 먹구름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듯 했다. 때문에 다섯 사람들 모두는 아무런 근심 하나 없는 그렇게 행복한 저녁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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