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 (50/75)

# 50.

  "뭐 그렇게 벌레 씹은 얼굴 할 필요 없어. 그냥 안부나 물을까 해서 잠깐 들른 것뿐이니까."

 결코 안부나 물을까 해서 일부러 그곳까지 걸음을 할 미랑이 아님을 알기에 희원의 얼굴엔 금세 의구심으로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을 것이다. 커다란 선글라스 속에 감춰진 미랑의 눈빛을 읽어낼 길 없었지만 희원은 그녀의 입 끝이 살짝 비틀리며 위로 향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즘 드라마다 광고다 여기 저기 출연하느라 바쁘다면서?"

 희원은 그러나 오랜 동안 친구 사이로 지내왔던 그녀에게 되도록 반감 같은 건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가능한 한 덤덤한 어조로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미랑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온 몸으로 오오라처럼 내뿜는 적개심 뿐 이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는 넌 요즘 은선우의 숨겨진 연인 행세하느라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면서?"

  "......!"

 갑자기 희원은 자신의 몸 속을 돌고 있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왜였을까? 미랑의 입에서 선우의 이름을 듣는 순간 희원은 불길한 전율이 세차게 자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느낌이었지만 너무도 강렬했기에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 따위한테 분에 넘치는 상대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설마 아니겠지? 혹 헛된 몽상에 빠져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정신 차리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거라는 충고 해주려고 왔어.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와 수고스럽게 이런 충고 해주는 거 그나마 지난 우정을 생각을 해서 베푸는 호의라는 거 알아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쩌지... 네 호의... 전혀 달갑지가 않네. 수고스럽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미안하다. 너도 바쁠 테지만 나도 지금 무지 바쁘거든. 먼저 가볼게."

 왠지 뼈 속까지 와들와들 떨리는 느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희원이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미랑 앞에서 자신의 겁먹은 모습, 흔들리는 모습 따위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실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쥐어짠 용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발아래서 발버둥치고 있는 먹이를 집요하게 움켜쥐고 있는 육식동물처럼 미랑은 호락호락 희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아예 숨통을 끊어놓기로 결심한 듯 그녀는 희원에게 강력한 치명타를 날렸다.

  "나, 선우 오빠랑 결혼할거야."

  "뭐?!"

  "나 이미랑이 은선우랑 곧 결혼하게 될 거라구."

  

 단지 빈정거림만이 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단히 확신에 차있는 목소리가 몹시도 희원의 신경에 거슬렸다. 도대체 미랑은 무슨 이유에서 저렇듯 자신 만만한 태도로 선우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얘기를 당연지사인 것처럼 내뱉고 있는 것일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미랑의 성격상 그저 질투심에 사로잡혀 혹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선우로 인해 치민 울화를 그런 억지소리를 해서라도 풀기 위해 안쓰러운 노력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고 싶었던 희원은 순간 미랑에게 걷잡을 수 없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7년 가까이 미랑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변덕과 때때로 지나치다 싶게 못되게 구는 성미를 받아주면서 단 한 번도 미랑이 그녀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바보스러워 보일만큼 미랑에게 관대했던 희원이었지만 이 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용을 베풀기에 미랑의 심술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더구나 희원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그리고 너무나도 오랜 기간 가슴 졸임 끝에 확인한 사랑 앞에 관용이란 이름의 우스꽝스럽고 위선적인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단 한 발짝도!

 문득 희원은 선우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그저 그녀를 향해 던지는 가벼운 미소 하나, 눈짓 한 번만으로도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하지만 그는 곧 하늘의 별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그의 입에서 직접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을 만큼 그를 향해 제어할 수 없이 치닫는 자신의 감정을 짝사랑일 뿐이라 여기며 얼마나 오랜 동안 혼자 가슴 졸이고 아파해야 했었는가.

 앞으로 미랑이 아닌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선우에 대한 희원의 사랑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선우에 대한 그녀의 굳은 믿음이 힘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여리고 소심한 자신의 성격을 미랑에게 이용당해선 안 된다는 자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희원은 미랑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자신도 모르게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한 얼굴로 미랑을 마주 보았다.

  '그래. 겨우 이런 일로 주눅 들어선 안 돼. 어차피 선우 오빠는 평범한 위치의 사람은 아니야. 너도 각오하고 있었잖아, 채희원. 어쩌면 앞으론 이보다 더한 경우도 겪어야 할지 몰라. 그 때마다 벌벌 떨면서 겁을 집어먹는다면 넌 결국 선우 오빠를 잃게 될 거야. 네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말 거라고! 용기를 내, 채희원. 그저 질투심에 사로잡혀 혼자서 펄펄 뛰고 있는 미랑이 계집애 따위 코웃음치며 무시해 버리라고! '

  "뭐지, 그 표정은? 내 말이 농담처럼 들린다는 거야?"

 처음엔 움찔하며 낯빛이 창백하게 변하는 희원의 표정을 보고 잠시 잔인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미랑이 돌연 희원의 얼굴에 떠오른 불가해한 미소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꼈는지 반달모양으로 정리한 가느다란 두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미랑아.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릴 나한테 와서 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선우 오빠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야. 그리고 선우 오빠가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고 난 확신해. 그러니까... 너도 이런 유치한 행동 그만 해라. 그래 봤자 네 꼴만 점점 우스워지니까. 너도 앞으로 내가 널 두고두고 불쌍한 애라고 여기길 바라진 않겠지? 아마도 네 자존심이 그걸 허락 치는 않을 거야. 안 그래?" 

  "뭐,뭐라고?! 하,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미랑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희원의 응수에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그녀의 말처럼 기가 막히는지 허리에 손을 짚고 한동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다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너 요즘 선우 오빠한테 귀여움 좀 받는다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왔나 본데... 나 참 기가 막혀. 너 따위가 감히 뭐 어쩌고 어째? 유치한 행동? 내 꼴이 뭐가 어쨌다고?"

  "아직 못 알아들었니? 다시 말해줄까? 그러니까 네 말처럼 나 따위한테까지 웃음거리로 보이고 싶지 않으면 이런 유치한 수작 좀 앞으로 자제하라고. 그 동안은 정말이지 친구라서 참아주고 있었는데 이젠 정말 도저히 못 봐주겠다, 이미랑. 제발 나이 값 좀 하고 철 좀 들어라, 응? 아휴, 너희 부모님들도 참 걱정이 많으시겠다. 쯧쯧."

  미랑은 여지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원에 태도에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는지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는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희원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곧장 말은 잇지 못한 채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며 그저 무서운 기세로 콧김만 씩씩 내뿜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아니 못된 친구에게 조소를 날릴 만큼 여유를 되찾은 희원은 짐짓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이런!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했잖아. 선우 오빠가 기다리겠네. 미안하다, 미랑아. 오랜 만에 만났는데 내가 좀 바빠서 말야. 먼저 간다."

  "채희원!" 

 미랑은 뾰족한 구두 굽으로 발 밑이 꺼져라 자신이 서있던 자리를 쾅쾅 찍어대며 앙칼진 소리를 냅다 질렀지만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희원은 몸을 돌려 곧 자리를 떴다. 그러다 몇 발자국을 걸어 나가던 희원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미랑을 돌아보더니 혀를 차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아참, 네 앞 이빨에 루즈 왕창 묻었더라."

 다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희원의 뒤에서 아니나 다를까 천을 찢는 듯한 미랑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비명 소리를 뒤로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떼는 희원의 얼굴엔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듯한 개운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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