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 (55/75)

   

# 55.

  "어떻게 알았어? 참 나 원... 소문이 정말 무섭긴 하네. 안 그래도 남의 입을 통해 먼저 오빠가 알게 될까봐 우리 두 사람 꽤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사실 모 기업 재벌 2세라는 타이틀 붙이기 전에 자연인으로서의 그 사람 모습 먼저 오빠한테 보여주고 싶었거든. 제기랄, 근데 다 틀어져 버렸네. 미안해, 오빠. 다른 사람 통해 그런 얘기 듣게 해서."

 좀 놀라는 기색이긴 했지만 다소 들떠 있는 듯 한 톤 높은 어조로 재잘대는 나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쾌활하고 활기 차 보였다. 뭐랄까...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목소리 그 것이었다.

 미랑이 없는 사실을 꾸며대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나영의 반응이었지만 막상 직접 확인을 하고 나니 선우는 온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축하해 주어야 마땅할 소식이 이토록 고뇌에 찬 번민으로 찾아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선우였다. 그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의 행복과 동생 나영의 행복을 가지고 저울질하도록 종용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선우는 문득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펼쳐들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지갑 안쪽의 한켠을 차지하고 붙어있는 조그만 스티커 사진에 고정되었다. 그의 엄지손톱 크기 만한 사진 속에는 헤벌쭉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희원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줄곧 심각해져 있던 그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것보다 큰 사이즈의 사진으로 뽑아도 되었을 것을... 

 언젠가 선우가 희원과 함께 우연히 스티커 사진기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그는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다정한 모습으로 스티커 사진을 찍어 각자의 지갑에 붙이고 다니자고 했었다. 그 때 희원은 선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일 작은 사이즈의 사진을 뽑자고 우겼다. 그가 늘 남들의 이목을 끄는 인기스타였기에 그런 사소한 일들 하나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으니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제일 작은 사진으로 하자던 그녀. 분명 그녀 역시도 보통의 커플들처럼 이왕이면 커다랗게 뽑은 사진을 그의 지갑 한 가운데에 붙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늘 자신의 욕심보다 그의 입장을 먼저 살펴주던 그녀였다. 

  '그런 너에게... 내가 어떻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그가 그녀를 놓아주기 싫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영의 행복을 그 대가로 지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 미동도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결심한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호호호홋!"

 당장 숨이라도 넘어갈 듯 자지러지는 미랑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아파트 거실 안을 울렸다. 

 역시 은선우란 남자는 쿨 가이였다. 인정할 것은 빨리 인정하고 어차피 내려할 용단이라면 구차스럽게 질질 끌고 자시고 할 필요 없이 쿨하게 결정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틀의 여유를 주었지만 그는 하루만에 그의 대답을 통고해 왔다.

  -"결혼하자."

 예상하고 있던 당연한 결과였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항복의 뜻이나 다름없는 대답이 나오자 그녀가 느낀 승리감과 환희는 말로 다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처음엔 물론 자신을 능멸한 선우에게 보란 듯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오기에서 시작된 계획이었지만 문득 그와의 결혼이 실제 현실화되려 하자 미랑은 묘한 가슴 떨림과 함께 벅차 오르는 감격이 여진처럼 그녀를 휩쓸고 지나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후후후. 이젠 확실히 도장 찍는 순서만 남은 거로군.'

 미랑은 그 순서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다른 사람 명의의 핸드폰 하나를 얼른 찾아 꺼내들었다.

  "신문사죠? 제보드릴 게 있어서요. 레드비트의 은선우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하나 있거든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살짝 집어 누른 채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대로 그녀는 그럴 듯 하게 꾸며진 각본 하나를 각 신문사에 제보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뭐...뭐야, 이게?!"

 기상과 함께 조간을 집어 들어 펼치던 성진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곧 이어 의혹의 빛으로 얼굴을 흐리던 그는 신문을 구겨 든 채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선우의 방을 찾았다.

 마침 세수를 마치고 2층 욕실에서 나오다가 평소답지 않은 굳은 얼굴로 성진이 선우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준희 역시 선우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탁.

 이틀 새 의아하리만치 까칠해 진 선우 앞에 성진이 조간신문을 던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뭐냐?"

  다소 화가 나있는 듯 보이는 성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펼쳐 든 선우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없다. 

  '도대체 신문에 무슨 기사가 실렸길래 그러지.....?'

 영문을 모르는 준희는 그저 성진과 선우의 얼굴 그리고 선우가 들고 있는 신문을 번갈아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야, 은선우. 지금 그 반응은 무슨 뜻이냐? 설마 설마 하면서 올라왔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왜 신문에 실렸는지 넌 꼭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인데. 뭐라고 말 좀 해봐!" 

 궁금증을 참다못해 선우의 손에서 신문을 뺏어다 눈앞에 펼쳐 든 준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초 읽기에 들어간 은선우와 신인탤런트 이미랑의... 뭐, 결혼?!"

 헤드라인을 읽다 황당함에 잠시 한숨을 내쉬곤 다시 기사의 본문 몇 줄을 더 읽어내려 가던 준희가 이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문을 대강 둘둘 말아 쥐더니 말했다.

  "논할 가치도 없는 기사라고 봐. 정확한 증거도 없이 그저 누군가의 제보만 믿고 작성한 기사 아냐. 도대체 그 제보자란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기나 한 건지... 어휴, 정말 한심들 하다니까. 성진형은 뭐 이런 시덥지 않은 기사 나부랭이에 과민 반응..."

  "사실이야. 그 결혼 기사."

  "뭐어?!"

 사뭇 덤덤한 표정, 덤덤한 어조였지만 준희의 말허리를 자르며 선우 본인 스스로가 신문에 실린 그 황당무계한 기사가 사실이라고 하는 소리에 준희와 성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곧  선우로부터 모든 자초지종을 듣게 된 두 사람은 더더욱 기암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 정말 정신병자가 따로 없군!" 준희가 흥분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결국 넌... 나영이와 희원이 사이에서 나영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고뇌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성진이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도대체 형한테 왜 그런대? 나연희씨와의 관계 가지고 형 협박하는 거 이제쯤이면 제 풀에 지쳐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이 번엔 나영누나까지 들먹여가면서! 그 여자 공갈협박죄 같은 걸로 경찰에 확 신고해 버리면 안 되나? 응? 형.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우리도 그 여자한테 똑같은 방법으로 올가미를 씌우는 거야. 그런 여자라면 분명 밝히고 싶지 않은 치부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안 그래?! 우리도 그걸 찾아서 똑같이 맞서면 되잖아." 생각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나는지 준희가 선우의 방을 가로질러 왔다갔다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 준희야. 그 앤... 내가 그 애한테 굴복하지 않는 이상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걸 터뜨릴 거야. 그 애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길 뿐이야. 이 선에서 막지 않으면... 그 앤 어쩌면 희원이한테까지도 몹쓸 짓을 하려 들지도 몰라."  

 우수에 찬 그의 눈동자에 언뜻 커다란 두려움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성진과 준희는 안타까움에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스토커로 인해 희원이 희생당할 뻔했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와 지지 못한 그에겐 당연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휴우... 희원씨한텐 뭐라고 할거야?" 어깨를 늘어뜨린 준희가 안쓰럽다는 듯 선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

  "나름대로 생각이 많겠지. 하지만... 순이한테 당장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같이 다른 방법을 좀 더 강구해 보도록 하자. 머릴 맞대고 고민하다보면 뭔가 뾰족한 방도가 생길 지도 모르잖아." 

 누구보다 선우와 희원 두 사람을 아끼는 성진이기에 정신병자 같은 미랑의 협박에 두 사람의 미래가 꺾이는 모습을 이대로 손놓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미랑인가 하는 그 기집애한텐 일단 원하는 걸 줬으니 앞으론 무조건 시간을 끌어. 반격할 시간을 버는 거야."

  "미안해, 형. 미안하다, 준희야. 이런 일로... 신경 쓰게 해서." 

  "그게 어디 형 잘못이야? 그 성격 파탄자가 잘못이지. 그 여자 예전에 희원씨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혹 형한테 이러는 거... 희원씨에 대한 질투심 뭐 그런 거 때문일 수도 있겠네?" 준희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유가 뭐든 도대체 제 정신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없어, 걘." 성진이 새삼 치받는 분노로 몸서리를 치듯 대꾸했다.

  "그나저나 희원씨가 아침상 다 차려놓고 기다리겠다. 얼른 내려가자, 형."

 문득 벽시계쪽으로 시선이 향했던 준희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로 두 형들을 채근하며 앞장 서 문가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어 젖힌 순간 준희는 그만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희, 희원씨...!"

 세 남자들 모두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선우의 방문 앞에 서있던 희원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침상을 모두 차려놓은 후 세 사람을 찾으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흰 색 바탕에 오이며 가지, 당근, 레몬, 딸기등 갖가지 야채와 과일 모양이 촘촘히 박혀있는 앞치마를 두른 채 방문 앞에 서있던 희원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휑한 시선을 선우에게만 고정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깨달았다.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녀가 이미 모든 전말을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희원아......"

 선우의 부름에 희원은 마치 다른 세상 속을 헤매고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더듬더듬 말을 내놓았다.

  "아, 아침... 아침 식사 준비... 다.. 다 되었다구요. 내려와서... 식사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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