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 (56/75)

  

# 56.

  "아, 아침... 아침 식사 준비... 다.. 다 되었다구요. 내려와서... 식사들 하세요."

 그러고는 황황히 돌아서서 자리를 뜨는 희원. 세 사람은 한결같이 자리에 붙박인 조상(彫像)들 마냥 꿈쩍도 않고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희원씨가... 다 들어버렸을까?"

 이윽고 준희가 제일 먼저 굳어있던 입을 풀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퉁겨 나가듯 달려나가려던 선우의 팔을 성진이 우악스런 손놀림으로 잡아당겼다.

  "서두르지 말라고 했지. 미리 앞서 가지 말자고. 희원이가 우리 얘기를 얼마만큼 들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선우 네 입으로 결혼 얘기 까진 꺼내지 마라. 그건 좀 더 상황을 지켜본 뒤에 다시 결정해도 늦지 않아."

  "그래, 선우형. 지금 당장 희원씨한테 그런 소리하는 거... 나도 반대야. 나중에...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아니다. 분명 무슨 방도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 서로 껄끄럽긴 하겠지만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구. 그러자, 형."

  "희원이를 기만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어차피 언론에서 계속 떠들어댈 텐데 결국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거야. 차라리... 내 입으로 말해주는 게 나아."

 감춘다고, 덮는다고 당장 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희원이 자신과 미랑의 결혼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터, 괴롭더라도 자신의 입으로 알려주는 것이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는 선우였다.

 결국 성진과 준희 두 사람만이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두 사람에 의해 희원이 다시 선우의 방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오빤 왜... 식사... 안 해요?"

  "희원아. 네게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밥부터 먹고 해요."

  "......"

 여전히 창백해 보이는 안색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선우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분명 그녀의 어조엔 지금 당장은 무슨 얘기도 듣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가 실려있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희원아..."

  "나 배고파요. 먼저 내려갈게요."

 다시 돌아서 방을 나가려 하는 희원의 팔을 선우가 잡아 끌었다. 하지만 그 때 선우는 깨달았다. 마치 잔잔한 수면처럼 지나치리만치 고요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실은 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그렇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렸구나, 너는.'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이 그가 겪고 있던 고통에 더해져 선우는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아뜩함을 겨우 추스리며 희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파요, 오빠. 손 좀... 놔줘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듯 했던, 굵다란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스러울 만치 메말라 보이는 그녀의 눈매가 그러나 더더욱 선우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차라리... 차라리 울어버려, 바보야! 실컷 날 원망하면서, 이렇게 무능한 날 원망하면서 소리라도 지르란 말이야!'

  '아파요, 오빠. 너무 아파요. 그래서 눈물도 나오지 않아. 아니, 절대로 울지 않을 거야. 바보처럼 울면서 오빠를 보내진 않을 거야. 나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돼있단 말예요. 오빠를 그냥 놓아버릴 수 있는 준비... 나 아직 안 돼있단 말예요.'

 결국 선우는 희원을 잡았던 손을 풀고 그녀가 돌아서서 자신의 방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입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자신의 음성으로 재차 못을 박을 자신이 그에겐 없었던 것이다.  

    

  '나쁜 계집애! 나쁜 계집애! 나쁜 계집애!!! 결국 이 거 였니? 너의 그 자신만만했던 모습이? 겨우 선우 오빠의 아픈 곳을 찍어 네 이기심을 채우려는 수작을 몰래 뒤에서 벌이고 있던 거야?!'

 연예인이 된 후로 어쩌면 거주지를 옮겼을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무작정 미랑이 전에 살던 아파트를 찾아가는 동안 희원은 미랑을 향해 얼마나 많은 저주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는지 모른다. 비록 마음속으로 혼자 되뇌인 말들이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향해 그토록 많은 저주의 말을 내뱉어 본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인 그녀였다. 하지만 미랑의 아파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던 그녀는 그런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미랑에게 할 말을 정해두고 찾아온 것도, 그렇다고 미랑을 구슬려보자고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충동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손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녀 자신의 아픔보다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어 괴로워했을 선우에 대한 연민이 무작정 미랑을 찾아 나서게 했던 것이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누구세요?"

 다행스럽게도 미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현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야, 희원이. 문 열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척 도전적인 목소리였다.

  "왔니?" 

 마치 희원이 오리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현관 문을 열어주며 비스듬히 문가에 기댄 미랑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어서 들어와. 너 우리 집에 정말 오랜만에 오는 거 같다, 그치?"

 미랑의 아파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따위엔 관심조차 가질 여유가 없던 희원이었지만 그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실내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눈에 뜨이는 큼직한 가구들이 바뀌어서 그런 듯 했다.

  "거기 아무데나 대강 자리잡고 앉아." 

 제 딴에는 우아한 동작이라고 생각하는 듯 검지손가락을 길게 빼고 쇼파쪽을 가리키며 미랑이 희원을 향해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미랑이 입고 있던 실내복도 무슨 공주드레스처럼 네크라인이며 소맷부리며 치맛단까지 프릴이 잔뜩 달린 원피스였는데 거기에 더해 고양이 꼬랑지 굵기 만한 하얀 털목도리를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이 희원은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지저분하게 해놓고 사는 건 여전하구나. 손님이 와도 어디 앉을 자리나 있겠니?"

 희원이 쇼파 위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이랑 잡지책들을 내려다 보며 빈정대는 투로 말하자 당장 발끈해진 미랑이 도끼눈을 뜨고 희원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네가 손님이니?!"

  "오랜만에 왔는데 차 한 잔도 안 줄거니?"

  "미안하지만 생수밖에 없어."

  "뭐, 그거라도 좋아."

 희원이 쇼파 위의 옷가지들을 집어 대강 한 쪽으로 던져놓으며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시니컬한 태도로 말하자 미랑은 커다랗게 콧방귀를 뀌며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가 이내 생수 한 컵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네가 무슨 용건으로 갑자기 날 찾아왔지?" 

 희원과 비스듬한 각도로 마주보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미랑이 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이 왠지 뱀 같다는 생각에 희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오름을 느끼며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어조로 대꾸했다.

  "네가 선우오빠한테 한 짓 다 알고 왔어.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지? 내가 미우면 나한테나 해코지를 할 일이지 왜 선우 오빠는 괴롭히는 거야?!"

  "몰라서 물어? 나 선우오빠 사랑해. 그래서 그랬어."

  "사랑? 그 사람의 아픈 델 찔러 무릎 꿇려놓고 옭아매는 게 사랑이니?"

  "그게 내 방식이야. 네가 상관할 바 아냐."

  "그렇게 배가 아팠니? 선우오빠가 날 사랑해주는 게. 내가... 너한테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너 이렇게 나한테 모질게 구는 거야, 이미랑?"

 목구멍으로 그동안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와 그에 비례한 눈물이 화산처럼 터져 오르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희원은 이를 악물다시피 하며 미랑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네 존재 자체가 거슬려. 순한 얼굴을 하고 내 옆에 붙어서 넌 언제나 내게 돌아올 관심과 사랑을 다 차지해 버리곤 했잖아?! 이젠 네가 당할 차례야." 미랑의 입가에 차디찬 조소가 흘렀다.

  "결국... 결국... 나 때문에, 나를 괴롭히려고 그랬다는 거니?"

  "그래. 네 까짓 게 선우 오빠를 차지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가 없으니까."

 턱 끝을 들어올려 보이며 미랑이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불쑥 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뭐? 하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미랑의 얼굴을 있는 힘을 다 해 냅다 갈겼다.

  

  쫘악!

  "뭐, 뭐야, 너 지금?!" 미랑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희원에게 맞은 뺨을 부여잡은 채 언성을 높였다. 

  "차라리 네가 죽도록 선우 오빠를 사랑해서, 그래서 죽어도 오빠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랬다면 어떻게든 널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을 거야. 하지만 넌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넌 오로지 나에 대한 네 비뚤어진 질투심과 그저 선우 오빠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야!"

  "후후후. 그래, 좋아.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런 걸 승자의 아량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선우 오빠와 결혼할 사람은 나니까."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뺨을 문지르며 미랑이 희원을 향해 다시 조소를 날렸다.

  "결혼? 후후. 결혼만 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그 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 착각하지마. 네가 차지하는 건 결국 선우 오빠의 빈 껍질 뿐 일 걸?! 아니 선우 오빠가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뿐 일 거야. 왜냐면 내가 선우 오빠의 마음도 그리고 몸까지도 다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

  "뭐, 뭐, 뭐, 뭐라고?!"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희원의 반격에 미랑은 그만 벌어진 입을 쉽게 다물지 못한 채 자신의 앞에 꼿꼿이 선 자세로 눈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대고 있는 희원의 모습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여지껏 미랑이 보아왔던 심약한 모습의 희원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에 던져버린 여자만이 낼 수 있는 용기. 아니 만용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쩌면 활화산처럼 뜨거운 사랑과 그녀의 모성본능이 함께 더해져 발현되었을 지도 모를 선우에 대한 근심과 안타까움이 늘 여리고 소심했던 그녀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격으로 탈바꿈 시켜 놓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한 몸을 오롯히 던질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선우 오빠한테 함부로 굴지마. 내가 지켜볼 거야. 만약 그랬다간 어떤 식으로든 네게 갚아줄 테니 각오하는 게 좋아."

  "네, 네가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그러지 않아도 희원을 불러내 지난 번 학원 앞에서 자신이 당했던 수모를 어떻게 갚아줄까 궁리하고 있던 차에 제 발로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를 찾아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미랑은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또 다시 희원의 기세에 밀리고 있다는 생각에 속에서 열이 치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랑으로 묶인 자신과 선우의 결속을 내세우며 거래로 이루어진 미랑과 선우의 결혼 따위 얼마든지 명색만 있는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희원의 서슬이 어찌나 시퍼런지 실은 오싹한 전율 속에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을 자제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미랑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어?!" 희원이 시니컬하게 웃는다.

  "야, 채희원!!" 

 계획했던 바와는 다르게 왠지 자신이 되려 당했다는 생각에 새파래진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미랑이 희원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이만 간다. 아 참, 그리고..."

  -주루루룩.

  "캬아악!"

  "손찌검해서 미안하다. 뺨에 열 좀 식혀라."

 마시던 생수 잔을 들어 앉아있던 미랑의 머리 위에 고스란히 들이 붓자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 미랑을 뒤로한 채 희원은 유유히 아파트를 나왔다. 그러나 무슨 정신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언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맨 아래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 곳이 로비가 아닌 주차장이란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희원은 묵묵한 모습으로 승강기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걸어가 주인 모를 한 승용차의 뒤로 숨어 들어간 그녀가 갑자기 털썩 자리에 주저앉더니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허엉... 어허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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