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 (51/75)

  

# 51.

 그 날 밤, 희원은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옆방에선 하루 종일 연습실에 틀어박혀 다른 멤버들과 지치도록 신곡연습에 몰두했음이 분명함에도 뭔가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자정이 넘도록  둥당거리고 있는 선우의 베이스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새앨범 준비 작업에 들어간 이후로 종종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희원은 오히려 그의 베이스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콤한 꿈속에 빠져들곤 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날 밤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금세 미랑의 싸늘한 표정과 앙칼진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이미랑이 은선우랑 곧 결혼하게 될 거라구.'

 학원 앞에선 희원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그토록 당차게 미랑을 상대해 주고 돌아왔으면서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녀의 마음에 자꾸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고개를 들고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열 두 번도 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부인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미랑의 말투엔 분명 희원으로선 이유를 짐작키 어려운 어떤 자신감이 실려있었다. 그저 자신의 성미를 못 이겨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원의 희미한 우려감은 시시각각 확신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희원이예요, 오빠. 잠깐 들어가도 돼요?"

  "어, 그래. 괜찮으니 들어와."

 희원이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선우의 방에 들어서자 선우는 방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악보들을 주섬주섬 집어 한 쪽으로 밀어놓은 후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 옆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르고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었다.

  "앉아, 여기."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야속한 잠은 자꾸만 달아날 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 머리 속으론 언짢은 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망설임 끝에 코코아 한 잔을 타 들고 선우의 방을 찾은 희원은 그녀를 반기며 밝게 웃는 선우의 얼굴을 보자 웬지 모르게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그 앞에서 그녀의 불편한 속 내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희원은 가까스로 밝은 표정을 가장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향기 좋은데."

  "코코아예요."

  "아니. 희원이한테서 나는 향기 말이야."

  "예?"

  "이리 와봐."

 불현듯 선우가 그 옆에 다가와 앉은 희원의 머리를 슬며시 끌어 안으며 그녀의 머리칼 사이에 코를 묻는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 샤워를 마친 희원에게서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이상하다."

  "뭐, 뭐가요?"

 갑작스런 선우의 행동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희원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며 물었다.

  "나도 분명 너랑 같은 샴푸를 쓸텐데 왜 이렇게 다른 향기처럼 느껴질까?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

  "음... 뭐랄까. 훨씬 달콤하고... 또 아주......"

 그러나 한동안 선우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자 조금 전의 부끄러움을 접고 희원이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아주... 유혹적인데."

  "......!"

  "하하하. 한 마디 더 했다간 요 귀여운 뺨이 아주 타버리기라도 하겠는 걸."

 선우가 장난스럽게 희원의 한 쪽 뺨을 살짝 꼬집으며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내 선우는 정색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희원의 말그레한 두 눈동자에서 갑자기 굵다란 눈물 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어? 내 손이 그렇게 매운가? 많이 아팠어? 난 그냥 살짝 꼬집는다고......"

  "아니에요. 아파서 우는 거."

  "그럼, 왜...? 희원이... 너 무슨 일 있구나? 그렇지?"

 선우의 눈동자가 즉시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자 희원은 얼른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일 따위 없어요."

  "......"

  "그냥... 바보처럼... 너무 행복해서요. 오빠랑 이렇게 나란히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문득 너무 행복하고 고마워서요."

  "정말... 그 것뿐이야?" 미덥지 못한 기색이 실린 어조로 선우가 되물었다.

  "네. 정말이에요. 나 정말... 바보 같죠?"

  "그래, 이 바보야. 깜짝 놀랐잖아."

  

 하지만 선우는 깜짝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의 기분이 저조해 있을 때라도 환한 햇살처럼 밝은 희원의 얼굴을 보면 금세 유쾌한 기분으로 바뀌곤 하던 선우는 갑작스런 희원의 눈물바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실 어쩔 수 없이 유명세를 업고 지내야 하는 선우로서는 진위여부를 떠나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가십이나 스캔들, 다소 광적인 팬들의 언행으로 인해 희원이 마음을 다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늘 노심초사하고 있던 입장이었기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눈물을 떨구는 희원의 모습에 순간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로 운 거라면 이거 왠지 기분 그만인 걸."

 물론 희원의 돌연스러운 눈물은 그녀의 말처럼 선우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도 행복하고 고마움에 겨운 눈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행복하고 고마운 만큼 누군가의 시기로 인해 그것이 깨어질까 봐 두려운 마음 가눌 길 없어 흘린 눈물이기도 했다. 그 누군가가 미랑이 될 수도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혹은 운명의 신이 될 수도 있기에. 

 참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왈칵 터져 버린 눈물샘 탓에 몹시도 당황스러웠지만 다행스럽게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선우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보여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희원은 그러나 자꾸만 울컥 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난... 희원이 네가 밝게 웃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어쩌나... 코가 루돌프처럼 빨개졌네."  

 아직 눈물로 축축해 있는 희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선우가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잇자 결국 한 번 터진 눈물샘은 주책 맞게도 또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이런, 이 번엔 감격의 눈물인가? 흠, 나랑 같이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흘리는 희원이 눈물 맛은 도대체 어떤 맛인지 한 번 볼까?"

 말을 마친 선우는 곧 눈물에 젖은 희원의 두 뺨에 입을 맞춘 후 다시 그녀의 눈꺼풀에도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뜻한 입술이 희원의 살갗에 닿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몸을 그의 믿음직스러운 두 팔이 힘있게 끌어안았다.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온과 향취로 인해 희원은 그녀의 마음에 드리워 있던 그늘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깨달으며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아주 꼬옥. 그리고 이내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는 그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 완전히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말없이 그녀를 감싸 안아주는 선우의 품안에서 희원은 선우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한 날 밤 자신의 방에서 꼭 지금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채 나즈막히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심장은 결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그래.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어. 선우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니까. 그거면 돼. 그걸로 충분해. 그걸로... 충분해.....'

 마치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듯 천천히 어깨를 한 번 들썩거린 후 희원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가끔씩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기까지 하면서 한동안 말없이 희원을 끌어안고 있던 선우는 그녀가 어느 사이 자신의 품안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아기처럼 쌔근쌔근 잠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소 띤 얼굴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나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몰라, 희원아."

 그는 실로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잠시 동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머리칼을 쓸어주다 이렇게 다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런 야심한 시각에 나 혼자 있는 방에 들어와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버리다니... 곤란한 아가씨로군. 그냥 이대로... 오늘 밤 널 네 방으로 보내지 말아버릴까?"

 아무래도 좀 더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간 그의 내부에 숨어있는 늑대 한 마리가 정말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선우는 조심스럽게 희원을 안아 든 후 희원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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