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나영아, 여기!"
선우가 막 입국장에 들어선 키가 훤칠하고 늘씬한 한 여성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자 그녀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냉큼 이마 위로 젖히며 하얗고 고른 치아를 활짝 드러냈다.
"오빠!"
렌즈가 크고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당장 그가 오빠임을 알아보았다.
"짜식, 오랜만이다."
"1년이 십 년 같았어. 오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선우와 마주하기가 무섭게 나영은 활달하고 대찬 평소 성격은 단숨에 내버리고 잔뜩 어리광 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와락 그의 품에 안기고 부터 본다. 그리고 다시 서로를 마주 보는 남매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밝고 환하다.
그 때 선우의 옆에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랑은 나영의 외모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에 묘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175센티쯤은 되지 않을까 싶게 큰 신장이었지만 신장이 168센티였던 미랑과 비교해 조금도 커 보이지 않는 주먹만한 얼굴은 선우처럼 선명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어 거의 화장기가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한 번쯤은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만큼 예뻤다. 차림새라곤 그저 물 빠진 청바지에 흰 색 면 티를 받쳐 입은 체크 남방과 밋밋한 감청색 코트가 전부였지만 그 모습 그 대로도 마치 패션 화보집에서 쏙 빠져 나온 듯 멋지고 스타일리쉬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랑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든 것은 웬지 품격이 느껴지고 지적인 나영의 분위기였다.
어떤 상대에게든 꿀릴 줄 모르는 당당함의 소유자였던 미랑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왠지 떨떠름한 기분을 맛보며 립스틱을 모두 닦아낸 자신의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립스틱만큼은 못 지우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건데!'
사실 미랑이 나영의 입국 시간에 맞춰 공항에 나온 것은 순전히 자기 혼자만의 계획이었다. 선우가 절대로 그런 자리에 자신을 불러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미랑이 예고 없이 공항에 나타났던 것이다.
미랑의 갑작스런 출현에 그러나 선우는 그닥 많이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한쪽 눈썹을 잠시 씰룩거렸을 뿐 미랑으로썬 천만 뜻 밖에도 뭐하러 여긴 나타났느냐 따위의 그 찬바람이 쌩쌩 도는 핀잔 한 마디조차 내뱉지 않았다. 다만......
"당장 화장실 가서 그 쥐 잡아 먹은 것 같은 입술부터 싹싹 지우고 나와라."
"다른 색 립스틱은 안 가지고 나왔는데... 아무 것도 안 칠하면 병자처럼 너무 창백해 보인단 말예요."
다짜고짜 립스틱을 지우라는 선우의 말에 미랑이 볼멘 소리로 한 대꾸였다. 그러자 그녀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는 듯 그의 고개가 잠시 까딱하더니 높낮이 없이 담담한 듯 하지만 실은 반협박조나 다름없는 그의 차분한 어조가 다시 이어졌다.
"이미랑. 너 내가 하는 말이 장난으로 들리냐? 이렇게 사치스럽고 눈에 띄는 옷 입지 말라고 그랬지? 그리고 너 그 손톱에 매니큐어 지우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시, 시간이 없어서 못 지웠다구요. 그, 그리고 옷은 아직 이런 것밖에 없어서 새로 사려면 그것도 시간이 필요하구... 또 아깝잖아요. 있는 옷 안 입고 쌓아두면 그것도 낭비 아니에요?"
미랑은 언성을 높이며 길길이 뛰는 것보다 마치 이를 악물고 얘기하는 것처럼 나즈막히 읊조리듯 말하는 선우의 태도가 더 무서웠다. 왜 자신이 그의 그런 태도에 꼼짝을 못하는 지 돌아서서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곤 했지만 막상 코앞에서 그런 그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되면 왠지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것이 무심결에 고분고분해 지고 마는 것이었다.
물론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렇다고 미랑이 제 성질을 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잠시... 잠시 묻어두고 있는 것이다.
'은선우, 무사히 우리 결혼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내가 참는다. 그 다음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손아귀에 쥐고 흔들테니까 기다려라! 후아... 이미랑. 정말 성질 많이 죽인다 너.'
"안 입고 쌓아두면 당연히 낭비 맞지. 그러니까 집에 쌓아두지 말고 자선 바자회 같은데다 기부해라. 선행도 하고 좋잖아. 나랑 결혼해 살려면 수수하고 검소한 생활 습관부터 빨리 몸에 익혀. 자, 당장 가서 그 립스틱이나 어서 지우고 와."
왠지 비아냥이 담긴 듯 느껴지는 선우의 말투에 미랑은 뭔가 반박할 말을 찾다 포기하고는 하는 수 없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자선바자회? 기부? 참, 나 웃겨서. 내가 미쳤어? 그 옷들이 모두 얼마 짜린데. 은선우. 니가 날 이런 식으로 엿 먹여보시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모양인데 흥! 폭탄은 아직도 내 손 안에 있어. 계속 건들면 결혼이고 뭐고 확! 내가 쫌 만 더 참아준다, 은선우. 네 잘생긴 얼굴에 고맙다고 해라. 네 얼굴이 쫌 만 덜 생겼어도 나 천하의 이미랑 절대로 안 참았다. 절대로 안 참았다구!'
화장실 거울 앞에서 미랑은 그렇게 속으로 혼자 분통을 터뜨리며 쥐고 있던 티슈로 자신의 입술을 벅벅 문질러댔다. 하지만 지금 모델보다 근사한 외모의 나영의 등장에 미랑은 립스틱 하나 발리지 않은 자신의 맨 입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다.
"어머, 그런데 옆에 계신 여자분은... 누구......?"
얼싸안다시피 한 채 오빠와 2년만의 해후를 정신없이 만끽하던 나영의 눈에 그제서야 미랑의 존재가 들어왔나 보다. 선우는 그러나 선뜻 미랑의 존재를 나영 앞에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기회는 이때다 싶은 미랑이 얼른 나서서 나영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나영씨? 난 이미랑이라고 해요. 곧 오빠와 결혼할 사이랍니다."
"예?" 순간 선우처럼 숱이 짙고 가지런한 나영의 양 눈썹이 활처럼 높이 휘어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선우오빠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모양이네요."
의기양양한 표정의 미랑이 좀 전과는 다르게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선우의 눈치를 살피던 나영이 예의를 갖추며 다시 미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셨군요. 만나 뵙게 되서 정말 반가워요."
직감적으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은 나영이었지만 어쨋거나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평소 습관대로 막 악수를 청하려던 찰나였다. 선우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다시피 그러쥐곤 방향을 틀며 말했다.
"차는 저 쪽에 있다. 어서 가자."
"어? 아... 그래."
얼떨결에 선우에게 손을 잡혀 공항건물을 나온 나영은 아직은 코끝이 싸아해 지는 한국의 겨울 날씨를 체감하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리웠다. 이 알싸한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가!"
"기후 차 때문에 감기에나 안 걸릴지 모르겠다. 자, 빨리 차로 가자. 아 참, 미랑이 네 차는?" 나영의 손을 잡고 서두르던 선우가 문득 미랑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 일부러 두고 왔어요. 돌아갈 때 오빠 차 타고 같이 돌아가려구요." 미랑이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나와줘서 고마운데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라. 오늘은 가족끼리만 있고 싶거든. 아까 저 쪽 보니까 택시 많던데 택시 타고 들어가라."
"오빠....."
따로 택시 타고 돌아가 보라는 선우의 쌀쌀 맞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투에 순간 미랑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은 나영이 난처한 얼굴로 선우의 소매를 슬쩍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선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나영의 가방을 뒷자석에 실은 뒤 다시 조수석 쪽 문을 열어 나영을 앉히곤 차 앞쪽으로 돌아 자신도 운전석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 있는 미랑에겐 결국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선우는 차를 출발시켜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점점 멀어져 가는 미랑을 난감한 표정으로 흘깃거리던 나영은 이내 핸드백을 바닥에 패대기치더니 미친 듯 발을 동동 구르다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 뜯다하는 미랑의 모습을 목격하곤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여자... 정말 오빠랑 결혼할 여자야?"
"어? 아아... 어."
"오빠가 사랑한다고 했던 여자가... 저... 여자야?"
라고 물어오는 나영의 묘한 시선에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잔뜩 굳어있는 표정을 얼른 풀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영을 향해 되묻는다.
"넌 전에 말한 그 친구... 그렇게 많이 사랑하냐? 오빠보다도 더?"
"치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뭐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얼버무리네."
곱게 눈을 흘기는 나영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흩트려 놓는 선우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모습에 나영은 잠시 잠깐 자신의 마음을 흐렸던 이상한 기분을 접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선우와 지난 회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마도 오랜만에 만난 오빠와 나누고 싶었던 얘기들이 너무도 많아 그녀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던 석연치 않던 느낌을 그렇게 쉽사리 놓치고 말았으리라.
"안녕하세요, 은나영이에요.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전 채희원이라고 해요. 아아, 그리고 초대라뇨... 전 이 집 주인도 아닌 걸요."
나영은 대문 밖까지 마중을 나와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잠시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가정부? 아니, 가정부는 아니라고 했던가? 호오.....'
집에서 짐을 푼 다음 다음 날 안 그래도 오빠가 다른 멤버들과 따로 집을 얻어 지내고 있다는 곳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나영이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선우가 전화로 초대를 해왔다. 아니 사실 선우의 표현에 의하자면 레드비트 멤버들과 함께 지내고 있던 누군가가 자신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영이 그 누군가가 누구냐고 묻자 선우는 그냥 어떤 여자애... 라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어떤 여자애... 라니? 무슨... 가정부라도 둔 거야?"
-"아냐, 그 앤 그런 애가 아냐. 그러니까 그 앤......"
비록 전화기를 통해서였지만 나영은 선우답지 않게 수상스레 자꾸만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어투에서 기묘한 흔들림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럼 도대체 누구지?'
나영의 시선을 의식한 희원이 고개를 들다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나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발그레진 얼굴로 다시 동그란 눈을 얼른 내리깔았다. 그런 희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영의 입가에 호감 어린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유, 귀엽네, 요 아가씨.'
"자, 들어가지. 성진형이랑 준희도 너 보고 싶다고 목 빠지게들 기다리고 있다."
선우의 채근에 나영은 희원이란 정체불명(?)의 아가씨에 대한 호기심을 잠시 덮어두기로 하고 집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든 머지 않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므로.
"나영누나! 드디어 돌아왔구나!"
세 사람이 현관을 들어섰을 때 차 소리를 듣고 자신의 방에서 내려오던 준희가 희색을 하며 나영을 반겼다.
"이야, 준희야! 넌 여전하구나! 아니다. 쪼금 더 남자다워졌나?"
나영이 웃음 띤 얼굴로 준희를 향해 말했다.
"뭐야. 나 어린애 취급하는 건 여전하구나, 누나."
"짜식. 이마에 그 여드름 자국 다 가시면 남자 대접해주마. 알았지?"
세 멤버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준희였지만 그를 늘 어린 동생처럼 여기던 나영이 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자 준희는 코끝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 누나 못된 손버릇도 여전하네."
"큭큭. 그럼 내가 미국 물 몇 년 먹었다고 달라졌을까봐? 아, 그런데 성진오빠는 뭐하길래 아직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야. 내가 왔는데."
준희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도 모자라 장난스럽게 준희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으며 거실로 들어가는 나영의 모습과 또 그녀의 격이 없는 말투에 희원은 듣던 대로 나영의 성격이 활달하고 털털하다는 것을 실감하며 빙그레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오빠보다 활달한 사람 같아 보이는 걸. 하지만 외모는 선우오빠가 전에 보여줬던 사진들보다 훨씬 더 여성스럽고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정말 이목구비가 선우 오빠랑 참 많이 닮기도 닮았구나.'
문득 희원의 시선이 흐뭇한 눈빛으로 나영의 뒷모습을 쫓고 있는 선우의 옆 얼굴에 가 닿았다. 머리칼처럼 새까만 색깔의 숱 짙은 눈썹, 길고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가지런하고 촘촘하게 뻗어있는 속눈썹 아래서 빛나는 다크 브라운의 눈동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각을 이룬 콧날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아니 조금 가까이만 다가와도 숨이 막히게 만드는 육감적인 입술과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 그렇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슬쩍 건너다보고 있던 그녀의 가슴 한 귀퉁이가 쿡쿡 쑤셔오기 시작했다.
'아, 안돼.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흐린 낯빛을 내비쳐선 안돼.'
아직은 선우가 미랑과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기에, 그렇기에 실낱같은 한 오라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결코 선우가 그녀를 내치기 전엔 절대로 먼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희원이었다. 어쩌면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끝까지 선우를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언제 그녀 앞에 들이닥칠지 모를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한 희원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아파도 아픈 내색 하나 슬퍼도 슬픈 내색 하나 마음 놓고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결심을, 다짐을 지키자면 강해져야만 했다. 단단해져야만 했다.
"아, 나영이... 왔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뜸을 들이다 비로소 나영을 반기러 자신의 방을 막 나온 성진의 음성에 순간 거실에 서 있던 네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닭살의 무차별적 엄습으로 몸서리를 치며 목소리의 주인공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쥐어짜 보일 수만 있다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쉽사리 재현해 낼 수도 있을 만큼 느끼하게 목소리를 깔던 성진의 차림새가 또 히트였다. 그는 은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광택 나는 검은 색 양복을 타이트하게 입고 있었는데 안에 받쳐 입고 있던 검은 색 드레스셔츠와 대비되는 가느다란 형광 핑크색 실크타이가 아주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에 더해 반지르르하게 넘긴 올백 헤어스타일에 비스듬히 얹어놓은 검정색 실크햇까지. 한 마디로 죽.여.줬.다.
성진은 분명 연출된 것임이 확실한 포즈로 한 쪽 팔꿈치를 어깨 높이로 들어 벽을 괸 채 비스듬히 서서 다른 손으로 실크햇 가장자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예의 그 빠다 보이스(butter voice)로 네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만행을 다시 저질렀다.
"우리. 오랜만이지."
"성진 오빠."
나영이 성진을 부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희원은 성진의 이름을 부르는 나영이 겨드랑이 언저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성진 오빠 요즘 돈 궁해?"
"응?" 나영의 느닷없는 질문에 성진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어디 나가요 뛰러 다니냐고?"
"뭐?"
"풋!"
"푸흡!"
"크그극!"
순간 나영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한 성진이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들은 그녀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나영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성진이 머리에 얹혀있던 실크햇을 홱 벗겨 내리더니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우씨, 은나영! 너......"
"호호호, 성진 오빤 여전히 재미있구나. 나 웃겨 줄려고 이런 분장을 다하고. 고마워, 성진 오빠. 쪽!"
나영의 놀림에 붉어진 성진의 뺨이 제 색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그는 친근함의 표시로 자신의 목에 나긋나긋한 팔을 감고 갑작스레 그의 볼에 부딪혀온 나영의 입술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고 말았다. 수줍음과 호흡곤란이 그의 얼굴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 아씨, 분장 아닌데... 그나저나 기집애, 못 본 사이에 더 많이 이뻐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