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이리 줘 봐. 내가 닦을 테니 넌 거기 앉아 구경이나 해."
희원이 물걸레를 쥐고 카페트 위에 얼룩진 커피 자국을 열심히 닦아 내고 있는 모습을 왠지 못 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던 선우가 문득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물걸레를 뺏어들며 말했다.
"준희놈은 다 큰 게 칠칠지 못하게스리 이 딴 건 쏟고 그래."
이른 아침부터 오후 2시가 넘어선 그 시각까지 희원이 잠시도 쉴 짬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선우는 그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시 일거리를 떠맡은 꼴이 되자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일거리를 만든 준희에게 은근슬쩍 부아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엉겁결에 손에 든 걸레를 빼앗긴 희원은 푸념조로 자리에도 없는 준희를 나무라며 카페트를 벅벅 문질러대고 있는 선우를 잠시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이내 그의 손에 들린 걸레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그렇게 너무 세게 문질러대면 카페트가 상한단 말예요. 나 둬요, 제가 할 테니."
"알았어, 살살 문지를 테니 걸레나 도로 줘 봐."
"됐다니까요. 제가 할 게요."
"넌 좀 앉아서 쉬라니까."
"금방 끝나요."
"어휴, 고집두."
"그래요, 나 고집 세요. 거기에 선우 오빠가 보태준 거 있어요?"
입술을 뾰죽이 내밀고 도전적으로 턱을 내밀며 빈정거리는 희원의 모습에 선우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채희원, 너 많이 컸다. 전엔 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으면서."
"그 땐 그 때고요. 지금은 지금이죠."
"야, 너 원래 이렇게 뺀질거렸냐? 그 동안 쑥맥인 척 했던 거 다 내숭이었지?"
"어머, 내숭? 그게 뭐예요? 뺀질? 그건 또 뭐죠? 아아, 궁금해라."
희원이 과장되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눈을 껌벅 거리고 있자 잠시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선우가 이내 실소를 금치 못하며 살짝 그러쥔 주먹을 들어올려 꿀밤이라도 줄 듯한 시늉을 해 보인다.
"요 요 요... 아휴, 하도 쪼그매서 때릴 데로 없네. 암튼 까불지 말고 좋게 말로 할 때 걸레 내놓구 넌 소파에 좀 앉아 있어."
"다 해 간다니까요."
"어허!"
끝내 희원이 고집을 부리며 손에 든 걸레를 내놓지 않자 선우가 눈쌀을 찌푸리며 어르는 시늉을 한다.
"칫, 은근히 권위적이셔." 하지만 희원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며 무시한다.
"우씨, 정말. 너만 고집 센 줄 알어. 나도 한 고집하는 사람...이야 이거. 잡았...다! 유후!"
갑자기 선우가 번개같은 동작으로 희원이 눈 깜짝하는 사이 그녀의 손에서 걸레를 빼앗아 갔다.
"앗! 이리 내요."
"으흐흐. 나도 고집 세다고 했지."
"......"
"쿡쿡쿡."
선우가 부루퉁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희원을 향해 여유만만한 미소를 날리고 있을 때였다. 좀 전의 선우와 같은 수법으로 희원이 그의 손에 들려있던 걸레를 되찾기 위해 살짝 몸을 날렸고... 그녀는 성공했다!
"아하하핫! 유후!"
마치 걸레를 승리의 깃발인 양 머리 위에서 흔들어 보이며 희원이 만면가득 함빡 웃음을 머금었다.
"어쭈. 지금 나랑 해보자 이거지."
"오빠가 먼저 시작했잖아요. 괜스레 남의 걸레는 빼앗고..."
"그게 왜 네 걸레냐. 우리 집 걸레지."
"아유, 아유, 치사하긴 정말. 그 깟 걸레 하나 가지고. 니 꺼 내 꺼 따지긴."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남의 걸레니 뭐니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은 네가 먼저야."
"아유, 째째하게 따지기까지... 알았어요, 알았어. 오빠 걸레 맞아요, 맞아."
"우씨, 근데 듣고 보니 열 받네. 너 방금 나더러 치사하고 째째하다고 했냐?"
"아니... 뭐... 사실 오빠가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나가자구요."
"뭐야! 너 오늘 상당히 까부는데 이 오빠한테 혼 좀 나볼래?!"
"왜요, 진짜 꿀밤이라도 때리시게? 자요. 때려봐요, 때려봐요."
희원이 선우를 향해 아예 머리를 들이대며 놀리자 선우가 주먹을 쥐어 들고 어른다.
"너 자꾸 까불면 진짜 때린다."
"아 글쎄 때려 보라니까요."
"진짜다, 너. 내 꿀밤 맛이 얼마나 매운지 네가 몰라서 덤비나 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기회 줄 때 정중히 사과하고 걸레 내놔라."
"에헤... 하나도 겁 안나는데요."
"우이씨, 정말 때린다."
"겁 안 난다니까요. 자요, 때려봐요.'
'딱콩!'
"아얏! 아야야..."
"내가 안 때릴 줄 알았지?"
"우애앵. 그렇다고 정말 때리다니. 이제 보니 선우 오빠 정말 치사하네. 잇힝... 아파라......"
"아...아팠냐?"
진짜로 아픈 듯 희원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마를 문질러대자 찔금해진 선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 주먹에 맞는데 그럼 안 아파요?"
"주먹은 무슨... 누가 들으면 정말 나쁜 놈인 줄 알겠네. 그냥 살짜쿵 꿀밤 한 대 준 거 가지고."
"어쨋든 때린 건 때린 거 잖아요. 아이고, 아파라. 혹 나겠네."
"미...미안. 어디 보자, 얼마나 부었나. 여... 여기?"
희원의 엄살에 금세 기가 죽어선 쩔쩔 매는 선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도저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 소리를 죽여가며 키득 거렸다. 그러자 이내 아프다는 것이 모두 엄살이었음 눈치 챈 선우가 잠시 골이 난 표정으로 희원을 쏘아보더니만 난데없이 펄쩍 달려들어선 방심하고 있던 그녀로부터 다시 걸레를 빼앗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희원이 반사적으로 손을 움켜쥐는 바람에 걸레 하나를 마주 붙잡은 두 사람의 손이 잠시 공중에서 펄럭거린다 싶더니 이내 힘에 부친 희원이 선우쪽으로 고꾸라지면서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으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앗!'
희원이 얼른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녀의 밑에 깔리다 시피 한 선우가 몸을 일으키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두 사람의 얼굴과 얼굴 사이가 십 센티도 안 되는 순간 숨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 시선과 시선이 얽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을 잃은 채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시시각각 얼굴이 달아오름과 호흡이 가빠져 옴을 느끼며 그렇게.
두근 두근 두근.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이 점점 가파르게 고동치는 것을 고스란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느낌을 더 이상 참기 어려웠던 희원이 정신을 추스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선우의 팔이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그것을 제지했다.
"잠깐만... 잠깐만 더 이렇게 있자, 희원아."
"누...누구라도 나오면 어쩌려구. 놔, 놔줘요, 선우 오빠."
"십 초만. 십 초만......"
너무도 절박하고 침통한 목소리였다. 희원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그녀는 살며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댔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과 폐부를 찢는 날카로운 통증을 동시에 경험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져 나갈 듯 한데 만약 정말로 내가 당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온 다면 나는 남은 생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애틋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 역시도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내 가슴 위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뺨이 느껴진다. 그녀의 체온도. 그리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머리칼.....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데 내가 널 보내고 과연 온전하게 숨을 쉬면서 남은 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거실 유리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평화스럽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엔 그 무엇으로도 걷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늘이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뭐야, 두 사람 사귀어?"
계단을 내려서는 나영의 목소리에 희원과 선우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 걸레가......"
"아, 그래. 걸레 때문에..."
"걸레가 두 사람을 한데 묶어서 떠다 박지르기라도 했어? 어머, 그거 재밌네?"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나영의 뒤를 이어 왠지 초조한 기색을 하고 있는 준희가 뒤따르고 있었지만 희원과 선우는 그런 준희의 기색을 눈치 챌 여유가 없었다.
"아, 대강 얼룩은 다 지워진 것 같네."
나영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피해 희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카페트를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그, 그러네. 그 정도 닦아냈으면 될 것 같네." 선우의 어색한 맞장구.
"그럼, 난 걸레 좀 빨아두고 올게요."
좋은 핑계 거리도 있겠다 희원은 허둥허둥 세탁실로 향하고 나영을 향해 슬쩍 웃음을 건네는 선우. 역시 어색한 웃음.
나영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선우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쏘아 보고 서있다. 그리고 그런 나영의 시선을 의식한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왜?"
"아니, 그냥."
대꾸와 동시에 나영은 선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파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사실 나영의 맘속에는 선우에게 쏟아 붓고 싶은 말들이 그득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미련하게 떠나보낼 생각을 하는 오빠란 남자에게 말이다. 그러나 나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선우의 입장이었어도 결국 그녀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알게 된 이상, 오빠 멋대로 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
나영과 맞은 편 소파에 마주 앉으면서 괜스레 헛기침을 해대는 선우를 다시 말없이 건너다보며 나영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