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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62/75)

  

# 62.

  2월 중순의 날씨임에도 무슨 바람이 불었지는 지 걸치고 다니는 외투가 거추장스러우리 만치 따스한 훈기가 느껴지는 날이었다. 나영은 지금 그녀와  며칠 차를 두고 어제 귀국한, 그녀와는 당사자들끼리 이미 결혼을 확정짓다시피 한 상대자인 재섭의 아파트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재섭은 아직 삼 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뛰어난 두뇌와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로 인해 아버지를 도와 두 형들이 경영을 돕고 있는 대한그룹에서 꽤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상태였는데 미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전자제품 시장의 판로를 더욱 육성키 위해 2년간 미국 지사에 머물다 우연찮은 기회에 나영과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재섭이 어렸을 적부터 무슨 일이든 똑 소리나게 잘 하던 야무진 성격의 나영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성격과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는 박식함 그리고 무슨 일에든 완벽을 기하는 치밀함이었다. 그러니까 당차고 똑똑한 그녀를 제압하고 리드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지적인 면에 높은 점수를 주던 그녀를 감동시킨 두뇌와 치밀함으로 무장한 세세하고 꼼꼼한 배려등이 어우러져 그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어지간해선 뭐든 쉽사리 성에 차지 않아 하는 성격의 그녀에게 재섭은 보기 드물게 근사하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남자였다.  

  하지만 그 날까지도 나영은 얼핏 보기에 모든 것이 완벽한 것만 같은 그녀의 연인의 치명적인 결점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적인 따스함이 부족한 마음과 모든 것을 지나치리만큼 계산해서 실리만을 추구하는 냉정함이었다. 그리고 곧 그 사실을 그녀 자신도 뼈저리게 절감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터였지만 그의 아파트로 향하는 택시에 앉아있던 나영은 그저 한동안 보지 못했던 연인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과 한편으로 며칠 내내 한 시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오빠 문제로 머리 속이 그득할 뿐이었다.

  '어떻게 됐어? 여전히 아무런 진전도 없는 거야?'

  '응. 오늘도 확인해 봤는데 별 건수 없어. 그 불여시 같은 게 요새 아주 몸조심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선우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직후 성진과 준희의 도움을 얻어 미랑의 뒷조사를 통해 뭔가 약점이 될 만한 건수를 잡아볼 요량이었던 나영은 그러지 않아도 그녀의 귀국 이 전부터 성진과 준희 두 사람은 물론 그들의 매니저까지 합세해 미랑에게 사람을 붙여놓고 물밑작업을 시도중이지만 별 성과가 없다는 맥빠지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나영은 거의 매일 전화통화를 통해 상황을 확인해보았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소식뿐이었다. 아마도 용의주도한 그녀가 그 부분까지 예상하고 각별히 몸을 사리고 있는 게 틀림없는 듯 했다.

  '데뷔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내내 소문이 별로 안 좋은 얘 였거든. 하지만 뭐 우리랑은 상관없으니까 전엔 별 신경 안 썼었지.'

  답답한 노릇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오늘 재섭을 만나러 가는 나영은 자신의 손에 한 가지 히든카드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폭탄이라고 했다지? 그 폭탄 내가 먼저 터뜨려서 물 먹여 주겠어. 그리고 나와 오빠에 인생에 끼어 들어 좌지우지하려고 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해줄 거야.' 

 딩동 딩동.

 나영이 초인종을 누른 지 몇 초만에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면서 날렵한 콧잔등 위에 무테 안경을 걸친 말끔한 인상의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어서 와. 좀 늦었네?"

  

  "차가 좀 밀렸거든."

채 신발도 다 벗지 못한 나영의 손을 끌어다 잡던 남자는 그녀가 거실에 들어서자 마자 마치 키스에 굶주린 사람처럼 다급하게 입술부터 포개왔다.

  "아직 재섭씨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하지만 그의 가슴을 밀어 몸을 떼어낸 나영이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며 한 마디 했다.

  "얼굴이야 앞으로 보고 또 볼텐데 뭘. 며칠 못 만난 동안 네 입술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아?"

  "아휴, 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 눈을 맞추는 것보다 입술, 입술을 맞추는 것보다 거기를.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그래. 남자란 원래 그런 동물이야." 

 나영의 핀잔 섞인 말투 따윈 아랑곳 않는 듯 재섭은 가늘게 눈웃음까지 치며 능글맞게 맞받아 쳤다.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인텔리도 어쩔 수 없군. 재섭씨 같은 남자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뭐 나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그런 걸 테니까 그냥 넘어 가줄게."

 재섭을 향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던 나영이 이내 애교가 넘치는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른다. 그러자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은 재섭이 뜨거운 숨결을 몰아쉬며 본격적인 키스를 시작했다. 한동안 정열적인 키스를 주고받던 그의 손이 어느 새 나영의 외투 속으로 파고 들어와 보드라운 감촉의 앙고라 스웨터를 거칠게 걷어올린 후 봉긋한 그녀의 가슴을 그러쥐자 나영이 다시 그에게서 몸을 떼내며 입을 열었다.

  "잠깐... 중요한 얘기가 있어."

  "조금 있다가 들으면 되잖아." 

  "중요한 얘기라고 했잖아."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우리 성질 급한 아가씨를 누가 말릴까."

 허기진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시 나영의 허리를 감싸안으려던 재섭이 왠지 단호해 보이는 나영의 표정을 읽어내곤 아쉬운 듯 물러나며 물어왔다.

  "우선 마실 거라도 좀 줄까?"

  "그럼, 에스프레소 한 잔 줄래요? 향기가 진동을 하네."

  "오케이. 지금 뽑고 있던 중이었는데 다 됐을 거야."

  재섭이 주방 입구로 보이는 흰색 격자 유리문 뒤로 사라졌을 때 나영은 널찍하다는 표현만 가지고는 부족한 커다란 거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주인의 성격과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군더더기 하나 없어 보이는 깔끔한 인테리어와 정돈 된 분위기에 나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영 역시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재섭의 거실은 밤중에 은은한 간접 조명만 밝혀둔다 해도 그다지 무드하고는 관계가 없을 듯해 보여 흘러나온 미소였다.

  "왜 앉지 않고?"

  에스프레소 두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나오던 재섭이 그 때 까지 거실 한 복판에 줄곧 서있던 나영을 향해 물었다.

  "거실 구경 좀 하느라고."

  "자, 그 쪽에 앉지." 재섭이 연회색톤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나영이가 즐기는 더블로 뽑은 거야. 마셔 봐. 원두가 제법 신선해서 혀끝에 닿는 느낌이 괜찮을 거야."

  "응."

  재섭은 왠지 평소보다 말수가 적은 듯 해 보이는 나영의 얼굴을 쳐다보다 왠지 그녀의 안색이 그리 밝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물었다.

  "어제 공항에 마중 나오지 말라고 해서 혹 토라졌던 거야?"

  "응? 아니."

  "미리 말했잖아. 내가 아무리 말려도 우리 모친하고 여동생은 극구 우기고 나올 거라고. 어정쩡하게 공항 같은 데서 널 그런 식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근사한 자리에서 정식으로 멋지게 소개하고 싶거든."

  "알아. 재섭씨야 뭐든 정식으로 그럴 듯하게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란 거."

  "어째 그 말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아냐, 그런 거. 내가 재섭씨를 비꼬긴 왜 비꼬아."

  "뭐 하긴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긴 해. 지나치게 모든 아구가 네 계획대로 딱 들어맞지 않으면 못 참는 고약한 성미 말야. 후후."

  나영은 재섭이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꼬아 얹으며 슬쩍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우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그에게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 그가 그녀의 예상과는 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 순간 갑작스럽게 그녀의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쉽게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것을 곧 기정 사실인 양 믿는 우를 범하곤 한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여자 쪽에서 더 빈번히 범하는 우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영은 재섭이 마음이 그녀와 같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섭씨한테 할 얘기가 있어."

  "그래, 들어보자고. 간만에 만난 연인사이의 스킨십까지 몰아내고 끼어 든 그 화제가 뭔지 말이야."

  "뭐 기대하시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화제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자기가 들어서 그닥 좋아할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지껏 일부러 숨겼던 것은 아니고... 뭐 굳이 꼭 밝혀두고 자시고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해야할까?"

  "이런...왠지 긴장되는 걸. 혹 꼭꼭 감춰두고 있던 첫사랑의 비밀 뭐 이런 걸 고백하려는 것은 아닐 테지?"

  나영이 재섭을 향해 농담하지 말라는 듯 잠시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전에 얘기했었지?"

  

  "그랬었지. 언젠가 지나는 말로 슬쩍 그랬던 것 같아. 헌데 그게 왜?"

  "재섭씨가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나도 굳이 얘기하지 않았었는데 나를 낳아주신 생모... 아직 살아 계시거든."

  "그래?" 

  나영의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재섭은 저으기 의외라는 듯 한 쪽 눈썹을 슬쩍 치켜 떴다.

  "그런데 꽤 유명한 사람이야. 아마 재섭씨도 알 거야. 탤런트 나연희씨라고."

  "뭐?! 누구라고?"

  재섭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결혼까지 결심하고 있는 나영의 생모가 하필 연예인이었다니! 이 사실이 그의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결혼이고 뭐고 자신은 된통 경을 치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꼭 닥쳐보지 않고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가풍에 단단히 물들어 자란 탓인지는 몰라도 재섭의 아버지, 그러니까 대한그룹의 최회장은 유난히 연예인들을 경시하고 혐오했다. 나이 지긋하고 다소 고지식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연예인들을 딴따라라 칭하며 좋지 못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최회장의 경우는 정도의 차원이 달랐다. 오죽하면 당신의 자식 중 누구라도 연예인과 조그만 스캔들 하나라도 만드는 날엔 상속자 명단에서 빼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을 정도일까. 그리고 그 엄포는 이미 공증을 받아 정식 문서화까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문득 재섭은 자신의 큰형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연극 서클 활동을 하던 여학생과 열애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는 맏이 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우선 순위와 맏이로서의 특권을 둘 째형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고약스러운 대가를 현재까지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 당시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큰형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여학생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었는데 결국은 최회장이 악랄한 수법을 동원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야 말았다.

  재섭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아찔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영의 오빠가 연예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커다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비록 나영 본인이 연예인이 아니라고는 해도 최회장은 그 부분을 순순히 넘기고 지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섭은 두 형들과는 열 살 가까이의 나이 터울을 지고 태어난 막내아들로 최회장의 유별난 귀여움 속에서 자랐고 다른 두 형들에겐 호랑이 같기만 하던 그가 재섭에게 만큼은 놀라울 만치 너그러웠기에 나영의 

오빠가 연예인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게다가 큰 재산가는 아니지만 나영의 집안이 꽤 뼈대있는 가문에다 대를 잇는 교육자 집안이라는 점, 나영이 외모나 두뇌나 어디에 내놓아도 출중한 인물이라는 점을 내세워 아버지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모가 유명한 연예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회장은 분명 가수노릇을 하는 그녀의 오빠까지 들먹여가며 핏줄이 어쩌니 저쩌니를 따지고 들것이다. 최회장이 사람을 평가할 때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혈통이었다.

  나영은 자신의 생모가 탤런트 나연희라는 얘기를 듣고 난 이후 재섭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탐탁지 않게 여기리라는 것을 조금도 예상치 못하고 있던 나영은 아니었지만 나즈막히 한숨까지 내쉬어 가며 시시각각 얼굴이 굳어져 가는 재섭의 모습에 그녀는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썩 달가운 반응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렇게 까지 쇼킹했어? 얼굴이 납빛으로 변할 만큼?"

  재섭의 굳은 얼굴만큼이나 나영의 목소리 역시 경직되어 나왔다. 최회장 뿐 아니라 재섭 역시 은근히 혈통이니 가문이니 배경이니를 따지는 성격이라는 걸 모르는 나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생모가 유명 탤런트라는 얘기에 저토록 대놓고 곤혹스러워 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남자라니. 나영은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기분이란 바로 그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 것 같았다.

  "왜 그런 얘길 이제서야 하는 거지?" 

  재섭이 노골적으로 눈쌀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이제서야 라니? 그게 무슨 의미야? 내가 진작에 보고했어야 할 사실을 너무 늦게 알려줘서 기분 나쁘다는 뜻이야 아니면 내가 고의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기라도 했다는 뜻이야?" 나영이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너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라? 소문도 못 들었니? 연예인이라면 무조건 치를 떠시는 분이야. 사실 우리가 결혼에 성공하자면 너희 오빠가 가수라는 장애부터 극복해야 하는 판국이라고. 헌데 난데없이 또 탤런트 생모라니. 난 지금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라길래 그저 네 친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새로 들어온 부인인 줄로만 알았어. 헌데 애까지 두고 이혼해서 지금까지 탤런트 생활을 하고 있는 생모라니.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하, 뭐라고? 우리오빠가 뭐 장애라고? 당신 여지껏 우리 오빠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어? 당신 아버지, 당신 집안은 뭐가 그리 잘나서 함부로 사람을 폄훼하는 거지?"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은나영." 재섭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남의 가족을 함부로 깎아 내리는 것은 말이 되고?"

  "이성적으로 대화 하자구. 너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이 폄훼 당할 때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까?"

  "좋아. 내 말투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폄훼할 의도를 가지고 한 얘기는 아니었어.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좀 더 빨리 얘기했더라면 문제가 덜 복잡했을 거란 얘길 하고 싶었던 거야. 솔직히 당황스러운 거 사실이야."

  재섭의 목소리는 한결 냉정을 되찾고 있었지만 그의 반응으로 인해 상처 받은 나영의 마음은 그러나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미안해. 당신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가족을 둬서. 하지만 나도 당황스럽네.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 내가 너무 오바해서 점수를 주고 있었나봐. 우리 결혼 얘기 없었던 걸로 하자. 당신 아버지가 대강 어떤 분인지에 대한 듣기는 했지만 그 정도 인줄은 몰랐어. 당신네 집안에서 원치 않는 결혼이라면 나도 굳이 하고 싶지 않아. 아마 당신에 대한 내 감정도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 봐."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니까. 우리 아버지도, 우리 결혼도!"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자기 옆에 구색 맞춰 세워두기에 괜찮아 보이는 상대쯤으로 여겼던 것뿐이지. 안 그래?"

  "은나영, 너 정말......"

  "그게 아니면. 당신 날 위해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 다 버릴 수 있어?"

  나영의 찌르는 듯한 질문에 재섭은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곰곰히 되짚어 보았다. 분명 그는 은나영이란 여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그가 가진 전부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나영의 생모가 나연희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가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낭패감이었다. 뒤 이어 따르는 감정은 아버지의 화를 사게 되어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누리게 될 것들을 잃게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영을 사랑했지만 만약 나영으로 인해 그것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나영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리라는 걸,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란 걸 재섭은 그 때 깨달았다. 

  어쩌면 나영의 말처럼 그는 나영을 자신의 옆에 구색 맞춰 세워두기에 알맞은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상대는 얼마든지 새로 찾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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