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4. (54/75)

# 54.

 어지간한 스토커 뺨칠 만큼 줄기차게 그의 핸드폰을 울려대곤 하는 바람에 얼마 전 하는 수 없이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었던 선우는 또 어떻게 알고 희원의 수료전시회에 미랑이 나타났는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혹시나 그녀가 전시장까지 들어가 희원의 심기라도 불편케 하면 어쩌나하는 우려감에 건물 입구에서 그녀를 보는 순간 냉큼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잡고는 근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나한테 용건 있어서 온 거 맞지? 정확히 3분 준다. 그러니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뜸들이지 말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짜로 시간을 재듯 테이블 모서리에 팔을 걸친 채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는 선우였다. 그런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랑의 눈에 잠시 표독스러운 기운이 떠올랐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그녀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번호... 설마 나 때문에 바꾼 건 아니겠죠?" 

  "그딴 거 물어보자고 추운데 여기까지 나온 건 아닐 테고. 45초 지났다. 진짜 용건이나 빨리 말해."

  미랑 쪽으론 아예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이젠 차가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건조하고 사무적인 어투로 선우가 채근하자 미랑은 입안 가득 쓴 침이 괴어오름을 의식하며 싸늘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나한테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따뜻하게 대해주면 안 되요?"

  "그게 용건이라면 좋아. 대답해 주지. 추접스러운 짓인지도 모르고 뒤에서 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그걸 미끼로 이용하려드는 저급한 인간에게 베풀어 줄 따뜻함 같은 거 미안하지만 나 타고나지 못했어. 그리고 솔직히 난 네가 왜 나한테 집착하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 너랑 나랑은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더군다나 내가 혹시라도 네게 내 감정을 오해하게 만든 적도 없는데 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나 오빠 좋아해요. 오빠가 사람들한테 주목받기 이 전의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줄곧 좋아해 왔다구요. 그런데 오빤 희원이 말만 듣고 날 벌레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했잖아요. 나한텐 오빠에게 다가갈 기회 한 번 주지 않았잖아요."

 마치 누군가에게 의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내침을 당하는 역할이라도 연기하고 있는 듯 미랑이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와 마주한 이후로 줄곧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선우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가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지어 보이는 차디찬 조소였을 뿐이었다.

  

 "희원이는 내게 한 번도 너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 적 없어. 내가 널 벌레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했다면 그건 순전히 내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뿐이야. 기획사 사무실에서 널 처음 본 날 네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첫눈에 간파하긴 했었지만 그 이 후로 이어지는 네 행동들... 훗, 정말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

  

 그 날 미랑은 선우를 만나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고 정말이지 앙큼하기 짝이 없는 희원이 기집애로 인해 어긋나버린 그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호전시켜 보리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간적인 호소조차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에 대한 혐오감을 조금도 감추려하지 않는 선우의 태도에 미랑의 인내심은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정말 너무 하는군요. 사실 나 오늘 어떻게든 오빠가 내게 품고 있는 오해 풀어볼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왔던 거예요. 그런데 오빤 날 끝까지 저급한 인간으로 몰아가는군요.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는 여자예요. 오빠가 내 호의를 이런 식으로 무시한다면 좋아요. 내가 당한 만큼 당신에게도 돌려주겠어."

  "훗,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눈물 연기는 아까 거기까지가 끝인 건가? 그래, 다음 번엔 또 무슨 폭탄으로 날 협박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그 가증스러운 호의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좀 귀찮아도 그 쪽을 감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까지는 그래도 네가 한 때 희원이의 친구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만히 참고만 있었지만 오늘 이후론 나도 더 이상 참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점."

 털끝만큼의 감정 하나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선우가 나즈막히 내뱉은 말이었다. 허나 거기엔 듣고 있는 미랑으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만들만큼 오싹한 적의가 실려있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는 미랑이었다. 

  "커피 값은 각자 내기로 하지."

 선을 긋듯 그의 인생에서 그녀의 존재를 잘라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인 양 그가 계산서를 집어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비록 낯빛은 창백했지만 잔뜩 독기가 오른 눈빛의 미랑이 모멸감에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용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은선우."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해 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결론 지은 선우의 걸음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미랑의 말을 묵살하며 등을 보이고 걸어가던 선우는 그러나 미랑이 마지막으로 던진 한 마디에 그만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은나영."

  "......!"

  "당신 동생 은나영씨. 이 달 중에 귀국한다면서?"

 은나영이란 이름에 불현 듯 걸음을 멈춘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미랑을 돌아보는 순간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은나영이란 이름 하나에 보인 그의 반응이 그녀의 기대치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마치 칼자루는 내 손안에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미랑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길한 전율을 느꼈다.

  "다음 번엔 무슨 폭탄으로 당신을 협박할 거냐고 했었나? 후후후. 안타깝게도 내겐 새로운 폭탄 같은 건 없어. 내가 가진 폭탄은 당신이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 예전의 것 오로지 하나거든. 하지만 이 번엔 용도를 아니 목표를 좀 수정해보려고. 그러니까..... 폭탄을 맞았을 때 피 보게 되는 사람을 은선우에서 은나영으로 바꿔 볼..."

  "너 뭐야?! 네가 뭔데 감히 나영이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

 성난 야수와도 같은 표정으로 돌변한 선우가 그 때까지 자릴 지키고 앉아있던 미랑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며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이미 선우의 약점을 잡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녀의 얼굴엔 여유만만한 미소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선우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대는 한 편 불안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동생을 무척 아낀다고 하더니 이 정도로 반응이 빨리 올 줄은 몰랐네. 하여간 이 손, 그만 좀 놓으시지. 사람들 이목 끌어봐야 서로한테 좋을 거 없으니까. 우리 다시 앉아서 차분하게 얘기하자구."

 미랑의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면상 앞에 선우는 욕지기가 치미는 기분이었지만 자신이 이성을 잃어봤자 현재로선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내던지듯 미랑을 도로 의자에 주저앉히고 그도 다시 조금 전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 거야, 너. 빨리 말 안해?!"

  "당신이랑 나연희씨 관계, 매스컴에 터뜨려 봐야 당신은 상관 않는다고 했지 아마. 하지만... 당신 동생에겐 꽤 상처가 될텐데 오빠 된 도리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안 그래?" 

  "말 돌리지 말고 핵심만 말해."

  "그거 알고 있었어? 현재 나영씨랑 교제 중인 상대가 대한그룹 회장의 막내라는 사실 말야. 정말 재주도 좋지. 석사학위 따기도 바빴을 텐데 그 짬에 연애까지... 그것도 대한그룹 회장 아들하고 말이야. 휘유우."

 미랑이 대한그룹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과장되게 혀를 내두르는 시늉을 하고 있는 동안 선우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최근 나영과의 통화에서 선우는 그녀에게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나영의 교제 상대가 우리나라 3대 재벌기업으로 꼽으라면 단연 제일 먼저 호명될 대한그룹의 회장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던 선우였다.

  "듣자하니 두 사람 가볍게 만나는 관계는 아니라고 하던데... 그리고 은나영씨 귀국 시기에 맞추느라 남자 쪽에서 남은 체류일정까지 접고 서두르는 이유가 혼담준비 때문이라고도 하고 말야. 하지만 당신도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어. 대한그룹 최회장이 연예인들을 얼마나 천시하는지. 자기 아들들한테 만약 연예인하고 스캔들 하나만 내도 상속인에서 제명시켜 버리겠다고 했을 정도라잖아. 결혼도 아닌 그저 스캔들 하나만으로도 말야. 그러니 정말 혼담이 오갈 경우 오빠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나영씨에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뭐 그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극복이 될 수도 있을는지 몰라. 진짜 폭탄은 말야 당신과 당신 여동생의 생모가 나연희라는 사실, 그것도 딴따라 생활을 위해 자식까지 내팽개치고 나간 여자라는 사실이겠지. 최회장이 과연 그런 핏줄을 물려받은 나영씨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 할까? 그것도 매스컴을 통해 그런 천박한 가정사가 낱낱이 까발려진 기삿거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녀를?"

 그제서야 미랑이 계획하고 있는 의도가 얼마나 비열한 것인가를 깨달은 선우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혐오감으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불끈 그러쥐고 있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상대가 여자만 아니었다면 날아가도 열 두 번은 더 날아갔을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니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연신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미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은 졸지에 비운의 줄리엣이 되어 버리는 거야. 그리고 머지 않아 그녀는 알게 되겠지. 누구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틀어져 버리게 되었는지를 말야. 세상에서 가장 믿어왔던 다름 아닌 자신의 오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은 얼마나 클까?!"

 그랬다. 칼자루는 이미 그녀 미랑이 쥐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는 노도와 같다 해도 선우는 미랑이 던지고 있는 비수들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빠, 나... 사랑하는 사람... 생겼어.'

 귀국 날짜를 알려오는 전화통화 중 문득 늘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의 그녀답지 않게 왠지 머뭇머뭇 거리며 수줍은 듯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그러나 그 어느 때 보다도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나영은 말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노라고. 

 '오빠에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주고 싶어. 그리고 누구에게보다 먼저 축하 받고 싶기도 하구.'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가벼이 꺼낸 말이 아님을 선우는 알았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감정이 깊다는 뜻이기도 했다.

 겉보기엔 활달하기 그지없는 성격의 그녀였지만 선우와 마찬가지로 쉽사리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이기도 했기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던 선우였다. 하지만 그에 앞서 무조건적으로 나영의 선택을 믿기에 두 사람의 만남을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리라 마음먹고 있던 선우는 나영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바위처럼 단단히 쥐고 있던 자신의 주먹이 스르르 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이를 갈며 으르렁대듯 선우가 말했다.

  "후후후. 이제서야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 질 것 같군."

  '뱀처럼 교활하고 사악한 것 같으니!' 

 승리감에 도취되어 키들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선우의 마음속 저 밑바닥에선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끓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차가운 돌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결혼해요, 우리."

  "......!" 

 충격으로 선우의 눈썹이 가파르게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랑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결혼하자고요." 

  

 희원은 전시회의 폐장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나타난 선우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성진과 준희가 그를 기다리다 지쳐 먼저 돌아간 지도 벌써 오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무리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해도 연결되지 않았기에 방정맞은 생각이라고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혹시나 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조바심에 애를 태우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좀 늦었지? 많이 기다렸니?"

 하지만 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다가오자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야속한 마음이 같이 고개를 들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지, 사람 걱정하게 스리.....'

 아마도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모양이다.

  "미안, 미안. 우연히 옛날 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아, 그 녀석이 날 잡고 통 놔주질 않아서 말야. 반갑다고 어찌나 설쳐대는지 그 통에 전화 한 통 걸 짬이 없었지 뭐냐. 그런데 그 놈이랑 헤어져 나오자마자 희원이 네가 얼마나 목을 빼고 날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생각에 얼른 전화기를 꺼내 들었는데 아, 하필 핸드폰 밧데리가 다 떨어져서 전원이 꺼져있더라고. 그런 줄 알았으면 헤어지기 전에 그 놈 핸드폰 좀 빌어 우리 희원이한테 전화 한 통 걸어주는 건데."

 미안함 때문인지 선우가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마구 너스레를 늘어놓자 희원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짐짓 토라진 표정을 유지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그래요. 그런 적 없어요, 나."

  "에이, 얼굴에 다 그렇게 써있는데 뭘."

  "어머, 내 얼굴 어디에요. 그건 그냥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보인 거라고요." 

  "그런...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 문득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떠올랐다 사라진 것을 불행하게도 희원은 놓치지 않았다.  덜컹.

 다음 순간 희원은 자신의 심장이 저 만치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선우...오빠......?'

 생각해보니 그 답지 너스레를 떨었던 것도, 전화 밧데리가 떨어졌다는 얘기도, 무엇보다 오늘 같은 날 선우가 그녀에게 줄 꽃 한 송이조차 가져오지 않았다는 상황 모두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의 빈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희원의 맥박이 자꾸만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불안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희원은 황급히 선우를 등지고 돌아서며 말했다.

  "선우오빤 여기 까지 와서 내 작품은 거들 떠 볼 생각도 않네."

  "아참... 그렇군. 와아... 이게 정말 희원이 네 작품이야? 근사한데. 이야..."

 등뒤에서 들려오는 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원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이유 없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아니야,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괜스리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 거야.' 

 희원의 작품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던 선우의 시선이 문득 그 옆에 꽂혀있는 장미 꽃 한 송이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놓인 커다란 글라디올러스 꽃바구니에도.

  '아뿔사!'

 미랑으로 인해 마구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머리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던 터라 사실 한치의 마음의 여유도 없이 전시회장을 찾았던 선우는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뭔가 오늘 같은 날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 커플링을 품에 담고 전시장을 찾아오던 그는 꽃다발 같은 건 준비하지 않았었다. 맨 손으로 온 것처럼 굴다가 깜짝 선물로 커플링을 내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선뜻 희원 앞에 커플링을 내놓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 그와 그녀의 운명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이틀간 여유를 주겠어요.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난 기다리는 일엔 별로 소질이 없어서 이틀도 크게 선심 쓰는 것인 줄이나 알아둬요.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날 우습게 보지 말아요. 지금까지의 내 얘기 헛소리라고 생각했다가 사후에 감당해야 할 일들은 모두 당신 책임이야.'

 처지가 바뀌어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있던 선우를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며 미랑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얘기가 그의 귓가를 다시 한 번 쟁쟁하게 울렸다.

  "꽃... 너무 급하게 오느라 아무 것도 못 사왔다."

 선우가 문득 희원의 손을 끌어다 잡으며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괜, 괜찮아요. 그런 거. 오빠가 와준 것만으로도 난 기뻐요."

  '정말이에요. 난 이렇게... 오빠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요. 내가 바라는 건 그 것밖에 없어요.'

  "네겐 특별한 날일텐데... 정말 미안하다, 희원아."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선우는 갑자기 목구멍으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아 오르는 느낌에 잠시 목이 메이고 말았다. 앞으로 그녀에게... 정말 미안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는지. 생각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희원아?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은 거니?'

 선우는 외투 안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작은 상자의 존재를 너무도 선명하게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나즈막히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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