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어쩜 이렇게 요리솜씨가 좋아요, 희원씨. 정말 감동이에요."
희원이 그 어느 때보다 정성 들여 준비한 상차림 앞에서 나영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맛깔스러움으로 치자면 귀국한 후 줄곧 집에서 먹었던 음식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와 선우를 친자식처럼 길러준 새어머니는 누구보다 인자하고 자상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살림이나 요리솜씨가 뛰어난 분은 결코 아니었기에 나영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그토록 정갈하면서도 깊은 음식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탄복하고 있었다.
"거기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특히 이 김치만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이 간장 게장 진짜 희원씨가 담갔어요? 와아, 정말 빈 말 아니구요 내가 먹어본 것 중 맛이 최고예요. 아무래도 시집가기 전에 요리수업은 희원씨한테 받아야 할까봐.
"과찬... 이세요."
나영의 이어지는 칭찬에 희원이 몸 둘 바를 몰라하고 있을 때 정말 별스럽게도 식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입맛을 잃기라도 한 사람 마냥 빈 젓가락만 빨고 있던 성진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아마도 나영의 입에서 시집 가기 전에 어쩌구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렇다. 천하를 호령(?)하는 위치까지는 아니어도 우유빛 피부에 윤기가 반지르르한, 보는 이로 하여금 한번쯤은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실크 같은 머리결 그리고 예쁜 그림 동화나 순정 만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왕자님 같은 외모를 완성하는 꽃사슴 눈망울과 빨간 입술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꽃미남 유성진이, 그것도 천성적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그가 데뷔이래 이렇다 할 염문설 하나 만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은나영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가 심심풀이(?) 삼아 잠시 머물렀던 여자들은 몇몇 있었으나 언제나 그의 마음이 고정되어 있던 상대는 다름 아닌 은나영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모로 인하여 또한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그의 장난기로 인하여 그가 바람둥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관 또는 편견과는 달리 얼마나 사랑에 서툴고 상처받기 쉬운 남자라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한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하여 나영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 보지도 못한 채(아니 어쩌면 나름대로는 갖가지 애정표현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냉가슴을 앓으며 그저 나영의 귀국을 기다리던 성진이 선우로부터 나영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속으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솔직히 말해 성진은 차라리 미랑이 폭탄을 터뜨려 버리길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선우는 희원과의 사랑을 지키고 나영의 혼담은 와장창 깨져버리길! 그렇게 되면 나영은 상처를 받게 되겠지만 오로지 그녀를 향해 키워왔던 성진의 사랑이 충분히 그녀를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지는 않을까?
"성진 오빠, 오늘 어째 입맛이 없어 보여요? 안색도 별로구.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건 아니죠?"
좀 전에 거실에서 그의 화려한(?) 등장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혹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감 속에서 희원이 다소 걱정하는 투로 성진에게 물었다.
"아프긴. 아무렇지도 않아 난." 가까스로 억지 웃음을 지어내며 희원의 물음에 대꾸하는 동안 성진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이야, 이 오빠 여기 마음이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렇게 직접 나영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까 자꾸만 자꾸만 더 아프다.'
따지고 보면 그 날 그 시각 그 자리에서 아무 구김살 없이 웃고 떠들 수 있었던 사람은 나영 하나 뿐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 모두 나영을 반가워하며 환한 얼굴들을 하고는 있었지만 글쎄...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는 압박감을 잠시 잠깐 잊고 있는다 해서 그 짐이 절로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와 중에서 눈치 빠르고 영리한 나영은 결국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맡았다.
"상 차리느라...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뭘."
"그렇게 여러 가지 많이 준비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거웠는데요 뭐."
주방에 남아 희원과 함께 나란히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돕고 있던 선우가 넌즈시 희원을 돌아본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영에게 꼭 손수 만든 음식들을 대접해 주고 싶다는 희원의 말에 선우는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심 그런 그녀의 배려가 고맙고 감동스러웠다. 때문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내 고집스럽게도 그와의 대화를 피하고만 있던 희원에게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하기에도 또 듣기에도 괴로운 얘기를 꺼내기가 차마 어려워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나영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적어주었었던 선우는 오늘 상차림을 보고 속으로 아차 싶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적어준 목록에 있던 음식이 하나도 빠짐없이 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써 준 걸 바보같이 다 만들었냐?"
사람이란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다.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많이 들 때 사람들은 간혹 그 마음을 되려 역정을 내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 순간 바로 선우가 그랬다. 미련 맞게도 자기 동생을 위해 그 많은 음식을 혼자 준비한 희원에게 가지고 있던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그동안 선우의 마음을 줄곧 채우고 있던 죄책감과 더해지면서 괜스레 핀잔을 주는 투로 말이 튀어나왔다.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바보거든요, 제가."
정말 바보라도 되기로 작정한 걸까. 별 동요 없는 덤덤한 태도로 그저 히죽이 웃으며 대꾸하는 희원에 모습에 선우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 보다 아픈 것도 잘 못 느끼고요, 슬픈 것도 잘 몰라요. 그런 걸 미련하다고 하나요? 아무튼 그래서인지 포기 같은 것도 잘 할 줄 몰라요. 대신 잘 하는 게 한 가지 있다면 무작정 기다리는 거. 후후후."
"......."
선우는 내내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으로 인해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두 눈썹을 거칠게 꿈틀거렸을 뿐, 신음소릴 내뱉는 대신 가느다란 한숨을 소리 없이 토해냈을 뿐이었다.
꼼지락거리며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차라리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토록 작고 여린 어깨에 비해 그가 그녀에게 얹어준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를 아는 그로써는 당연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큰소리로 날 욕하기라도 하면...... 내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기라도 하면...... 넌 정말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건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이 구는 거야, 응? 희원아.'
희원은 선우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희원이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더라면, 자신 보다 더 상처받고 더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눈빛을 직접 마주 보았더라면 차라리 그의 곁을 떠나주는 것이 그를 위한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갈등, 아직까지 그녀의 마음에서 완전히 잠재우지 못한 채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싸워야 하는 그 갈등에 지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때문에 희원은 애써 그의 얼굴을 외면한 채 설거지를 마친 접시들을 마른행주로 박박 닦으며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스스로 달래기 시작했다.
'지킬 거예요. 오빠 마음이 변한 게 아닌 이상. 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플 이유도, 슬플 이유도 없어. 그러니까 오빠도 아파하지 말아요. 슬퍼하지 말아요.'
커피를 홀짝 거리며 유학생활 중 겪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성진과 준희에게 들려주던 나영은 언제인가부터 물소리가 그친 주방 쪽을 넌즈시 건너다보곤 다시 성진과 준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아가씨 정체가 뭐야?"
"정체라니...? 그저... 우리 일을 도와주는 그런 사이야."
나영의 물음에 준희가 뜨뜻 미지근한 태도로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입이 떨어지기 직전 이상스레 성진과 뭔가 은밀한 시선을 먼저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나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그 것 뿐이야? 그저 여기서 집안 일을 돕는?"
"으, 응."
왠지 예리한 눈빛으로 돌변한 나영의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성진과 준희는 괜스레 뜨끔한 기색을 감추고자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칫 이야기가 잘못 풀려 나가기라도 해서 나영이 현재 선우가 처한 곤경을 알게되기라도 하면 그 땐 선우가 두 사람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나영이가 알아선 안 돼. 그 애가 알게되면 그 앤 분명... 날 위해 결혼을 포기할 거야. 불 보듯 뻔해. 절대로 그렇게 만들어선 안 돼. 내 문제는 차후에... 나영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무사히 결혼하게 된 후에 그 때 방법을 찾겠어.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야. 그러니까 성진형, 그리고 준희 너. 나영이 앞에서 절대로 말실수 같은 거 하지마. 알겠지?'
하지만 거짓말이나 남을 속이는 일에 서툰 두 남자들의 얼굴에 서린 긴장감으로 인해 더욱 호기심에 불타는 나영이 슬슬 유도심문을 시작했다.
"그럼 그냥 가정부 맞구나. 난 또....."
"그냥 가정부가 아냐, 희원씨는!"
"뭐?"
"아아니... 그게 아니고 우린 희원씨를 가정부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한 식구처럼,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거든."
"아아... 그렇구나. 그냥... 다들 희원씨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희원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은 나영의 태도에 적지 않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던 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쪽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뒤 관심을 접은 듯 보이는 나영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성진은 들고 있던 커피 잔에 얼굴을 박다시피 한 채로 나영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나영에게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요즘 새 앨범 준비중이라면서?"
"응. 거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어."
나영이 화제를 바꾸자 준희와 성진의 얼굴엔 화색이 다 돌 지경이었다.
"이 집은 도대체 언제 산 거야?" 나영이 거실을 빙 둘러보며 물었다.
"어, 거의 1년쯤 되가. 꽤 괜찮지? 값도 싸게 산 편이야."
"그런데 말이야." 나영이 고개를 오른 쪽으로 45도쯤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울 오빠랑 저 아가씨가 어째서 그토록 애틋한 시선을 주고받는 거지?"
"푸앗! 쿨럭, 쿨럭. 켁. 켁!"
"앗, 뜨거워!"
나영이 희원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고 믿으며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준희와 성진은 나영의 갑작스런 그 질문에 그만 놀라 펄쩍 뛰고 말았다. 그 바람에 성진은 커피를 들이키다 사레가 들고 말았고 준희는 아예 커피 잔을 놓치는 바람에 바지 한 쪽을 모두 적시고 말았다.
"뭔가 있지? 나한테 숨기고들 있는 게 뭐냐고?"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나영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따지듯 물을 때였다.
"어머, 준희오빠! 어쩌다 그랬어요?"
갑작스레 거실로부터 들려온 부산스러운 소리에 의아해하며 주방을 나서던 희원이 바지자락을 온통 커피로 적시고 있던 준희를 보곤 황급히 달려와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선우 역시 평소 준희 답지 않은 실수에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영문을 묻듯 성진과 나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별 거 아니에요. 손이 그만 미끄러져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계단을 오르는 준희는 내심 한숨을 돌리는 심정이었지만 그것이 위기의 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미 어떤 낌새를 포착한 나영이 그대로 지나가지는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휴우... 이 난국을 어쩌지.'
준희가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동안 희원은 부랴부랴 티슈를 몇 장 뽑아다 소파와 카페트 위에 묻은 커피 자국을 찍어낸 뒤 걸레를 가지러 서둘러 세탁실로 향했고 그저 반사적인 행동으로 선우가 그녀의 뒤를 쪼르르 따라가자 요상스럽다는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영이 입술을 모아 살짝 실룩이더니 다시 성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마치 비수처럼 날카로운 나영의 눈빛이 성진에게 꽂힌 바로 그 순간...
"딸꾹!"
"쇼할 생각하지마, 성진 오빠!"
"쇼 아니... 딸꾹! 아니야. 딸꾹!"
"오빠 정말 치사하게 나올래?!"
"끅! 저...정말... 딸꾹! 아니라니.. 딸꾹!"
"안 되겠군, 정말."
"딸꾹! 끄윽, 딸꾹!"
성진의 딸꾹질이 멈출 기미가 안 보이자 나영은 잔뜩 눈쌀을 찌푸리곤 불현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우와 희원이 들으라는 듯 세탁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심심한데 성진 오빠 방이나 구경해야겠다! 성진 오빠! 오빠 방이 어디야?!"
"딸꾹!(오, 안 돼! 남녀가 유별한데... 내 방에서 둘이 뭘 어쩌자고... 안 돼! 안 돼!)"
"빨랑 앞장 서시지." 나영이 다시 성진 쪽으로 몸을 구부리며 나즈막한 소리로 으름짱을 놓듯 속삭거렸다.
"딸꾹!(으... 결국 내 입으로 모든 사실을 털어놔야 한단 말인가!) 딸꾹!(운명의 신이여,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것이 정녕 이 것이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