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 (57/75)

  

# 57. 

 자신의 방에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희원의 팔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그 날 아침 이후로 선우는 매일처럼 무력한 자신에게 끊임없는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한편 불안하리만치 동요 하나 없는 얼굴로 생활하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근심 어린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겉으론 다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진과 준희 역시 그런 희원의 모습을 내심 몹시도 불안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란 사실 또한 선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희원 앞에 나서서 선우와 미랑의 엿같은 거래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선우 본인만이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대화를 해야만 한다는 변함없는 생각으로 그녀의 곁을 맴돌 뿐이었다.

 물론 희원은 시종일관 무슨 작정이라도 한 듯 선우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다. 수료전시회를 끝으로 더 이상 학원에도 나갈 필요가 없었던 희원은 그녀가 처음 레드비트 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집안 일을 돌보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지만 교묘하게도 선우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희원은 선우와 단 둘이서 마주치게 되는 상황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어처구니없는 미랑의 계략에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리라 짐작하며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는 한편 심성 여린 그녀가 그토록 흔들림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들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사의 호출로 불려 나간 멤버들은 선우의 일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있는 담당 매니저의 추궁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난 번 나간 선우, 너랑 이미랑인지 하는 초짜 탈렌트와의 결혼이 어쩌구 하는 기사 난 그저 하이에나 같은 기자녀석들이 보수 좀 두둑히 받아 챙기고 그 초짜 기집애 한 번 띄워줄 요량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짜고 치는 고스톱이든 뭐든 결혼이 거론되는 기사라면 만만치 않은 스캔들이 되겠지만 선우 너야 워낙 스캔들 메이커라 결국 지들끼리 생쑈를 하다 잠잠해 지려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오늘 오전에 이미랑 쪽 매니저가 전화했더라. 오늘 오후 5시에 피닉스호텔 프레스센터에서 결혼 발표 기자회견이 있을 거라고. 하, 나 원 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 좀 해보시지. 내가 네 결혼 소식을 이런 식으로 뒤통수 맞듯 알아야 겠어? 결혼은 네 사생활이긴 하지만 넌 연예인이고 난 네 담당매니저야. 사전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정도는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로드매니저 녀석한테 물어보니 네가 걔랑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그저 지나는 소문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결혼 발표 기자회견? 아니, 자기 혼자서 말입니까?!" 기가 막히다는 표정의 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럼, 정말 선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 말이야? 그게 말이 돼?!" 담당매니저인 남부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세 사람을 향해 되물었다.

  "그 여자 혼자 정말 생쑈를 하는 거라구요. 그 여자가 선우형을 협박해서..." 미랑의 교활한 처사에 몸서리가 처진다는 듯 오만 인상을 찌푸린 채 준희가 선우를 대변하려고 나섰다.

  "죄송해요, 매니저 형.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군요." 

 조상(彫像)처럼 미동도 않은 채 표정 없는 얼굴로 남부장의 추궁을 듣고 있던 선우가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머리를 조아리자 그런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매니저가 성진과 준희를 번갈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박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선우가 피닉스호텔에 도착해 막 로비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미 기자회견을 마치고 로비로 내려오던 미랑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경멸과 혐오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선우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어머나, 선우 오빠! 이렇게 와줄 거면 좀 진작에 나타나지."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따윈 아랑곳도 않는지 미랑은 선우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반색을 했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뿌리치며 선우가 성난 어조로 말했다.

  "너 자꾸 허락 없이 함부로 앞서 갈래?"  

  "좀 앞서 가면 어때? 시기야 언제가 됐든 기정사실화 되는 건 마찬가진데."

  "이 결혼. 너 혼자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하지만 선우가 말을 채 끝 맺기도 전에 뒤이어 로비로 나온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두 사람을 향해 바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선우씨, 바쁘셔서 오늘 기자회견에 참석 못하신다고 들었는데 오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은선우씨! 오신 김에 소감 몇 말씀 좀..."

  "은선우씨, 이미랑양과 이쪽을 좀 봐 주시겠습니까?"

  "은선우씨! 이미랑양! 여기 이쪽..."

 작열하는 카메라 플래시 불빛을 손으로 가리며 인상을 찡그리던 선우가 나즈막히 욕설을 내뱉은 뒤 미랑의 손목을 거칠게 거머쥐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하자."

 호텔 출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선우의 걸음을 맞추기 위해 종종 걸음을 치면서도 미랑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사진 기자들을 향해 여유있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호텔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분위기가 영 수상쩍지 않아?"

  "그러게나 말이야. 이미랑일 대하는 은선우 태도... 뭔가 영....."

  "은선우 표정이 꼭 화난 것 같아 보이지?"

  "맞아. 오늘 결혼발표 기자회견에 이미랑 혼자만 나온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호텔 앞에서 자신의 매니저를 먼저 돌려 보낸 뒤 선우와 함께 그의 차에 올라탄 미랑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데요?"

  "너희 집."

  "네?"

  "왜 그렇게 놀라지? 기둥서방이라도 숨겨 놓고 있었나?"

  "뭐예요?!" 

 선우의 비아냥거림에 소리를 빽 질러대긴 했지만 속으론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는 미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 희원이 다녀간 날과 마찬가지로 집안이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잉, 이럴 줄 알았으면 격일제 말고 매일 오는 파출부 아줌마를 부르는 건데.' 

  "우리 집말고... 어디 다른 데로 가요 우리."

  "돈 들어."

  "뭐라고요? 아, 알았어요. 내가 낼 게요. 내가 내면 되잖아요!"

  "곧 결혼할 사인데 네 돈 내 돈이 어딨어? 같이 아껴야지. 안 그래?"

 살풋이 눈웃음까지 지으며 느물거리는 선우의 태도에 갑자기 미랑은 말이 탁 막히고 만다.

  '뭐지? 갑자기 이런 태도...?'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우를 자신의 아파트에 들인 미랑은 현관에서 허겁지겁 신발을 벗자마자 거실로 뛰어들어가 아무렇게 내던져 놓은 옷가지들부터 주섬주섬 집어다 침실 안에 던져 넣었다. 그 동안 소파로 다가와 있던 선우는 소파 주변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파 위는 물론이고 거실 탁자 주변 여기 저기에 과자 부스러기들과 더불어 견과류 껍질처럼 보이는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오늘은 청소하는 아줌마가 안 오는 날이라서 그래요. 그러게 내가 다른 데로 가자고 했잖아요!"

 미랑이 자격지심에 되려 신경질을 부리며 선우를 향해 쏘아붙였을 때 그가 내뱉은 대꾸에 미랑은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정말 지저분하군. 손님이 와도 어디 앉을 자리나 있겠니?"

 일전에 희원이 미랑의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 소파를 내려다보며 한 얘기와 똑같은 소릴 하며 그녀와 흡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를 보며 어쩐 이유에서인지 미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그 날의 희원을 생각하면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오싹함이 생생해지곤 하는 미랑이었다.

  '내가 선우 오빠의 마음도 그리고 몸까지도 다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

  '으으... 독한 계집애! 정말이지 그런 구석을 잘도 숨기고 있었어.'

 괜스레 혼자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 미랑은 다시 입을 연 선우로 인해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 한 잔도 안 줄거니?"

  '뭐, 뭐야? 정말 둘이 짜기라도 한 거야 뭐야?!'

 희원이 앉았던 똑같은 자리에 자릴 잡고 앉아 희원과 똑같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차 한 잔도 안 줄 거냐고 묻는 선우의 모습에 미랑은 정말이지 온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우, 우리 집엔... 갑자기 왜... 오자고 했어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미랑이었지만 정말이지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때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찾은 선우에게 그야말로 차 한 잔 대접할 생각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당황하고 있던 미랑은 더듬 대는 말투로 가까스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조용하게 얘기하기엔 집이 제일 나을 것 같애서."

  "무슨 얘긴데요." 

 대꾸하는 미랑의 눈쌀이 이유 없이 찌푸려진다. 왠지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미랑이다.

  "굳이 서두를 생각은 나도 없었지만 네가 멋대로 결혼발표 기자회견까지 해버렸으니 하는 수 없지."

  "뭘... 말예요?" 

 분명 그럴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쁠 만치 여유 있어 보이는 선우의 표정에 미랑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종이하고 펜 좀 가져와라."

  "그건 뭐 하게요?"

  "결혼하기 전에 먼저 너한테 각서 한 장 받아두려고."

  "각...서?"

  "그래."

  "무슨... 각서요?"

  "너 내 뒷조사하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파악했으리라 믿어. 대한 그룹 최회장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할아버지 역시 눈에 흙이 들어가도 연예인 며느리 인정 못하실 분이야. 손자며느리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그러니 나와 결혼하는 그 날 부로 네가 연예계에선 완전히 발 빼겠다는 각서부터 받아야 겠다."

  "뭐라고요? 결혼과 동시에 나더러 은퇴하라 이 말예요?"

  "왜? 그건 싫은 가?"

  "말도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요!"

 선우의 은퇴 요구에 대경실색한 미랑이 새된 목소리를 높이며 펄쩍 뛰었다. 윤PD가 연출을 맡은 초특급 대하드라마의 첫 촬영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대하드라마 출연을 계기로 한 두 개 드라마에서 주연만 더 따내면 정상급 여자 탤런트로의 도약은 시간 문제였다. 대부분의 신인들이 그런 수순으로 정상급에 오르곤 했다. 물론 연기력이 딸리거나 로비(?)가 약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도태되는 배우들도 허다했지만 미랑은 결코 그런 식으로 무능력하게 도태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헌데 그토록 중요한 시기를 목전에 두고 은퇴라니!

  "네 억지는 말이 되고 내 요구는 말이 안 된다는 건가?" 

 선우가 느긋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비스듬히 다리를 꼬더니 약간 갸우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미랑을 향해 코웃음치듯 물었다.

  "난, 그래요, 난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구요. 지금 우리 부모님들 생활비까지 내가 벌어야 하는 입장이란 말예요!"

 자기 부모의 생활비까지 벌고 있는 입장이란 소린 사실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미랑 스스로도 내심은 자신이 하는 소리가 궁색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연예계 생활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화려한 연예계 생활이 타고난 그녀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만큼 오기까지도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은퇴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선우의 태도는 단호했다.

  "네 부모님들 생활비 정도야 내가 사위된 도리로써 어떻게 해결해 봐야겠지. 하지만 뭐... 솔직히 많이 드릴 수 있다는 장담은 못하겠군. 나도 결혼과 동시에 은퇴할 생각이거든."

  "오빠가 은퇴를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정상급 여배우가 되어 최정상의 인기가수를 남편으로 거느리며 폼 나는 인생을 살리란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던 미랑의 계획에 스테레오로 찬물 끼얹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헌데 그 뒤를 이어 담담한 어조로 피력하는 선우의 장래 계획(?)에 미랑은 점점 더 기암을 할 지경이었다.

  "그 동안 내가 번 돈은 전부 우리 부모님께 드렸거든. 하지만 내가 은퇴하고 나면 집 근처에 작은 악기점 하나 정도 얻을 돈은 내주실 거야. 나야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려봤고 그만 은퇴해서 악기점이나 하나 조용히 운영하면서 애들한테 기타나 좀 가르치며 그렇게 근근이 살아가고 싶어. 물론 우리 부모님들께선 워낙 검소하신 분들이라 그렇게 큰돈을 내주시진 않을 게 분명하니 처음부터 규모가 큰 악기점은 힘들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수입이 그닥 많지는 않을 테니 너희 부모님께 생활비조로 많은 돈을 드리겠다는 장담은 못하겠다. 참, 개업하고 나면 너도 나와서 좀 도와라. 종업원을 두자면 요즘엔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텐데."

  "지금 나더러 탤런트 생활 그만하고 악기점 종업원 노릇이나 하라 뭐 그런 말이에요?!" 미랑은 하도 기가 차서 말을 맺은 후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연하지. 아내가 남편일 좀 도와주는 게 잘못 된 일인가? 그리고 말야, 오늘 너희 집에 와서 느낀 건데 그깟 배우생활 나부랭이 빨리 집어치우고 신부 수업이나 시작해라. 집안 살림부터 배우란 소리야. 집구석을 이렇게 해놓구 살면서 어디 가게 청소나 제대로 할 수 있겠니? 참, 너 요리는 할 줄 아냐? 어머니는 안 그러신데 우리 할아버지랑 우리 아버지는 입맛이 여간 까다로우신 분들이 아니거든. 결혼하면 우리가 어른들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시집살이 조금이라도 덜 하려면 우선 요리부터 배워둬라."

  "모, 모시고 살아요? 누가 누굴요?!" 

  "그야 너랑 내가 우리 할아버지랑 우리 부모님을 이지"

 선우가 너무도 태연자약한 얼굴로 결혼과 동시에 미랑이 아주 당연히 해야 할 일들임을 그렇게 조목 조목 주지시키듯 말하고 있는 동안 서서히 사색이 되어가던 미랑의 얼굴이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급기야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네가 나와의 결혼을 운운할 땐 이 정도쯤은 다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지?! 자, 어서 각서부터 쓰도록 해. 나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하거든."

 다시 싸늘한 표정이 되어 자신을 다그치다 시피하고 있는 선우의 모습을 쏘아보며 미랑은 파들거리고 있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정말이지 그랬다. 선우와의 결혼이라는 목표 외엔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헌데 그것이 고의적인 술수이든 아니든 그와의 결혼으로 뒤따를 현실 적인 부대 상황을 선우가 적나라하게 열거하자 미랑은 갑자기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 이렇게 몰아세워서 포기시킬 생각이었다면 착각이야, 은선우!"

  "후후후. 누가 뭐래?" 선우가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조, 좋아. 쓰겠어. 쓴다구!"

  

 있는 대로 열이 오른 미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펜을 찾으러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거실로부터 들려오는 선우의 진절머리 나도록 경쾌한 목소리에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나올 때 네 도장도 꼬옥 챙겨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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